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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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4화


제 316 장 의심암귀(疑心暗鬼)

장내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집회가 끝난 후 곽자령과 현수도장, 후홍지 세 사람은 진산월의 처소를 방문했다. 성황리에 끝난 집회와 달리 세 사람의 표정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원래 곽자령은 종남파의 거처까지 찾아올 생각은 없었다.

종남파와 형산파 사이의 비무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종남파의 문하들이 그 일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왔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곽자령으로서는 자칫 그들의 행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진산월을 찾아온 것은 그만큼 절박하고 절실한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유중악은 물론이고 그를 지원하기로 약조했던 대엽진인마저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그들의 행적을 공개적으로 조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유중악은 아직도 구궁보에서의 일로 적지 않은 무림인들에게 의혹을 사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가 대엽진인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은 극소수의 인물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기밀이었다. 그러니 그가 대엽진인을 만난 목적이 공개적으로 모용봉을 고발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떠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유중악과 대엽진인은 비단 무공 뿐 아니라 신분과 지위 등 모든 면에서 당금 무림의 최정상에 있는 고수들이었다. 그런 인물들이 중요한 순간에 갑작스레 사라졌다는 것은 그 결과여부에 따라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 수도 있고 무림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사안이 될 수도 있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장내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곽자령이 진산월에게 기대하는 것은 진산월이 날카로운 두뇌를 발휘하여 이번 실종에 대해 자신들이 알아내지 못한 단서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진산월이 무엇을 묻던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대답해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진산월은 먼저 곽자령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 아침에 유 대협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이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청천의 방문을 두드렸었지. 그때 청천은 분명히 자신의 방에 있었네.”

“그 후의 일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가뜩이나 무뚝뚝했던 곽자령의 얼굴은 보는 사람이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같이 아침 식사를 한 후 청천이 잠시 혼자 있겠다고 해서 헤어졌네. 그리고 그것이 청천을 본 마지막 순간이었지.”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묘시(卯時)가 조금 넘었을 걸세.”

“당시 유 대협에게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까?”

곽자령의 짙은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특별한 점이라니? 무얼 말하는 건가?”

“평상시와 다른 점이나 무언가 특이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알고 싶군요.”

곽자령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없었네. 평소의 청천과 전혀 다름이 없었지. 오히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일을 마무리 짓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내비쳤네.”

진산월은 몇 마디를 더 나눈 다음에 곽자령에게서는 더 이상의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곽자령 또한 이번 일에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말해주고 싶어도 그럴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에 낙담하는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현수도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수도장께서 대엽진인의 처소를 가봤다고 하셨는데,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소.”

현수도장은 선풍도골의 외모에 높은 지식과 품성을 대변하듯 고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서 누구라도 절로 존경의 염을 품을 정도로 풍채가 좋은 사람이었다. 하나 항상 붉은 빛이 감돌았던 낯빛은 핼쑥하게 변해 있었고, 맑고 청명했던 두 눈도 퀭하게 들어가 있어 반나절 사이에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휴우. 유 대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곽 대협의 말씀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엽 사숙께서 머물러 계시는 청진각(淸塵閣)을 찾아간 것은 미시(未時)경이었소.”

대엽진인은 무당파의 전대 장문인이었던 목엽진인의 사형으로, 원래는 차기 장문인으로 가장 유력시되던 인물이었다. 하나 명리(名利)보다는 본신의 수양을 더 중시했던 대엽진인은 장문인 자리를 사제인 목엽진인에게 양보하고 무공 수련과 정신 수양에 매진했다. 그 결과 지난 백 년 동안 무당파의 누구도 완성하지 못했던 양의무극신공(兩儀無極神功)을 완벽하게 터득하여 절대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가 환우삼성의 일인으로 불리며 강호인들의 존경을 받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대엽진인은 무당파가 있는 천주봉에서 멀리 떨어진 오로봉(五老峯) 인근에 청진각을 짓고 그곳을 거처로 정했는데, 특별히 친분이 있는 몇몇 지인들 외에는 누구도 찾아오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현수도장의 사부인 선엽진인(仙葉眞人)은 대엽진인과 친분이 두터워서 현수도장도 자연스레 청진각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현수도장이 청진각을 찾아갔을 때, 청진각은 텅 비어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대엽진인이 늘 청진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현수도장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어 청진각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하나 대엽진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반을 드신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아침까지는 계셨던 것 같았소. 하지만 그 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소.”

