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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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6화


제 318 장 심야혈전(深夜血戰)

진산월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큰 키와 약간은 마른 체구, 그리고 왼쪽 뺨의 칼자국 때문에 차갑고 강인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조금 더 그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전신에서 흐르는 절제된 기도와 고적한 눈빛, 낮게 가라앉은 차분한 음성 때문에 무척이나 냉정하고 침착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혁리공이 진산월을 만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진산월의 또 다른 면모를 보게 되었다.

서늘한 위엄이랄까? 무언가 범접하기 어려운 거대한 기세 같은 것이 그의 전신에서 퍼져 나와 주변을 자욱하게 뒤덮는 것 같았다.

마치 심령이 조여드는 듯한 그 섬뜩한 느낌은 혁리공으로서도 좀처럼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 예전에 한 번 이와 유사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혁리공은 어느 새 오장 앞까지 다가온 진산월을 발견하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진 장문인. 다시 만나게 되었구려.”

어느 새 평정을 되찾았는지 혁리공의 음성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내가 분명히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앞을 가로막으려거든 그만한 각오를 해야 한다고. 당신은 각오가 되어 있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조용한 음색,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건만 그것을 듣는 순간 혁리공을 비롯한 일대의 사람들은 차가운 빙굴 속에 들어간 듯한 싸늘함을 맛보아야 했다. 눈빛도 담담하고 음성 또한 차분하거늘 이러한 한기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혁리공은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모산도의 추한산장에서 진산월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지금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경고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난 자신은 그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계획들을 모두 파기해야 했다. 그때 짜두었던 계획들로는 도저히 그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혁리공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대책을 세워둔 채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몇 번의 검토와 치밀한 준비 끝에 절대적인 승산을 가지고 일을 진행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리공은 자신이 오늘 밤 그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 확고한 자신이 서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를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막상 그를 눈앞에 마주하게 되자 모든 확신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희미한 불안감만이 가슴 한 구석을 조금씩 채워가고 있었다.

그 불안감을 억누르려는 듯 혁리공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신검무적을 상대하는 데 각오도 없이 덤비는 자가 있겠소?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걸 내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는데 말이오.”

진산월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절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동굴이 뚫려 있소. 그 동굴로 들어갔더니 저곳으로 나오더군.”

혁리공은 혀를 찼다.

“허! 그런 건 미처 몰랐소. 그럼 사전에 이미 그곳에 암도(暗道)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건 아무래도 산수재의 솜씨 같구려.”

혁리공이 돌아보자 이정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멎었지만 그의 안색은 아직도 핏기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창백했고, 눈가에는 고통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진산월에게 장력을 맞아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건 분명해 보였다. 그랬기에 백석기와 혁리공 같이 눈치가 빠르고 영악한 인물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겠지만, 확실히 과감한 계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리공도 그 점을 알아차렸는지 이정문을 보는 눈길이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정문은 스스로의 몸을 이용하면서까지 완벽하게 혁리공을 속였고, 육난음의 사저인 능자하까지 끌어들여 육난음을 구출해갔다. 그 과정의 치밀함과 과단성은 혁리공으로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대체 비신대 절벽 아래 그런 암도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소?”

혁리공이 정말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묻자 이정문은 특유의 퉁명스런 음성으로 대꾸했다.

“비신대 위쪽의 비승각은 지금은 점창파의 고수들이 머무르고 있지만 원래는 무당파의 양대 호법진인 중 한 분이신 현성 도장의 숙소였소. 그래서 현성 도장을 찾아가 비신대 일대의 지형에 대해 물어서 알게 되었소.”

원래 그 암도는 비신대의 가파른 절벽 끝에 나 있는 작은 동혈(洞穴)이었는데, 우연히 그 동혈을 발견한 현성 도장이 동혈을 좀 더 깊게 파서 한 사람이 충분히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현성 도장은 가끔 복잡한 일이 있거나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 그 동혈을 이용했는데, 동혈 밖으로 보이는 비신대 주변의 절경이 워낙 뛰어나서 아예 절벽 위에서 편하게 출입할 수 있도록 반대쪽에 입구를 만들고 바위로 막아두었던 것이다.

이정문은 혁리공이 일을 꾸미려는 곳이 비신대 임을 알자 비신대 주변의 지형을 가장 잘 알만한 인물을 물색하다 비승각의 원주인이 현성 도장임을 알아내고 비밀리에 그를 찾아가 절벽 아래에 동혈이 숨어 있음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래서 진산월과 상의하여 그 동혈을 이용해 그가 절벽 밑으로 추락한 것처럼 위장하는 계략을 꾸몄던 것이다.

그들의 동작 하나 하나는 치밀하게 짜인 계획에 의한 것이었는데, 심지어 이정문이 진짜 부상을 입을 정도로 강하게 손을 쓰도록 한 것도 이정문 자신이 먼저 주장한 일이었다.

당시 진산월은 별로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않았고, 실제 상황이 되자 이정문이 순간적으로 공포에 질릴 정도로 무서운 장력을 날려 그를 당혹케 했는데, 덕분에 이정문은 일부러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이 진짜로 피를 흘리며 고통에 신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혁리공은 의문이 풀리자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 되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심지어 그는 이정문과 진산월을 향해 박수를 보내는 여유마저 보여주었다.

짝짝!

“두 분의 치밀한 계략에 박수를 보내는 바이오. 첫 판은 내가 두 분께 깨끗이 당했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겠소.”

