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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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3화


제 315 장 절세고수(絶世高手)

무당산의 아침이 밝았다.

많은 사람들은 떠오르는 양광을 받으며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굳게 잡았던 각오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오늘이 아주 긴 하루가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진산월이 막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 그를 맞이한 사람은 동중산이었다.

“세숫물을 준비했습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세수를 하고 동중산이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때까지도 동중산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진산월의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세수를 마친 진산월은 조용한 눈으로 동중산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하도록 해라.”

평소에 진산월의 아침 세숫물을 준비하는 것은 막내인 손풍의 몫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동중산이 대신했으니, 그것은 필시 진산월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중산은 조금은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닙니다. 장문인께서 새벽에 들어오신 듯 하여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동중산은 진산월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던 낙일방이 혼자 돌아오자 밤새 진산월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새벽녘이 조금씩 밝아올 즈음에야 멀리서 숙소로 오는 진산월을 발견했는데, 그때 진산월의 표정이 너무 무거워 보여서 혹시라도 무슨 변고가 생긴 게 아닌가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아침에 조심스레 살펴본 진산월의 표정은 여느 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듯 했다. 하나 동중산은 진산월이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데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완전히 안심하지는 않았다.

“별일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동중산은 그 대답에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진산월은 임영옥을 잠깐 만나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이내 숙소를 벗어났다. 동중산만이 그를 따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에 머무르기로 했다.

형산파와의 비무가 내일로 다가왔기 때문에 모두들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상황이었다. 비무에 참가하기로 내정된 사람들은 자신의 무공을 가다듬고 마음을 추스르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 외의 사람들은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매사에 언행을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일쑤였던 손풍조차도 입을 굳게 다문 채 조용히 자신의 방에 처박혀 있을 정도였다.

숙소를 나온 진산월과 동중산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청운도장이었다. 청운도장은 이번 집회 내내 종남파의 안내를 맡았으며, 특히 진산월을 위해 거의 매일 종남파의 숙소를 방문하고 있었다.

무림에서의 그의 지위와 명성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무당파에서 진산월과 종남파에 쏟고 있는 정성과 예우는 대단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도 그 점에 대해 사의를 표했다.

“번번이 청운도장의 신세를 지게 되는구려. 아래 배분 제자들을 보내셔도 충분한데 말이오.”

청운도장은 수려한 외모에 어울리는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빈도야 말로 진 장문인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천하에 신검무적을 먼발치에서라도 한 번 보기를 갈망하는 무림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 자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쉬워지는군요.”

“그럼 오늘 하루만 더 폐를 끼치겠소.”

“별말씀을. 자소전으로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집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열린 집회가 사전 모임의 성격이 강했다면, 오늘 집회야 말로 무림맹의 조직을 정비하고 서장 무림과의 본격적인 일전을 선포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집회에 참석하는 무림인들의 상당수는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들이었다. 진산월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의 흥분은 한층 더 고조되어 곳곳에서 웅성거림과 감탄성이 그치지 않고 터져 나왔다.

“신검무적이다.”

갑자기 웅성거림이 더욱 커지더니 이내 주변이 저자거리처럼 소란스러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형산파 고수들이 자소전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형산파에서 오늘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은 용선생과 오결검객 중의 칠지신검 좌군풍이었다. 용선생은 멀리서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체를 해왔고, 진산월도 가벼운 눈인사를 보냈다. 반면에 좌군풍은 진산월을 한 차례 힐끔 거리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는데, 의미를 알기 어려울 만큼 담담하고 차분한 시선이었다.

진산월은 무심히 그 광경을 넘겼으나, 동중산은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내일로 닥쳐온 종남파와의 비무에 대해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듯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형산파가 종남파와의 비무에서 승리를 자신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자소전으로 들어가니 이미 적지 않은 무림인들이 자리를 잡고 좌정해 있었다.

자소전이 비록 커다란 건물이지만 무당파에 온 모든 무림인들을 수용할 수는 없기에 자소전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들은 각파의 수뇌급들과 무림맹의 주요 인물들, 그리고 특별히 초청된 무림의 명숙들로 정해져 있었다. 비록 그 숫자는 밖에 모여들고 있는 무림인들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 면면을 보면 가히 중원무림을 대표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사시(巳時)가 되자 한 차례 북이 울리며 몇 명의 인물들이 자소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무당파의 장문인인 현령진인과 무림맹의 맹주인 위지립, 그리고 모용봉이었다.