현수도장의 침울한 음성을 듣고 있던 진산월은 조용히 물었다.

“그 외의 흔적이란 무엇을 뜻하는 거요?”

“대엽 사숙께서는 조식과 석식 외에는 식사를 하지 않으시오. 대신 점심 무렵에 꼭 차를 드시는데, 오늘은 어디에도 차를 준비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소.”

“대엽진인의 식사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았소?”

“사숙께서는 일체의 번잡함을 벗고 청정(淸淨)을 유지하고자 차는 물론이고 식사도 혼자 해결하셨소. 심지어 청진각 내부의 청소도 직접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소.”

“시중을 드는 사람도 없었단 말이오?”

“사숙께서는 일 년 내내 외부와의 접견을 거의 하지 않으셨고, 본 파의 제자라도 사전에 승낙을 받지 못한 사람은 누구도 청진각의 경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소. 그러니 시중을 드는 사람이 따로 있을 리가 있겠소?”

현수도장의 말대로라면 대엽진인은 그야말로 스스로 몸을 가두어 폐관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조금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유 대협이 대엽진인을 찾아갔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 일 아니오?”

진산월의 물음에 현수도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숙께서 늘 좌정하고 계시는 자리 앞에 방석 하나가 놓여있었소. 그래서 빈도는 오늘 유 대협이 사숙을 찾아온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방석이 놓여있다고 해서 그것이 유중악이 찾아온 증거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나 현수도장은 유중악의 방문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확신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었다.

“사숙께서 방석을 내온다는 것은 찾아온 손님이 사숙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오. 어제 빈도는 유 대협을 모시고 사숙을 찾아뵈었는데, 사숙께서는 유 대협의 인품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셔서 언제라도 사전에 통고 없이 찾아와도 좋다고 하셨소. 더구나 오늘은 무림집회의 마지막 날이어서 유 대협이 사숙을 모시고 집회에 참석하기로 약조되어 있었소. 그러니 그 방석이 유 대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누구의 것이겠소?”

진산월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일단 수긍을 했다.

그렇다면 대체 유중악과 대엽진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들의 무공으로 볼 때 누군가의 암습을 받았거나 공격을 당해 강제로 끌려갔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았을 텐데, 청진각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졌거나 소란이 일어난 흔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모습을 감추었다는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럴 이유가 당최 떠오르지 않았다. 대엽진인은 몰라도 유중악 만큼은 본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무림집회가 끝나기 전에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다.

자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타의도 아니라면 대체 그들은 왜 집회에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곽자령과 현수도장은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에 진산월을 찾아왔으나, 막상 사건을 다시 되짚어보자 아무리 영민한 진산월이라도 이런 상태에서는 어떠한 실마리도 찾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유중악의 행적부터 대엽진인이 모습을 감추기까지 모든 일이 너무도 막연하고 의혹 투성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유중악이 과연 대엽진인을 찾아갔는지도 갑자기 의심스러워졌다.

과연 유중악은 대엽진인을 찾아간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왜 대엽진인과 함께 모습을 감춘 것일까?

만일 유중악이 대엽진인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면 그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대엽진인의 앞에 놓인 방석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유중악을 제외하고 대엽진인이 선뜻 방석을 내줄만한 사람이 달리 누가 있단 말인가?

그때 문득 진산월은 한 가지 의문점을 찾아냈다.

“대엽진인의 거처에 방석이 놓여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대엽진인을 찾아왔다는 뜻이오. 그리고 그 누군가는 틀림없이 대엽진인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기꺼이 방석을 내어줄만한 사람이었을 거요.”

진산월의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현수도장은 왜 진산월이 조금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꺼내는지 의아스러운 표정이었다.

“당연한 말씀이오. 빈도는 진 장문인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만.”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방석을 내올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차도 내왔을 거요. 누구보다 차를 즐기는 대엽진인이라면 말이오.”

그 말에 현수도장과 곽자령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표정이 대변했다.

그렇다. 좀처럼 외인을 만나지 않는 대엽진인이 방석을 내왔다는 것은 상대를 자신의 손님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차를 대접하는 것이 순리였다.