말과는 달리 혁리공의 얼굴에는 조금도 낭패스럽거나 당황해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밤은 길고, 우리 사이의 일도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오. 사실 진 장문인이 그렇게 허무하게 추락사 했다면 오히려 크게 실망했을 거요.”

진산월과 이정문은 별다른 대꾸도 없이 혁리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혁리공이 이대로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혁리공이 준비한 다음 수(手)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혁리공의 시선이 진산월에게 향했다.

“조금 전에 진 장문인은 내게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물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묻고 싶소. 진 장문인도 각오는 되어 있소?”

“무슨 각오 말이오?”

혁리공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저쪽을 한 번 보시오.”

진산월이 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측으로 십 여 장 떨어진 숲속에 돌연 횃불 하나가 나타나더니, 그 횃불의 불빛 사이로 희끗한 인영이 어른거렸다. 안력을 돋우어 보니 백의를 입은 청년 한 사람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내 횃불이 꺼져 백의인의 모습은 짙은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나 진산월은 백의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비록 흐트러진 머리에 핼쑥한 낯빛을 하고 있었으나, 그는 다름 아닌 악자화였다. 어제 밤에 진산월에게 만나자고 편지까지 보내고서는 나타나지 않아 가슴을 졸이게 했던 악자화가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모습으로 출현한 것이다.

혁리공은 횃불이 나타날 때부터 진산월의 얼굴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진산월의 얼굴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분명 횃불 사이로 드러난 백의인이 한때 자신의 사제였던 악자화임을 알아보았을 텐데도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듯한 모습에 새삼 혁리공은 진산월이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지 알아 보시겠소?”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혁리공은 진산월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재차 입을 열었다.

“원래 귀 사제를 좀 더 적절히 사용하려 했으나, 그 정도로는 진 장문인을 위태롭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잠시 보류해 두었소.”

진산월은 불쑥 물었다.

“그를 어쩔 셈이오?”

“쓸모없는 장기말은 폐기하는 게 당연하니 그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 진 장문인도 한 번 상상해 보시오.”

“……!”

“설사 진 장문인이 내가 준비한 수를 모두 파훼한다고 해도 귀 사제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을 거요. 그러니 진 장문인도 오늘 밤 사제 한 사람쯤은 잃어버릴 각오를 해야 할 거요.”

혁리공이 진산월의 마음을 흔들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다면 그의 계획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지만, 무심히 늘어져 있던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용영검을 향해 움직였던 것이다. 그와 함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싸늘한 기운이 삽시간에 좌중을 뒤덮을 듯 구름처럼 일어났다.

하나 혁리공의 신형은 어느 새 뒤로 오 장이나 물러나 있었다.

동시에 진산월의 사방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파파파파팍!

진산월의 전신을 난도질 할 듯한 무시무시한 섬광이 폭포수처럼 퍼부어졌다. 그 섬광 하나하나에 실린 경력은 능히 바위를 두부처럼 갈라버릴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그 순간, 진산월은 출수를 했다.

따따따땅!

마치 쇠구슬이 철판을 가격하는 듯한 음향이 거푸 터져 나오며 그토록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던 섬광이 부서진 햇살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안개인지 연기인지 모를 뿌연 검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전(全) 강호를 두려움과 경이에 떨게 했던 절세무적의 유운검법이 드디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일단 진산월의 손에서 유운검법이 펼쳐지자 장내가 온통 번쩍이는 검광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설사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 할지라도 그 구름처럼 일렁이는 검광 속에서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허공으로 튕긴 채 산산이 비산(飛散)될 줄 알았던 섬광들이 튀어 오른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며 재차 진산월의 전신을 에워싸는 것이다. 개중에는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곡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것도 있었다.

그와 함께 무섭게 퍼져나가던 검광이 급속도로 축소되며 검광에 가려졌던 장내의 광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 속도와 위세는 처음에 비해 확연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모두 여덟 명의 흑의인들이 팔방(八方)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흑의인들의 손에서 뻗어 나온 섬광들이 삼엄한 검기의 소용돌이를 뚫고 그의 전신을 그물망처럼 조여가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저 섬광들이 대체 무엇이기에 신검무적의 검기로도 끊어내지 못한단 말인가?’

이정문은 비록 무공실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안목에 관한 한은 나름대로 뛰어난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이정문조차도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금석(金石)이라도 종잇장처럼 베어버리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진산월의 검기에 격중당하고도 단 한 줄기의 섬광도 맥없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서릿발 같은 검기에 섬광 한 줄기가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단지 한 차례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가 이내 다시 원래의 위치로 빠르게 되돌아오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정문은 안력을 잔뜩 돋우고 나서야 그 섬광들이 은빛 비늘로 뒤덮여 있는 특이한 밧줄들임을 알 수 있었다. 밧줄의 굵기는 어른의 새끼손가락 정도에 불과했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비늘로 이루어져 있어, 지금같이 짙은 어둠속에서는 그저 한 줄기 섬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밧줄의 재질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신검무적의 검기를 감당해 낸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저런 특이한 밧줄이 있다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정문의 눈이 여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뜩였다.

‘은빛 밧줄……? 그렇구나. 서장무림의 칠대기물 중 하나라는 은혼삭(銀魂索)이로구나. 그렇다면 저들은…….’