모용봉이 무림인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나타나자 장내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로 쏠렸다. 그만큼 아직까지도 무림인들의 머리속에는 모용봉이라는 그림자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현령진인이 참석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위지립을 장내에 소개하는 것으로 무당집회의 마지막 행사가 시작되었다.

위지립은 자리에서 일어서 지난 이틀 동안의 집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을 정리해서 발표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림맹의 조직을 일신하는 일이었고, 위지립은 오늘 집회에서 그 인선(人選)을 마무리 짓고 중추절까지 중원에 숨어 있는 서장 세력을 일소할 계획을 확정하려는 뜻을 밝혔다.

집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전에 중요한 안건들이 이미 결정되어서인지 쓸데없이 트집을 잡거나 엉뚱한 의견을 내놓는 자들도 없었고, 인선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거나 반대를 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싱거울 정도로 많은 사안들이 재빠르게 결정되고 있었다.

하나 인선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무림인들도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위지립이 밝힌 무림맹의 조직은 맹주 휘하에 정보(情報)와 자금(資金), 무력(武力)을 담당하는 삼단(三團)을 두고, 따로 신속하게 움직이며 적들을 타격할 수 있는 하나의 별동대(別動隊)를 두는 것이었다.

예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단순해진 만큼 효율성은 오히려 훨씬 더 높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무력을 무단(武團)이라는 조직으로 통괄하여 이전처럼 쓸데없이 방만하게 흩어져 있던 무림의 힘을 하나로 모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반(先班)이라고 이름 붙여진 별동대를 주목했다.

먼저 나서서 적을 타격하는 선반은 단순한 이름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근처의 무림인들을 소집하여 부릴 수 있는 권한이 있기에 이용하기에 따라 상당히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늘 서장 무림에 먼저 공격당했던 피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공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이 많았다.

“선반의 반주(班主)는 그 임무만큼이나 중차대하며 어려운 자리요. 자칫 선반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다가는 서장 무림과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낭패를 당하게 될지도 모르오.”

위지립이 굳이 밝히지 않더라도 선반의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중대한 것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선반의 주인이 누가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위지립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인들의 눈도 자연스레 그곳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가 탐내면서도 어려워했던 선반의 반주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선반의 반주는 종남파의 장문인이신 신검무적 진산월, 진 장문인께서 맡아주시기로 하셨소.”

때마침 흘러나온 위지립의 말에 순간적으로 주위에 정적이 감돌았으나, 이내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그렇지. 신검무적이라면 믿을 수 있지.”

“아무렴. 신검무적이 아니라면 누가 선뜻 선봉에 나서서 중원무림을 위해 검을 휘두를 수 있단 말인가?”

진산월은 주위의 환호를 받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불초불민한 제게 너무 커다란 자리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맡기를 원하는 분이 계시면 언제라도 양보할 용의가 있으니 의향이 있으신 분은 나서 주시기 바랍니다.”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이 환호와 박수소리로 가득한 장내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중인들은 더욱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신검무적-!”

이런 열광적인 분위기에서 감히 신검무적의 자리를 뺏고자 앞으로 나설 사람은 없었다.

위지립은 흐뭇한 미소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으나, 내심으로는 진산월에 대한 무림인들의 지지와 성원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커다란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신검무적 개인에 대한 호감일수도 있고, 바닥에 떨어졌다가 다시 일어선 종남파에 대한 찬사일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무림인들이 신검무적과 종남파에게 성원을 보낸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에 모인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이름난 고수들이거나 강호의 명숙들이었다.

물론 위지립은 이러한 관심이나 성원은 모래성 같아서 어느 순간에 너무도 쉽게 허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내일 벌어질 형산파와의 비무에서 종남파가 패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을 향한 무림인들의 지지와 성원은 급격히 사그라질 것이다. 또한 상승검객(常勝劍客)으로 이름 높은 신검무적이 누구에게라도 패하게 되면 더 이상 이러한 환호는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 만에 하나라도 형산파와의 비무에서 종남파가 승리하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위지립은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종남파와 신검무적은 말 그대로 중원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될 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때의 신검무적을 과연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위지립은 중인들의 환호에 답한 후 착석하는 진산월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가 무심결에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칠지신검 좌군풍의 냉정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은 담담한 표정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속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선반의 반주가 정해지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삼단의 단주가 누구로 임명될 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무단의 단주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다.