현수도장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평소와는 다른 큰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유 대협과 사숙을 찾아뵈었을 때도 사숙께서는 제일 먼저 유 대협에게 차를 권하셨었소. 그런데 오늘은…….”

오늘 대엽진인의 처소에는 차를 내오거나 준비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상대에게 차를 권하기는커녕 대엽진인 본인도 차를 마시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만약 방석의 주인이 유중악이라면 대엽진인이 차를 내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방석의 주인은 유중악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대엽진인은 방석을 내온 것일까? 그리고 왜 그에게는 차를 권하지 않은 것일까?

진산월이 제시한 지적은 날카로웠으나, 그 때문에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복잡하게 헝클어진 느낌이었다.

유중악은 과연 대엽진인을 찾아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유중악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대엽진인을 찾아온 의문의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대엽진인이 모습을 감춘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은 유중악의 실종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숱한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혔으나, 지금 당장은 어느 것 하나 속시원하게 풀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주어진 단서가 너무도 적었다. 당장 유중악이 대엽진인을 만났는지 안만났는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추리를 진행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내가 무거운 침묵에 잠겨있을 때였다.

“장문인.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문 밖에서 동중산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동중산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진산월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동중산은 한 차례 중인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장문인을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냐?”

“산수재 이정문입니다.”

진산월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정문의 방문에 좋은 일보다는 무언가 무거운 짐을 떠안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유중악과 대엽진인의 실종 때문에 심란한 상태에서 다른 복잡한 일에 휘말리게 된다면 내일로 다가온 형산파와의 비무에 지장을 초래하게 될 지도 몰랐다.

그래서 진산월은 이미 손님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이정문과의 만남을 내일로 미루려 했다.

하나 그의 그런 심정을 짐작이라도 한 듯 동중산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이 공자가 장문인께 전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동중산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진산월의 귀에는 천둥벽력처럼 크게 들렸다.

“대엽진인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한 예측은 항상 틀리지 않는 법이다. 이번에도 역시 그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이내 침착한 표정을 되찾으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를 이곳으로 불러라.”

이정문은 여느 때처럼 차분한 얼굴에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은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의 눈가에 한 줄기 초조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이정문에게서 처음으로 보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그렇기에 진산월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정문같이 극도로 냉정한 인물이 초조해 할 정도의 일이 어떠한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진산월은 곽자령과 현수도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정문을 다른 방으로 불렀다.

진산월의 앞에 선 이정문은 먼저 사과부터 했다.

“문파의 중요한 일을 앞둔 진 장문인을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오. 형산파와의 비무가 끝난 다음에 찾아오는 게 순리인줄은 알고 있지만, 사안이 너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무례를 범하게 되었소.”

이정문이 예를 갖추어 남에게 사과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 별로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정문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온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 공자가 그토록 급하다고 하는 사안이 뭔지 궁금하구려.”

“유 대협의 친우인 곽자령 대협과 무당의 현수도장이 진 장문인을 찾아온 것을 알고 있소. 진 장문인께서도 지금쯤은 그들에게서 대엽진인께서 모습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거요.”

진산월은 굳이 그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정문은 강호제일의 정보조직인 성숙해의 중요 책임자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곽자령과 현수도장이 자신을 방문한 것을 알고 있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현수도장께 대충의 이야기는 들었소. 아무래도 이 공자는 그 일에 대해 내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구려.”

“사실은 유 대협 일행이 무당산에 왔을 때부터 그 분들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소. 그래서 오늘 오전에 곽 대협과 현수도장의 행동이 왠지 이상하다는 보고를 받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할 수 있었소.”

이정문의 말은 자신이 유중악 일행을 줄곧 감시해 왔음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집회에서 이 공자를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그런 이유에서였소?”

“그렇소. 현수도장이 대엽진인의 처소로 갔다가 잠시 후에 황망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수하의 보고를 받고도 한가하게 집회나 구경하고 있을 수는 없었소.”

진산월은 이정문의 눈이 예리하고 두뇌가 비상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은근한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대엽진인의 처소에 가보았겠구려? 그곳에서 무얼 보았소?”

이정문은 의외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것도.”

“그게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요. 그곳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소.”