은혼삭은 천하에서 가장 질기다는 은린사(銀鱗蛇)의 껍질을 특이한 방법으로 담금질하고 그 안에 독각응룡(禿角應龍)의 힘줄을 접합하여 만들어낸 특이한 밧줄이었다. 질기면서도 신축성이 좋아서 아무리 날카로운 병기에도 잘리지 않고 인력(人力)으로는 절대로 끊을 수 없다고 알려져 있는 기물 중의 기물이었다.

이 은혼삭은 그 자체의 위력만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그 효용성을 가장 잘 살리는 방법은 그것으로 사람을 포박하는 것이었다. 일단 묶기만 하면 제아무리 천하에 다시 없는 고수라 할지라도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은혼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마 은혼삭의 제조가 손쉬웠다면 그로 인해 수많은 고수들이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다행히 은혼삭의 재료인 은린사의 껍질과 독각응룡의 힘줄은 구하기가 너무도 힘들었고, 그것들을 결합하는 방법 또한 비전중의 비전이어서 서장에서조차 은혼삭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장에서 은혼삭의 제작 비법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문파는 은월문(銀月門)이었는데, 그들조차도 대여섯 가닥의 은혼삭 밖에는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그 길이조차 일 장 정도에 불과해서 사용상에 제약이 많았다.

그런데 십여 년 전 은월문의 문주가 우연히 독각응룡과 은린사를 모두 구하는 절세의 행운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은월문에서는 오 장 길이의 은혼삭을 무려 여덟 개나 제작할 수 있었다. 그 은혼삭의 품질 또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서 그들은 커다란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서장무림에는 허리춤에 기다란 밧줄을 동여맨 여덞 명의 고수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이 펼치는 특이한 합격진에 일단 걸히게 되면 그들의 손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은혼삭의 거대한 그물망에 갇혀 누구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바로 서장십이기 중의 서열 삼위이며 은월문의 최대 자랑인 신포팔월(神捕八月)이었다.

눈앞의 흑의인들은 바로 그 신포팔월임이 분명했다.

그들의 등장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아 명성 자체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서장무림의 어떤 고수보다도 상대하기 어려운 자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서장십이기 중의 누구라 해도 그들이 펼치는 팔방마라진(八方魔羅陣)안에 갇히게 되면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고 믿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진산월의 상황도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진산월이 펼치는 용영검의 날카로운 검기로도 은혼삭을 잘라낼 수는 없었다. 진산월이 그 점을 분명히 인식했을 때는 이미 그의 사방은 은혼삭에 둘러싸여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수십 가닥으로 불어난 은혼삭은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그물처럼 그의 전신을 조금씩 조여오고 있었다.

흑의인들의 양 손에 들린 은혼삭은 두 겹, 세 겹으로 마구 불어났다. 그 은혼삭의 한쪽 가닥은 다른 방향에 위치한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가 손목에 휘감긴 채 이내 또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는데, 그 때문에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어느 가닥이 어떻게 꼬여 있는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휙휙!

진산월이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 좁아질수록 신포팔월의 움직임은 한층 더 민첩해졌다. 수시로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 이동하는 그들의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마치 여덟 개의 허깨비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진산월의 주위를 에워싼 은혼삭의 가닥은 더욱 복잡하게 엉키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은혼삭이 조여들자 누가 보기에도 진산월의 몸이 곧 은혼삭에 꽁꽁 묶인 고치 신세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진산월이 휘두르는 용영검의 영역도 급속도로 축소되어 이제는 검기가 솟구치는 거리가 채 반 장도 되지 않았다. 머리 위를 올려보거나 아래를 내려 보아도 이미 은혼삭이 총총하게 쳐져 있어 도저히 뚫고 나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정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진산월이 신포팔월의 은혼삭을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강호는 넓고 고수는 구름처럼 많구나. 저런 식의 수법으로 강호제일검객의 검을 막아낼 수 있다니.’

자신이 진산월이라도 도저히 은혼삭의 공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변변치 않은 자신의 실력으로 저 숨 막히는 전장 속에 뛰어들어 진산월을 도울 수도 없었다.

이정문이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도 진산월의 주위를 에워싼 은혼삭의 그물망이 조금씩 좁혀 들더니 마침내 손만 내밀어도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때 갑자기 진산월은 맹렬하게 휘두르던 용영검을 멈추었다.

마치 자포자기한 듯한 그 모습에 이정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은혼삭의 접근을 막던 용영검의 검기가 사라지자 진산월의 몸을 둘러싼 은혼삭의 반경이 급속도로 좁아졌다.

그리고 막 진산월의 전신이 은혼삭에 꽁꽁 묶이려는 순간, 갑자기 우두커니 서 있던 진산월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휘이잉!

그와 함께 그의 주위에 있던 은혼삭이 그의 몸을 칭칭 감으며 급속도로 짧아졌다. 그럼에도 진산월의 몸은 회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사막 한 가운데에서 한 줄기 용권풍(龍捲風)이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은혼삭을 잡고 있던 여덟 명의 흑의인들이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짧아진 은혼삭을 따라 주르르 끌려오기 시작했다.

“어엇?”

흑의인들은 대경실색하여 사력을 다해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으나, 진산월의 몸이 회전하는 기세가 워낙 강렬하여 삽시간에 주르르 끌려오고 말았다.