사실 권한으로만 놓고 보면 무단의 단주야 말로 실질적인 무림맹의 최고 요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맹주보다도 더욱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단의 단주는 무림맹의 거의 대부분의 무력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지위였던 것이다. 그에 비해 맹주가 직접 운용할 수 있는 무력조직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일부 무림인들은 왜 위지립이 스스로의 권한을 양보하면서까지 무단에 그토록 많은 힘을 실어주는 지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중요한 무단의 단주를 맡을 적임자는 과연 누구일까?

많은 사람들이 서로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했으나 뚜렷하게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강호에서의 지위와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서 모용공자가 맡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적지 않았으나, 모용공자는 중추절 결전의 핵심인물이기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단을 통솔해야 하는 단주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 중 몇 사람이 후보군에 오르기도 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배척되거나 무단을 맡기에는 미흡하다는 중론이 지배적이었다. 무엇보다 무단은 특정 문파의 우두머리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강력한 조직이었다. 다른 문파에서 순순히 그것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구파일방과 다른 방파의 주인들을 제외하면 무림구봉 정도가 남는데 그들은 대부분이 한 문파를 이끌고 있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남들 앞에 설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개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자도 있었다.

주위가 점차 소란스러워졌다.

한동안 가만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위지립은 중인들의 의견이 좀처럼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되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묵직한 음성을 토해냈다.

“무단의 단주는 권한만큼이나 중요한 자리이기에 본 맹주는 주변의 명숙들과 오랫동안 진지한 고민을 나누었소. 그래서 마침내 그 자리에 어울리는 분을 선정할 수 있게 되었소.”

그 말에 장내가 조용해지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위지립의 입으로 향했다.

위지립이 슬쩍 몸을 돌려 자소전의 내실 방향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천천히 내실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십대 후반에서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그를 보자 몇몇 무림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었던 것이다.

“앗? 당신은……!”

그들 중 누군가가 놀란 외침을 토해낼 때, 위지립의 묵직한 음성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소개해 드리겠소. 십여 년 전에 혜성같이 강호에 나타나 놀라운 무공으로 세상을 경악하게 했던 십방랑자(十方浪子) 사효심(査曉心), 사 대협이시오.”

무림인들은 위지립의 말에 놀라고, 중년인의 모습을 보고 더욱 놀랐다.

십방랑자 사효심은 점창파가 배출한 최고의 검객으로, 십여 년 전만 해도 무림제일을 논(論)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었던 인물이었다.

하나 언제부터인가 강호에서 그 모습이 사라져 많은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실종을 두고 숱한 괴소문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혹자는 그가 점창파 최고의 비전(祕傳)을 얻기 위해 폐관에 들어갔을 거라고 했고, 혹자는 사랑하는 여인과 혼인을 위해 강호를 등졌다고도 했다. 그리고 점창파의 문규를 어겨 면벽수련의 징벌을 받고 있을 거라는 자들도 있었다.

그것은 사효심이 강호에서 행도할 때 명문정파의 제자답지 않게 자유분방하고 때로는 방종해 보이는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방랑벽이 심해서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는 성격 탓도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사효심이 그러한 성정 때문에 점창파의 징계를 받았거나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그의 검술은 정말 뛰어나서 무림구봉 중의 검봉인 육합신검 용진산과 종종 비교되기도 했었는데, 화산파의 장문인인 용진산과 점창파의 일개 제자인 그를 같은 선상에서 저울질한 것만으로도 무림인들이 그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사효심이 강호무림에서 사라진 지 십여 년 만에 돌연 무림집회에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많은 무림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효심의 외관은 세간에 퍼져 있는 소문과는 달리 중후하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십방랑자라는 외호처럼 떠돌기 좋아하고 제 멋대로 살아온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려한 모습이었다. 담담한 가운데 맑고 힘 있게 빛나는 두 눈과 우뚝 솟은 콧날, 굳게 다물어져 의지견정해 보이는 입술과 약간 각진 턱은 남자다운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인중용(人中龍)이란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사효심은 정광(精光)이 어른거리는 눈으로 군웅들을 둘러보다가 양 손을 들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한 점의 흐트러짐이 없이 절제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호방한 느낌이 드는 동작이었다.