진산월은 이정문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이정문의 표정은 예의 무심한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는 조금 전에 살짝 비쳤던 초조함마저 보이지 않아 진산월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현수도장은 방석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대엽진인께 손님이 왔을 거라고 믿고 있었소. 이 공자의 생각은 어떻소?”

“방석은 방석일 뿐, 그것으로는 어떠한 사실도 증명할 수 없소.”

이정문이 방석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자 진산월은 다소 의아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 공자는 그 방석이 왜 놓여있다고 생각하오?”

“그건 방석을 꺼낸 당사자만이 알고 있지 않겠소? 손님이 와서 대엽진인께서 꺼내어 놓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대엽진인께서 사라진 후 누군가가 와서 꺼낸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오.”

그건 진산월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이정문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았으나, 방석을 누가 놓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견도 떠오르지 않았다.

“흠. 그렇다면 이 공자는 대엽진인께서 어떻게 모습을 감추었다고 생각하는 거요?”

“대엽진인의 거처에는 대엽진인의 실종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없었소. 이런 경우, 순리대로 본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가지 뿐이오.”

“그게 무엇이오?”

이정문의 음성은 여느 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엽진인께서 제 발로 걸어 나간 것이오.”

“대엽진인께서 스스로 종적을 감추었단 말이오?”

“종적을 감추었는지 아닌지는 내가 대엽진인 본인이 아니라서 알 수 없소. 단지 분명한 것은 대엽진인께서는 스스로 걸어서 거처를 벗어났다는 것이오. 그것 외에는 대엽진인 같은 분이 사라졌는데 거처에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설명되지 않소.”

이정문의 말은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대엽진인은 환우삼성의 일인으로, 배분 뿐 아니라 무공에 관해서도 당금 무림 최고의 고수 중 한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강제로 그를 억압하려 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가 반발했을 것이고, 그 흔적의 여파는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엽진인의 거처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대엽진인은 이정문의 말대로 제 발로 걸어서 거처를 벗어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유중악과의 약속이 코앞으로 닥쳐온 상태에서 왜 대엽진인은 스스로 모습을 감춘 것일까?

진산월은 문득 이정문의 말속에서 한 가지 묘한 느낌을 받고 그 점에 대해 물었다.

“이 공자는 혹시 대엽진인께서 스스로 거처를 벗어나긴 했지만 그것이 꼭 종적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오?”

이정문의 눈에 살짝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역시 진 장문인과는 이야기 하기가 편하구려. 나는 그렇게 보고 있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요?”

“대엽진인께서 유 대협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몸을 숨긴 것보다는, 무언가 다른 일이 있어서 거처를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게 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수긍의 빛을 띄었다.

“확실히 이 공자의 말대로 단순히 대엽진인께서 다른 일로 출타했을 가능성이 더 높겠구려. 하지만 그렇다면 그 분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무어라고 설명하겠소? 더구나 유 대협과 철석같이 약속까지 한 상태에서 말이오.”

문득 이정문의 눈빛이 매서운 안광을 뿌렸다.

“그것이 내가 오늘 무례를 무릅쓰고 진 장문인을 찾아온 이유요.”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대엽진인께서 스스로 출타했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 가능성은 세 가지 정도로 예상해 볼 수 있소. 첫째는 그 분이 유 대협을 피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 분의 명성이나 성품으로 보아 그런 일은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엽진인이 유중악의 청이 부담스러웠다면 애초에 도움을 주기로 약조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약조를 해놓고 몸을 피한다는 것은 너무 안일하고 치졸한 대처여서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리가 없었다.

이정문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재차 입을 놀렸다.

“둘째로는 누군가의 협박을 받았을 경우를 예상해 볼 수 있소. 물론 대엽진인 같은 분을 협박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이긴 하지만, 강호란 곳이 워낙 궤계가 난무하는 곳이니 아주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고 생각하오.”

“…….”

“셋째로 대엽진인께서 누군가의 부름을 받았을 경우요. 그 부름이란 도움을 청하는 것일 수도 있고, 부탁일 수도 있소. 아무튼 대엽진인으로서는 피하기 힘든 누군가의 부탁이나 요청으로 잠시 자리를 비웠을 가능성이 있소. 그리고 나는 이 가능성이 셋 중에서 가장 크다고 보고 있소.”