그들이 은혼삭에 칭칭 감긴 채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는 진산월의 몸에 거의 닿을 즈음, 진산월의 몸이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흑의인들 중 몇몇은 어찌된 사정인지 알고 은혼삭을 놓고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이미 은혼삭은 그들의 손과 팔에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서 도저히 단시간 내에 풀어낼 수가 없었다.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는 진산월의 신형을 따라 그의 몸을 고치처럼 휘감고 있던 은혼삭이 급속도로 풀려났다. 그와 함께 은혼삭 사이로 용영검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흑의인들은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으나, 그때는 이미 용영검이 움직이기 시작한 후였다.

파앗!

용영검 특유의 우유빛 검광이 피어오르는 순간, 시뻘건 핏물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크아악!”

“아악!”

대여섯 명의 흑의인들이 거의 동시에 피분수를 뿜으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무사한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는데, 그들조차도 채 한 걸음을 더 내딛기 전에 또다시 일렁이는 검광에 피를 뿌리며 쓰러져야 했다.

너무도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의외의 급변에 이정문은 물론이고 혁리공 또한 일시지간 넋을 잃고 멍하니 장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그토록 삼엄하고 막강해 보였던 신포팔월의 은혼삭 공세가 이리도 허무하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툭툭!

진산월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자신의 몸에 휘감겨 있는 은혼삭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꽁꽁 묶였다면 아무리 진산월이라도 혼자의 힘으로 은혼삭을 풀 수 없었겠지만, 양쪽으로 회전하면서 생긴 반발력 때문에 몸을 운신할 공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조금 전에 그가 펼친 것은 종남파의 비전신법인 곤지룡(滾地龍)을 즉흥적으로 변형시킨 수법이었다. 원래 곤지룡은 자신의 몸을 회전시켜 상대의 하체를 공격하는 신법이었는데, 그 곤지룡에 와선보(渦旋步)와 천단신공 중의 전륜결(轉輪訣)을 혼합하여 독창적인 수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방식의 기발함은 말할 것도 없고, 회전하는 기세의 가공함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누구도 믿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자신의 몸을 도구삼아 상대를 끌어들이는 순간적인 기지와, 여덟 명이나 되는 신포팔월이 속절없이 끌려올 정도의 강력한 기세가 만들어낸 놀라운 광경이었다.

진산월이 자신의 몸을 거의 감다시피 하고 있는 은혼삭에서 몸을 완전히 빠져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혁리공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 아주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에 진산월은 비록 은혼삭에 몸이 묶인 상태는 아니었으나 분명한 행동의 제약이 있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면 어쩌면 대어(大魚)를 낚을 수 있었음에도 혁리공은 순간적인 놀라움 때문에 그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진산월이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은혼삭을 한 가닥 씩 풀었던 탓도 있었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다급한 표정을 보였다면 혁리공이 좀 더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조치를 취했을 지도 몰랐다.

어쨌든 진산월은 무사히 은혼삭의 공세에서 빠져나왔고, 혁리공이 믿고 있던 신포팔월은 자신들이 흘린 피바다 속에 누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든 채로 혁리공을 향해 성큼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미 혁리공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는지 그의 태도에는 한 치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혁리공은 조금 전에 비해 확연히 굳어진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과연 호락호락하지 않군. 이번에도 살아나올 수 있다면 기꺼이 상대해주지.”

혁리공은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걸음을 내딛던 진산월이 갑자기 몸을 멈추고 한쪽을 쳐다보았다.

짙은 어둠에 잠긴 숲속에서 몇 개의 인영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죽립(竹笠)을 깊게 눌러쓴 네 명의 황포인이었다. 황포인들의 체구는 제각각이었으나 하나같이 전신에서 삼엄한 기도를 흘려내고 있어 범상치 않아 보였다.

네 명의 황포인은 순식간에 진산월의 사위(四圍)를 에워싸고는 이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그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임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상당히 독특한 것이었다. 적어도 중원문파의 그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너무도 이질적인 그 기운은 낯섦과 동시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나 진산월은 주의는 하고 있을지언정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독특하고 신기한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 할지라도 싸움의 승패는 결국 누가 더 빠르고 강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변칙은 잠깐의 우세를 차지할 수는 있으나, 결국은 정통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眞理)였다.

순식간에 진산월을 사방에서 포위한 네 명의 황포인들 중 한 사람이 일언반구 말도 없이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별다른 변화나 기교도 없이 일직선으로 곧장 덤벼오는 그의 몸은 허점투성이여서 진산월이 아닌 웬만한 검객이라도 단숨에 베어 넘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용영검으로 그의 가슴을 갈라버렸다.

팟!

용영검의 서릿발 같은 검기가 그의 가슴을 가르고 지나가며 잘린 황포자락이 허공에 나부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가 튀거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진산월은 용영검으로 황포인의 가슴을 베는 순간, 마치 끈적끈적한 아교덩어리를 베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도저히 사람의 몸을 베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베어진 황포자락 사이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황포인의 가슴에는 선명한 혈선(血線)이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혈선의 한쪽 끝에 피 한 방울이 맺혀 있을 뿐, 피부가 갈라지거나 핏물이 뿜어 나올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황포인은 전력을 다해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죽립 아래로 살짝 드러난 황포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진산월의 귓전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진산월은 재차 용영검을 위에서 아래로 재차 내리그었다.

쫘악!

황포인이 쓰고 있던 죽립이 반으로 갈라지며 그의 얼굴이 송두리째 드러났다. 빡빡 깎은 머리에 흉광이 이글거리는 두 눈이 무척이나 거칠고 사납게 느껴졌다.