“강호의 동도들을 다시 뵙게 되어 반갑소. 점창의 십육대 제자인 사효심이라 하오.”

사효심에게서는 막 오십 줄에 접어든 중년 특유의 여유와 품격, 그리고 은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그를 보는 군웅들의 눈에 반감보다는 호기심어린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군웅들 중 상당수는 십오 년 전의 사효심을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개중에는 그와 친분을 나누었던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그를 알아보고 반가움을 표하는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사효심은 자신을 향해 반색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운 얼굴들이 많이 보이는구려. 그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한 죄는 나중에 따로 받기로 하겠소. 그보다 먼저 아직 미흡한 구석이 많은 나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위지 맹주와 현령 장문인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오.”

장내는 침 삼키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고, 중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사효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갑작스런 등장은 모두의 가슴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오랜만의 출도(出道)인지라 한편으로는 설레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지만, 뒤늦게라도 강호무림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위지 맹주의 부탁을 수락하게 되었소. 이 점에 대해 강호 동도들의 넓은 이해와 아량을 당부 드리겠소.”

과거의 그를 기억하고 있던 무림인들은 예전보다 한층 성숙하고 차분해진 그의 모습이 다소 낯선 듯한 표정이었고,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정중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그의 모습에 적지 않은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사효심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으면서도 말꼬리가 분명하고 울림이 좋아서 듣는 이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주었다.

“무단의 단주는 무림맹의 무력을 실질적으로 통솔하는 아주 중요한 직위라고 생각하오. 내가 과연 그런 중책을 감당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호동도들께서 맡겨주신다면 임무를 수행하는데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매끄러운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가 큰 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 형이라면 무단의 단주를 맡는데 하등의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오. 그런데 대체 그동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거요?”

질문을 던진 사람은 광동(廣東)의 최고고수라고 알려진 검정신학(劍鼎神鶴) 표성선(表聖宣)이었다.

표성선은 광동의 제일고수일 뿐 아니라 그 일대를 석권하고 있는 백학문의 문주이기에 당금 무림의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거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는 예전부터 사효심과 친분이 두텁기로도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사효심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에는 놀라움과 반가움, 그리고 약간의 서운함 등 다양한 감정들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사효심은 표성선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표 형께 먼저 인사를 하지 못해 미안하오. 그동안 피치 못할 일 때문에 소식을 전할 수 없었소.”

“그 피치 못할 일이란 게 무언지 알 수 있겠소?”

표성선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재차 그에게 물었으나, 사효심은 고개를 내저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미안하오.”

표성선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자신으로서는 그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가 이 자리에 불쑥 나타난 사효심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억누르고 그간의 일을 설명할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질문을 던졌는데, 중인 환시리에 일언지하에 거절당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때 다른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 사제가 칩거한 이유는 본 파의 기밀에 관한 것이라 공개된 자리에서는 밝힐 수 없으니, 표 문주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표성선은 말을 한 사람이 점창파의 장로인 독검취응 백리장손임을 알고 딱딱했던 얼굴이 약간 누그러졌다.

“백리 대협의 말씀대로 점창파 내부에 관한 일이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그래도 간단히 한 마디라도 언급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표성선이 약간의 서운함이 담긴 눈으로 사효심을 쳐다보자 백리장손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사 사제가 워낙 성품이 충후하여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무는 버릇이 있다는 건 표 문주께서도 아시지 않소?”

그제야 표성선도 표정이 풀어지며 수긍의 빛을 떠올렸다.

“확실히 사 형이 그런 면이 있지요.”

장내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변하자 위지립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사 대협의 명성이나 무공으로 보아 무단의 단주를 맡을 사람으로 최고의 적임자라고 생각하여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렸소. 혹시라도 사 대협이 무단의 단주가 되는 것에 반대하거나 다른 의견이 있는 분은 기꺼이 말씀해 주시기 바라오.”