“대엽진인께서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이오?”

“못했다고 해야 좀 더 정확한 말이 아니겠소?”

“천하의 누가 감히 대엽진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분의 발을 묶어둘 수 있겠소?”

진산월은 다소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으나, 이정문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강제로 억압하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나는 말 한 마디로 대엽진인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을 적어도 세 명은 알고 있소.”

진산월도 이때만큼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누구요?”

이정문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첫째는 같은 환우삼성의 일인이신 범범대사요. 두 분은 평소에도 누구보다 우애가 돈독하셨고 친밀한 사이여서 범범대사의 말씀이라면 대엽진인께서도 잠시 자신의 뜻을 숙이셨을 거요.”

확실히 범범대사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범범대사는 환우삼성 중에서도 제일인자로 손꼽히는 절세의 고수였고, 대엽진인과는 수십 년간을 가장 친한 벗으로 지내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범범대사께서는 이번 집회에 참가하지 않으셨소.”

진산월의 반론에 이정문은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소. 하지만 서신을 보내는 정도는 그 분이 이곳에 직접 오지 않으시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오.”

“…….”

“둘째로는 모용 대협을 들 수 있소. 대엽진인께서는 평상시에도 모용 대협을 가장 존경한다고 종종 말씀하셨으니, 모용 대협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거처를 나와 스스로 모습을 감추셨을 거요.”

진산월도 이번에는 굳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모용 대협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그럴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유중악이 대엽진인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는 다름 아닌 모용 대협의 손자인 모용봉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이를 안 모용 대협이 대엽진인에게 직접 사람을 보내거나 찾아와서 자제를 부탁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과연 구궁보에 칩거하고 있는 모용대협이 수 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악하고 대엽진인에게 전언(傳言)을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세 번째 인물은….”

왠지 이정문은 선뜻 말을 잊지 않고 잠시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은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오묘한 것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진산월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정문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바로 이 세 번째 인물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물은 틀림없이 자신으로서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전혀 뜻밖의 인물일 것이다.

마침내 이정문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진산월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여실히 나타냈다.

“백 년 전의 천하제일미인인 경성홍안 백모란이오.”

이정문은 짤막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녀는 바로 대엽진인의 어머니요.”

진산월은 차를 한 잔 따랐다.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도 상당히 좋은 방법이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경성홍안 백모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이런 자리에서 듣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봉황인이라고 했던가? 석동과 철혈홍안 부부는 천룡객과 단심자로 불렸고, 백모란은 봉황인이란 이름으로 불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 세 사람 사이에 얽힌 치정(癡情)은 백 년 전의 아득히 먼 과거의 일로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나 그 여파는 오랜 세월을 지나 당대에 까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당장 종남파와 자신만 해도 그들의 신물인 봉황금시와 천룡궤로 인해 적지 않은 고초를 겪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백모란이 천봉궁의 창시자라는 점이었다.

천봉궁을 세운 그녀가 환우삼성 중의 한 사람이며 많은 무림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무당파 대엽진인의 생모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많은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철혈홍안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상 그녀의 연적(戀敵)인 백모란이 생존해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과연 이번 대엽진인의 실종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녀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리고 천봉궁과 단봉공주는 이번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이정문은 대체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무림에는 자신이 모르는 이러한 비밀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사실들을 외부로 알리지 않고 자신들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자들일까? 그리고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숱한 의문이 계속 떠올랐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니,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겠군.’

이정문은 이번 대엽진인의 실종에 어떤 식으로든 백모란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굳이 그녀의 이름을 제일 마지막에 거론했을 리가 없었다.

진산월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이정문은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백모란이 대엽진인의 생모라는 사실을 밝힌 후, 진산월은 차 한 잔을 따라놓고 깊은 상념에 잠긴 모습이었고 이정문 또한 더 이상의 입을 열지 않았다.

진산월의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이 떠오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가 무척이나 심란하고 마음이 복잡하리라는 건 이정문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기분 같아서는 그의 머릿속이 정리될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주고 싶었다. 하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진산월이 찻잔을 내려놓고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이정문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하마터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입을 열 뻔 했던 것이다.

이번 일에 자신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조언자에 그쳐야 한다. 절대로 자신이 앞에 나서서 이끌어 가거나 유도하는 모양새를 취해서는 안된다.