황포인의 이마에서 코를 지나 아래턱까지 붉은 선이 쭈욱 그어지며 시뻘건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나 황포인은 조금도 몸을 멈추지 않았다. 놀랍게도 바위조차 단숨에 갈라버리는 진산월의 검을 정면으로 맞고도 황포인은 단지 피부가 갈라지는 것에 그쳤던 것이다.

그때는 이미 그와 진산월의 사이가 지척에 불과해서 도저히 재차 검을 휘두를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팟!

진산월의 용영검이 다시 한 차례 번뜩였다. 팔과 팔이 맞닿아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그 짧은 거리에서 진산월은 용영검으로 정확하게 황포인의 목덜미를 찔렀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토록 강인한 황포인의 몸도 더 이상 버텨내지 못했다. 용영검은 단숨에 황포인의 목덜미를 관통하여 목뒤로 삐져나왔다.

황포인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며 양 손으로 자신의 목을 관통한 용영검을 움켜잡았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잡아 빼려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검에 관통당한 황포인의 목덜미 근육이 바짝 수축되어 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았다. 게다가 용영검을 힘껏 움켜잡고 있는 황포인의 손에는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얇은 장갑이 씌어져 있었는데, 그 장갑의 손바닥 부분에는 깨알같이 작은 빨판모양의 흡착판이 달려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진산월이라도 일시지간은 황포인의 목에서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에 다시 두 명의 황포인이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이미 작심을 했는지 죽립마저 팽개친 채 무서운 기세로 덤벼드는 두 황포인의 머리는 목을 관통당한 황포인과 마찬가지로 머리카락 한 올 없이 파르스름하게 깎여 있었다.

계인(戒印)이 없는 민머리에 황포 사이로 언뜻 보이는 특이한 붉은 빛 염주모양의 목걸이를 보는 순간, 이정문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소뢰음사(小雷音寺)의 혈라마(血喇嘛)들이구나!”

뇌음사는 원래 천룡사(天龍寺)와 함께 서장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그들은 서장 밀교의 주도권을 놓고 오랜 다툼을 벌였는데, 사십여 년 전에 천룡사에서 아난대활불이라는 희대의 천재가 등장한 이후 천룡사가 뇌음사를 누르고 서장을 아우르는 최고의 세력이 되었다.

뇌음사의 승려들 중 과격한 교리로 무장한 일단의 승려들이 추방되어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분파를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소뢰음사였다. 소뢰음사가 세워진 후 그들과 구분하기 위해 원래의 뇌음사를 대뢰음사(大雷音寺)로 부르기도 했다. 소뢰음사의 승려들은 피로 세상을 정화시키는 혈불(血佛)을 믿는 자들이어서 붉은 색 염주를 신물로 삼았는데, 그래서 그들을 혈라마라고 칭했다.

아난대활불의 등장 이후 대뢰음사는 은인자중하면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소뢰음사의 고수들 또한 전혀 보이지 않았었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소뢰음사의 혈라마들이 나타났으니 실로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뢰음사의 무공은 정통을 숭상하는 뇌음사와는 달리 괴팍하고 사이(邪異)하기 이를 데 없어서 처음 그들의 무공을 접하는 사람들을 당혹케 만들기 일쑤였다.

지금도 검에 목을 꿰뚫린 상태에서도 여전히 검을 놓지 않고 있는 혈라마의 모습은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기괴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혈라마의 목에 꽂혀 꼼짝도 않고 있는 용영검을 놓으며 양 손을 옆으로 내뻗었다. 태진강기가 실린 대천장이 양쪽에서 덤벼드는 혈라마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콰쾅!

두 번의 폭음이 연거푸 울리며 그들의 신형이 허공으로 한 차례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대천장의 위세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그들의 가슴이 움푹 꺼졌고, 입과 코로 시커먼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달려드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고, 각기 진산월이 내민 두 팔을 끌어안았다.

휘리릭!

미처 내민 양팔을 회수할 사이도 없이 그들에게 잡힌 진산월은 있는 힘껏 두 팔을 휘저었다. 그가 사용한 것은 장괘장권구식 중의 삼환투일을 좀 더 크게 변환한 것으로, 아무리 강한 고수라도 그 회전하는 위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게 상리였다.

하나 두 명의 혈라마는 그의 팔이 회전하는 대로 몸이 끌려오면서도 두 팔과 두 다리를 사용하여 자신들이 부여잡은 진산월의 팔을 더욱 강력하게 끌어안았다.

쿵쿵!

그들의 몸이 몇 차례나 세차게 바닥에 부딪혔으나 오히려 진산월의 팔에 가해지는 압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마침내 진산월도 더 이상은 양 팔을 마음 먹은 대로 휘두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마지막 남은 혈라마가 어느 사이에 진산월의 뒤로 다가와 그의 목과 몸통을 사지로 조이기 시작했다.

뿌드드득!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진산월의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감돌았다.

장검을 놓치고 두 팔과 등 뒤를 각기 한 명씩의 혈라마에게 붙잡힌 진산월은 강철기둥이라도 구부러뜨릴 것 같은 강력한 조임에 눌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이를 본 혁리공의 눈에 순간적으로 희색이 감돌았다.

‘과연 소뢰음사의 비술(祕術)은 대단하구나. 이대로라면…….’