중인들 틈에서 약간의 웅성거림이 있었으나, 반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사효심이 비록 점창파의 인물이라고는 하나 강호에서 행도할 때도 특별히 점창파를 위해서 나선 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성격이 자유분방한 만큼 일에 대해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평무사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십여 년간 행적이 끊긴 것도 백리장손의 해명 때문인지 특별히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다. 문파 내부의 비밀스런 일 때문에 십여 년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경우는 충분히 이해가 갈 뿐 아니라 실제로도 제법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물론이고 무단의 단주로 가장 유력시 되었던 모용봉도 전혀 반대의사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의견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난항을 겪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무단의 단주가 사효심으로 정해지자 나머지 자리에 대한 인선은 아주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정보와 군사(軍師) 부분을 담당하게 될 신단(訊團)의 책임자는 무림맹의 군사인 취록자 허설로 결정되었고, 자금을 담당하는 금단(金團)의 단주는 소주 혁리가의 대공자이며 천금공자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진 혁리의가 맡게 되었다.

혁리의의 발탁은 사실 의외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비록 혁리가의 다음 대 가주로 유력한 인물이라고 해도 불과 서른셋의 젊은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하나 자금을 운영하는 만큼 일반적인 강호인들은 금단의 단주가 되기 힘들었고, 결국 천하의 상권(商圈)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부귀삼대가문으로 그 대상이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부귀삼대가문의 주인들은 모두 불참한 상태였기에 그들의 후예들 중 대상자를 선정해야만 했다. 석가장의 대공자인 천서 석성은 화산파와 너무 가까워서 다른 문파에서 거부했고, 장사 구양가의 대공자인 구양표일은 파락호로 유명하여 상재(商才)가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혁리가의 대공자인 혁리의는 강호에서의 명성도 높았고 주위의 평판도 좋아서 별다른 이의 없이 금단의 단주에 오르게 된 것이다.

중요한 삼단의 단주가 모두 정해지고 나무지 자리에 대한 인선이 마무리되자 집회도 점차 파장되는 분위기였다.

하나 몇몇 사람들은 집회의 끝이 다가오자 오히려 바짝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안탕산의 괴걸인 팔비신살 곽자령도 있었다.

곽자령은 주위가 소란스러운 틈에 조심스레 진산월에게로 다가왔다.

-진 장문인.

그가 은밀히 전음을 보내자 진산월은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곽 대협. 무슨 일이십니까?

곽자령은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인물이었는데, 지금은 어찌된 일인지 표정에 다급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오늘 청천을 본 적이 있나?

그의 전음에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엊그제의 만남 이후 유 대협을 뵌 적은 없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곽자령은 몇 차례나 표정이 변하더니 이윽고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사실은 청천이 보이지 않네.

진산월은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 장문인도 알다시피 청천은 오늘 집회가 끝나기 전에 모용봉의 행적에 대한 의문을 공개적으로 제시하려고 했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아까부터 그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네.

“……!”

-처음에는 그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조용한 곳에서 운공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집회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데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점차로 불안한 생각이 드는군.

진산월도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전에 만난 유중악은 모용봉에 대한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하여 그의 숨은 의도를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내비쳤었다. 그런데 지금쯤 모습을 드러내야 할 그의 행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하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유중악의 무공으로 보아 그의 신상에 변고가 생길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진산월 또한 곽자령과 마찬가지로 마음 한 구석에 무언가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곽자령의 음성은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이나 무겁고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후홍지 소협 혼자로는 이번 일을 진행할 수 없네. 강호에서의 지명도가 거의 없는 그의 말을 누가 믿어 주겠나? 더구나 청천의 성격으로 보아 이 일이 두려워 피하거나 움츠릴 사람이 아닌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행여나 그가 무슨 일을 당하지 않았나 우려하지 않을 수 없네.

진산월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황급히 전음을 보냈다.

-전에 유 대협에게서 환우삼성 중의 한 분이신 대엽진인께 도움을 청하겠다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그분을 뵙고 있는 건 아니겠습니까?

곽자령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나도 그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니네. 그래서 현수 도장께 부탁해서 대엽진인의 처소로 가보았었네.

진산월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대엽진인의 처소에는 아무도 없었네. 청천은커녕 대엽진인의 모습도 찾을 수 없었지. 모용봉의 가면을 벗길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린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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