진산월은 이정문의 그런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여느 때처럼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백모란이 대엽진인의 생모라는 건 확실히 뜻밖의 일이오. 그런데 이 공자가 그녀를 거론했다는 건 그녀가 아직까지도 생존해 있다는 뜻이오?”

“그렇다고 알고 있소.”

그렇다면 이 공자는 그들 세 사람 중 누가 가장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소?”

“친우나 존경하는 사람이 부탁한다고 해서 대엽진인같은 분이 그동안 닦아온 청정(淸淨)을 더럽힐 것 같지는 않소.”

이정문은 에둘러 말했으나 진산월은 쉽게 알아듣고 수긍의 빛을 떠올렸다.

“생모의 부탁이라면 아무리 대엽진인의 심지가 곧다고 해도 자신의 뜻을 굽힐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단순히 그런 점 때문에 이미 강호에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은 그녀를 이번 일의 배후로 지목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혹시 그녀를 의심하는 다른 이유라도 있소?”

“진 장문인이 알지는 모르겠지만, 당금의 천봉궁주는 그녀의 제자요. 그녀에게는 몇 명의 수족과도 같은 시비(侍婢)들이 있는데, 그녀는 그들을 통해 천봉궁주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하오.”

“……!”

“조금 전에 그 시비들 중 한 명을 무당파의 경내에서 보았소.”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대엽진인의 거처가 빈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심코 천봉궁의 고수들이 머무르고 있는 남암궁(南岩宮) 부근을 지나게 되었소. 그때 한 사람이 재빨리 남암궁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녀는 바로 백모란의 시비 중 한 사람인 남연옥(南燕玉)이었소.”

진산월은 잠시 의미를 알기 힘든 눈으로 이정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운이 좋았구려.”

“확실히 그런 것 같소. 남연옥은 경성홍안의 시비들 중에서도 천봉궁의 인물들과 가장 자주 접하는 사람이라, 나도 용케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소.”

진산월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이정문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내 말은 당신이 정말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는 뜻이오. 현수도장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말에 대뜸 대엽진인의 거처를 찾아간 것이나, 하필이면 대엽진인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남암궁까지 삥 돌아서 하산한 것이나, 그때 공교롭게도 남암궁 안으로 들어가는 누군가를 발견한 것이나, 그 사람이 용케도 얼굴을 알고 있던 백모란의 시비인 것이나……. 그 중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당신은 백모란이 대엽진인의 실종에 관련되었을 거라는 의심을 하지 않았을 테니, 정말 지나치게 운이 좋은 일 아니겠소?”

이정문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가뜩이나 냉정하고 퉁명스러워 보였던 이정문이 딱딱한 얼굴로 입술을 악다물고 있자 심통스럽고 고약해 보였다. 진산월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정문을 한동안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가 한결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 공자가 이번 일을 백모란이 관여한 것으로 몰아가려는 이유는 굳이 묻지 않겠소. 아마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기 때문이오. 그건 대답해 줄 수 있겠소?”

이정문은 살짝 찡그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처럼 말하면서 아직도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단 말이오?”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은 그 모습은 사 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를 연상케 했다.

“그렇소. 한 가지만 대답해 주면 되오.”

“그게 무엇이오?”

“육 소저는 어디에 있소?”

진산월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그 말을 듣자 이정문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진산월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이정문의 괴팍하게 굳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지금까지 육 소저와 줄곧 동행했었소. 더구나 무당산에 와서는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소. 그런데 오늘은 육 소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구려.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해줄 수 있소?”

“…….”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셈이오?”

이정문은 몇 차례나 표정이 변한 다음에야 이윽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진 장문인은 역시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오. 그나저나 어떻게 알았소?”

“오늘따라 당신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기색이 느껴졌소. 그건 평소의 당신답지 않은 모습이었지. 당신 같은 사람이 초조해 할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당신이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소. 그리고 이내 당신 옆에 늘 머물러 있던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소.”

“늘 머물러 있던 사람이라….”