네 명의 혈라마들은 소뢰음사의 사대존자(四大尊子)들로, 소뢰음사가 자랑하는 신비의 기공(奇功)을 익힌 자들이었다. 그 기공은 천축 비전의 유가술(瑜伽術)중에서도 가장 괴이한 유마환영대법(幽魔幻影大法)이라는 것인데, 이 대법을 완성하게 되면 도검으로도 쉽게 잘리지 않고 철퇴에 가격당해도 부서지지 않는 강인한 육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이 진산월의 팔다리를 묶는 수법 또한 혈복찬(血蝠饌)이라는 것으로, 박쥐떼가 먹이를 잡는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낸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무공이었다. 일단 혈복찬에 몸의 일부분이라도 붙잡히게 되면 유마환영대법으로 이루어진 혈라마의 신체를 파훼하지 않는 한 벗어나기가 불가능했다.

진산월은 몇 차례나 공력을 가득 끌어 올려 팔다리를 움직이려 했으나,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혈라마들을 떼어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몸이 서로 얽혀 들면서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숨쉬기조차 힘들어질 정도였다.

그 모양은 영락없이 몇 겹으로 둘러싼 채 먹이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 먹고 있는 박쥐떼를 연상케 했다.

진산월이 세 명의 혈라마들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검에 목을 관통당한 혈라마가 움켜쥐고 있던 용영검을 서서히 잡아 뽑기 시작했다.

스으으……

자신의 목에 꽂혀 있는 검을 스스로 잡아 뽑는 광경은 괴기스럽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더욱 섬뜩한 것은 뽑혀 나온 검에 단 한 방울의 피도 묻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검이 뽑혀 나온 자국 또한 겉으로 보아서는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급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마침내 검을 모두 잡아 뽑은 혈라마는 용영검을 들고 천천히 진산월에게 다가갔다. 진산월은 그때까지도 세 명의 혈라마가 펼친 혈복찬의 수법에 갇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혈라마의 손에 들린 용영검이 점차로 올라가며 진산월의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평상시에는 더할 수 없이 믿음직해 보였던 우유빛 검광이 지금은 여느 때보다 차갑고 음산하게 느껴졌다.

진산월은 유마환영대법 같은 건 익히지 않았으니 날카롭기 그지없는 용영검의 검날을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그가 태을신공을 대성했다고 해도 이런 거리에서 찔러오는 용영검에 격중 되면 참혹한 꼴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막 혈라마가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잡고 있던 용영검으로 진산월의 이마를 찌르려는 순간, 진산월이 돌연 그를 향해 세찬 입김을 내뿜었다.

훅!

진산월이 뿜어낸 입김은 혈라마의 눈에 그대로 격중되었다.

쾅!

폭음이 터졌건만 비명은 없었다. 혈라마는 눈알이 부서지는 충격에 입을 딱 벌리고 양 손으로 자신의 눈 부위를 움켜잡았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시뻘건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광경이 너무도 참혹해 보였다.

혈라마가 양 손으로 눈을 잡는 바람에 그의 손에 들렸던 용영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막 용영검이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다시 한 차례 진산월이 입김을 내뿜었다.

그러자 용영검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것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진산원은 입을 오므려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세차게 앞으로 뿜어냈다.

그러자 용영검이 그의 앞으로 끌려오더니 이내 눈부신 속도로 폭사되어 갔다. 그 용영검의 검날은 진산월의 오른팔을 잡고 있던 혈라마의 반쯤 벌려진 입으로 곧장 빨려 들어갔다.

혈라마가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차가운 용영검의 검신이 그의 입을 뚫고 들어가 머릿속을 관통하고 있었다.

“허어!”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신음도 아니고 비명도 아닌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입을 지나 뒷통수를 뚫고 나간 용영검을 내려다보는 혈라마의 부릅떠진 두 눈이 탁하게 일그러지더니 이내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진산월의 오른팔을 그토록 철저하게 묶고 있던 혈라마는 용영검에 머리를 꿰뚫린 채 스르르 힘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내 오른손이 자유롭게 된 진산월이 슬쩍 손을 휘두르자 용영검이 혈라마의 머리에서 뽑혀 나와 그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용영검을 다시 쥔 진산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파앗!

한 차례 검광이 번뜩이며 용영검은 또 다른 혈라마를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쏘아져 갔다. 그 혈라마는 자신의 동료가 당한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황급히 입을 굳게 다물었으나, 용영검이 향한 곳은 그의 입이 아니었다.

부릅떠진 그의 왼쪽 눈을 파고 든 용영검은 단숨에 그의 머릿속을 휘저어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진산월의 뒤에서 목을 감고 있던 혈라마의 최후는 더욱 처참했다. 그는 진산월의 등에 바짝 매달려 있느라 앞에서 벌어진 참변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문득 진산월이 양쪽 팔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이 이상한 방향으로 선회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몸이 진산월과 함께 허공으로 올라가 반 바퀴 회전하며 밑으로 떨어져 내리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땅바닥이 보일 줄 알았건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용영검의 시퍼런 검날이었다. 용영검의 검신은 그의 입을 뚫고 몸속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끄으으…….”