이정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그답지 않게 허무하고 쓸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확실히 옆에 없고 나서야 그녀의 빈자리가 절실해 지는군. 옆구리가 허전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사람에 따라 얼마나 가혹한 말인지도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소.”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정문은 무언가 커다란 상실감을 느낀 사람처럼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는 내게 약간은 귀찮고 성가신 존재였지. 물론 가끔은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녀가 없다고 허전함을 느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소.”

“…….”

“오늘 나는 유 대협이 무언가 큰 일을 저지르려 한다는 것을 알았소.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대엽진인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나는 유 대협을 방해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나서서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소. 그저 일이 어디까지 진행될지 조용히 지켜보고만 싶었지. 그래서 그녀에게 부탁했던 거요.”

“무얼 말이오?”

“오늘 하루 유 대협의 거처를 주의 깊게 지켜보라고 말이오.”

“왜 그녀에게 그런 부탁을 했던 거요?”

“나는 만약 일이 벌어진다면 유 대협의 신상에 변(變)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소. 하지만 내가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 중에는 유 대협에게 발각당하지 않고 그를 지켜볼 만한 고수가 없었소. 그래서 그녀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던 거요.”

“당신은?”

이정문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혁리공의 뒤를 쫒아야 했기에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었소.”

“혁리가의 혁리공 말이오?”

“그렇소. 나는 그를 야율척의 둘째 제자로 확신하고 있소.”

진산월은 예전에 낙일방을 통해서 성숙해의 대공자인 이정악이 삼공자와 사패천이라는 인물들을 쫒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삼공자는 야율척의 제자 세 사람이었고 사패천은 야율척의 수하들로, 모두 야율척이 중원에서 거둔 인물들이라고 했다.

그중 셋째 공자가 바로 장안 이씨세가의 만상공자 이존휘였음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금 이정문은 삼공자 중의 두 번째가 혁리가의 공자인 혁리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혁리공은 무당산 밑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나타낸 후 줄곧 종적을 감췄지만, 나는 그가 이번의 무당집회에 와 있음을 확신하고 그의 뒤를 쫒고 있었소. 그러다 얼마 전에야 겨우 그의 꼬리를 발견하게 되었소. 집회가 오늘로 끝나기 때문에 그 전에 그를 잡기 위해서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는 상황이었소.”

“그녀는 어찌 되었소?”

“유 대협과 함께 사라졌소. 그리고 나는 조금 전에 누군가에게서 이것을 전해 받았소.”

이정문은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금색 수실이 달린 작은 노리개였다. 옥(玉)으로 만든 듯한 그 노리개는 한 쌍의 원앙이 정교한 솜씨로 새겨져 있었다.

그 옥노리개를 바라보는 이정문의 눈은 왠지 모르게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이것은 원앙패(鴛鴦佩)라는 것인데, 우리가 만난 지 일 년이 된 기념으로 내가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오. 온옥(溫玉)으로 만든 것이어서 몸에 지니고 있으면 따뜻한 온기가 나기 때문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이것을 몸에서 떼어본 적이 없었소.”

진산월은 그녀가 원앙패를 늘 지니고 다닌 것은 온기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그가 직접 선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그것을 전해준 사람은 누구요?”

“모르오. 유 대협이 사라지고 그녀 또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난 직후 방으로 돌아와 보니 탁자 위에 이것이 놓여 있었소. 한 장의 편지와 함께.”

이정문은 원앙패를 뒤집었다. 원앙패 밑에 몇 번이나 접은 종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정문은 그 종이를 진산월에게 내밀었다.

진산월이 펼쳐보니 문장 하나가 쓰여 있었다.

<그녀를 다시 보고 싶으면 신검무적을 오늘밤 자정까지 비신대(飛身臺)로 데려오시오.>

진산월은 잠시 그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비신대는 어디요?”

“남암궁 뒤쪽의 절벽이오.”

남암궁은 자소궁의 동쪽에 위치한 도교사원으로, 지금은 천봉궁의 인물들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를 유인하기 위해 백모란의 이름을 꺼냈던 거요?”

의외로 이정문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정색을 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오. 확실히 백모란은 이번 대엽진인의 실종과 관련이 있소. 그리고 어차피 진 장문인은 오늘밤에 그곳으로 가야만 하오.”

“무엇 때문에?”

이정문의 말은 냉정을 유지하던 진산월의 얼굴을 처음으로 굳게 만들었다.

“귀 사제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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