끔찍한 신음과 함께 그토록 강력한 위력으로 조여오던 그의 팔과 다리가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두 눈이 파열된 채 몸부림치던 혈라마의 입안으로 한 줄기 검광이 뚫고 들어가는 것으로 진산월을 억압하던 소뢰음사 사대존자는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번에야말로 신검무적의 비참한 최후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허물어지고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버리자 혁리공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신포팔월과 소뢰음사의 사대존자는 그의 힘으로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패들이었다. 그들이 비록 서장 무림 최고의 고수들은 아니지만, 가지고 있는 장점이 너무도 탁월하여 그들이라면 능히 신검무적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포팔월의 은혼삭으로 펼치는 팔방마라진과 사대존자의 유마환영대법에 이은 혈복찬의 수법은 서장의 무림인들조차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전혀 파해법을 찾지 못했던 희대의 기공들이었다. 특히 혈복찬은 일단 걸리기만 하면 제아무리 내공이 높고 실력이 뛰어난 고수라 할지라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수법이어서, 진산월이 혈복찬에 사지를 결박당한 순간 혁리공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나 그 후에 벌어진 광경은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목을 관통한 용영검을 뽑아들고 진산월을 제거하려던 혈라마가 오히려 두 눈을 잃고 물러서자 쾌재를 부르고 있던 혁리공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그리고 진산월이 입김으로 용영검을 조정하여 오른팔을 제어하고 있던 두 번째 혈라마를 쓰러뜨렸을 때는 몸을 세차게 떨어야 했다.

단순한 입김으로 어떻게 그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혁리공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경요궁의 육천기를 통해 다시 종남파로 돌아온 비전 중의 비전, 천절뢰임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천절뢰는 종남오선 중의 한 사람이었던 취선 하정의가 창안한 취선호를 경요궁의 역대 궁주들이 발전시켜 오다가 전대 궁주였던 천절신사 조현이 완성한 절학으로, 단순히 주기(酒氣)를 불어내는 취선호와는 달리 체내의 기운을 입으로 내뿜어 상대를 격살함은 물론 물체를 조종할 수도 있는 묘용(妙用)을 지니고 있었다.

진산월의 손에 다시 검이 쥐어지고 세 번째 혈라마마저 쓰러졌을 때, 혁리공은 마침내 자신의 계책이 완벽하게 실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 악독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진산월의 등 뒤를 제압하고 있던 혈라마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쓰러지는 광경을 보면서도 한쪽으로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진산월이 네 명의 혈라마들을 모두 쓰러뜨렸을 때, 이정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혁리공! 네가 감히……!”

진산월이 돌아보니 혁리공이 숲속의 한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가 도주하는 줄로만 알았던 진산월은 그가 향하는 곳이 악자화가 묶여 있던 곳임을 깨닫고 안색이 굳어졌다. 맹렬하게 질주하는 혁리공의 두 눈에는 진득한 살광이 어른거리고 있었고, 언제 뽑아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시퍼런 검광을 뿌리는 장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악자화는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한 채 정신을 잃고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진산월이 그쪽으로 채 반도 다가가기 전에 이미 혁리공은 악자화의 옆에 도착해 있었다.

혁리공은 수중의 장검을 악자화의 가슴에 갖다 댄 채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의 두 눈에는 괴이한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신검무적! 네가 비록 내 패를 모두 꺾었지만, 오늘의 패자(敗者)는 바로 너다! 오늘을 떠올릴 때마다 영원히 고통스럽게 해주마!”

혁리공의 살기 가득한 외침이 밤하늘을 갈가리 찢어놓을 듯 했다.

혁리공의 손에 들린 장검이 여느 때보다 차가운 광망을 뿌리여 악자화의 심장을 찔러갔다. 진산월은 전력을 다해 신법을 날렸으나 아직 거리가 미치지 못해 그저 눈을 뜨고 악자화의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날아든 하나의 물체가 막 악자화의 가슴을 뚫고 들어가려던 장검을 강타했다.

땅!

귀청이 찢어질 듯한 음향이 장내를 뒤흔들며 혁리공의 몸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물체에 부딪힌 순간 손아귀가 찢기는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혁리공은 산산이 비산되어 허공으로 뿌려지는 그 물체가 돌멩이인 것을 알고 흠칫 놀랐다. 단순한 돌멩이에 실린 경력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지금도 검을 든 팔 전체가 저려오고 있었다.

힐끔 고개를 돌려 보니 멀지 않은 어둠속에서 두 개의 인영이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중 앞에 선 인영의 속도는 무시무시해서 숨 몇 번 내쉴 사이에 도착할 것 같았다. 돌멩이는 아마도 저 인영이 던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혁리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중의 검을 앞서서 달려오는 인영을 향해 세차게 집어던졌다. 그 인영이 장검을 피하는 순간, 혁리공은 오른손으로 악자화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그의 손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강기의 기운에 악자화의 머리가 박살나 버릴 것만 같았다.

막 악자화의 머리에 닿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춰지며 혁리공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혁리공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꽂혔는지 예리한 검광을 뿌리는 장검 하나가 그의 등을 뚫고 앞가슴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혁리공의 고개가 느릿느릿 돌아갔다. 오 장 밖에 서 있는 진산월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산월의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오른 발을 살짝 앞으로 내딛고 우측 어깨를 앞으로 내민 다소 특이한 자세로 서 있는 진산월을 보는 순간 혁리공의 뇌리에는 오랫동안 종남파에서 장문인에게만 전해져 내려온다는 비검술 하나가 떠올랐다.

‘홍단서천…….’

그 생각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혁리공은 그대로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용영검을 가슴에 꽂은 채 눕지도 못하고 반쯤 주저앉은 자세로 싸늘히 식어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계획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득의에 차 있던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혁리공의 시신으로 다가가서 등에 꽂혀 있는 용영검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막 숲속을 지나 자신의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차례로 도착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성락중과 동중산이었다.

진산월은 성락중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사숙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성락중은 그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제일 먼저 그의 몸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나 부상의 흔적이 없자 그제야 성락중은 약간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자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중산의 말에 자네도 만날 겸 잠시 밤공기를 쐬던 중이었네. 이상은 없는가?”

“사숙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제 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럼 되었네. 나는 이만 돌아가 보겠네.”

성락중은 그에게 더 이상의 질문도 던지지 않고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주위를 둘러보더니 휑하니 몸을 돌렸다.

진산월이 왜 갑자기 형산파와의 비무라는 중대한 일을 코앞에 두고 밤늦게 밖으로 나갔는지,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리고 여기저기에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자들은 누구인지 궁금할 법도 했으나 성락중은 어떠한 것도 묻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진산월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알아야 할 일이라면 진산월이 먼저 말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일이라면 굳이 자신이 나서서 진산월에게 번거로움을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진산월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 성락중은 마음이 놓였는지 이내 종남파의 숙소를 향해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진산월은 송구스러움과 미안함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전후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결국 자신의 불찰로 깊은 야밤에 사숙으로 하여금 산속을 헤매게 했으니 사질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꾸중은커녕 안부만 확인하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돌아가는 성락중의 뒷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믿음직하고 거대해 보였다.

진산월은 문득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백석기와 선약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어느 새 몸을 숨긴 것이 분명했다.

진산월은 동중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 때문에 사숙까지 모시고 온 것이냐?”

동중산은 진산월이 돌아오지 않자 혼자 애를 태우다 낙일방에게 들켜서 결국 성락중에게까지 불려간 저간의 사정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진산월은 고개를 숙인 그의 뒷머리를 잠시 내려 보았다. 여기저기에 백발이 듬성듬성 나 있는 그의 머리를 보고 있자니 동중산도 어느 덧 적지 않게 나이를 먹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종남파를 위해서 누구 못지않게 헌신해 온 그동안의 역정이 그 무성한 백발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되었다. 그보다 용케도 이곳으로 찾아왔구나.”

동중산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장문인께서 이 공자와 함께 나가셨기에, 이 공자의 행적을 찾아 이 일대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숙조께서 싸움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달려오게 된 것입니다.”

진산월과 소뢰음사의 사대존자들과의 싸움은 육박전에 가까워서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반면에 신포팔월의 은혼삭은 휘두를 때마다 제법 예리한 파공음이 발생하기에 조용한 밤이라면 제법 멀리에서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비명소리는 상당히 처절하여 더욱 멀리 퍼져나갔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아무리 밤이 깊었다고 해도 성락중과 동중산 외에 아무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건 다소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새 다가온 이정문도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절벽 아래의 남암궁은 몰라도 이 위쪽의 비승각에서는 충분히 소리가 들렸을 법 한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게 이상하구려.”

“비승각에는 누가 머무르고 있소?”

“점창파요. 장문인인 장거릉 대협은 오랫동안 문파를 비워둘 수 없다며 오후에 집회가 끝난 후 바로 무당산을 떠나셨지만, 추혼신풍검 도군홍 대협과 독검취응 백리장손 대협은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계속 머물러 계실 텐데…….”

진산월은 굳이 더 이상 그 점을 캐묻지 않았다. 대신 밧줄에 묶여 있는 악자화의 몸을 풀고 그의 상세(傷勢)를 살피기 시작했다.

악자화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몸의 구석구석을 세세히 살펴보았으나 특별히 부상을 입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이정문이 조심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약물이나 특이한 점혈법에 당한 것 같구려.”

진산월은 약간은 창백해 보이는 악자화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내기(內氣)의 흐름이 안정되어 있으니 점혈법은 아니오.”

점혈법에 당하면 혈도를 타고 흐르는 기의 흐름이 끊기거나 막히기 때문에 맥문을 짚어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파악할 수가 있었다. 진산월은 조금 전에 이미 악자화의 맥문을 조사했기에 점혈에 의해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그럼 약물이겠구려. 아무래도 철면군자 노 신의께 도움을 부탁드려야겠소.”

“노 신의가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소?”

이정문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나와 같은 숙소에 머물러 계시오.”

“그곳이 어디요?”

“그곳은…….”

대답을 하려던 이정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마침 그때 능자하와 함께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육난음을 발견한 것이다.

육난음을 본 이정문은 얼굴표정을 딱딱하게 굳인 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오히려 육난음이 먼저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서 있는 거예요? 나를 다시 만난 게 반갑지도 않아요?”

이정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옆으로 저었다.

“반갑다는 뜻이에요, 아니란 뜻이에요?”

“…….”

“아무튼 이번엔 나도 정말 아찔했어요. 당신도 가슴이 콩알만 해졌죠? 그러니 앞으로는 머리 좋은 것만 믿고 너무 남을 무시하지 말아요.”

이정문은 자신의 팔에 가득 느껴지는 그녀의 피부 감촉을 한동안 가만히 음미하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혁리공에게 사로잡히게 된 거야? 유 대협은 또 어떻게 되었고? 혁리공이 음양패를 어떻게 알고 그것으로 나를 협박한 거야?”

일단 입을 열자 쉴 새 없이 많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육난음은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았다.

“한 가지씩 물어요. 내가 아는 대로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차례 진저리를 쳤다.

“우선은 이곳을 빨리 떠나요.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이런 곳에는 잠시도 머물러 있고 싶지 않으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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