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8화
제 320 장 검로인로(劍路人路)
한참 후에야 낙일방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문득 눈을 뜬 낙일방은 무거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중산을 보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결과는……?”
“낙 사숙…….”
“결과는 어떻게……?”
“사숙께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동중산은 그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낙일방은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내가…… 패했구나.’
믿기지 않는 심정이었다.
그토록 전력을 다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보이고, 비장의 절기로 생각하고 있던 태인장마저 사용했음에도 그는 결국 용선생에게 패하고 만 것이다. 단순한 비무가 아니라 종남파의 대업(大業)을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패했다는 것이 낙일방으로서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대체 자신의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해조림 사조에게서 소선의 칠종 절학을 얻은 후, 낙일방은 정말 자신의 모든 열과 성을 다해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무공수련에 매진해 왔다. 초가보와의 살 떨리는 싸움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후 그의 무공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최근에 오랫동안 절전되었던 태인장의 비결을 복원하고 구반장법의 화후가 칠성을 넘어선 후로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경지에 접어든 상태였다.
게다가 서장 무림 고수들과의 싸움을 비롯한 계속적인 혈전으로 대전 경험도 풍부해져서 그야말로 심신(心身)이 모두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이번 비무에서 낙일방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싸움에 임했고, 진기가 바닥나는 상황에 몰리면서도 최선의 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으니, 그것은 그만큼 용선생이 지금의 낙일방으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壁)과도 같은 존재라는 의미였다.
낙일방이 패함으로서 종남파는 이번 비무에서 상당한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앞으로 출전할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낙일방이 일승을 거두어야 했다. 그래야 최소한 진산월에게까지 비무가 이어질 수 있었다.
일단 진산월한테 비무가 이어지기만 한다면 종남파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믿음 정도가 아니라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과 같은 당연한 진리에 가까웠다. 그만큼 진산월에 대한 종남파 고수들의 신심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낙일방이 첫 번째 비무에서 패하는 바람에 진산월에게로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게 되었다. 만약 이번 형산파와의 비무에서 패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패배로 인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낙일방은 도저히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던 낙일방의 텅 빈 동공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낙일방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사람은 가만히 낙일방의 어깨를 잡았다.
“더 누워 있어라.”
잠깐 몸을 움직인 것만으로도 지혈했던 어깨와 옆구리의 구멍에서 다시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재차 지혈한 후에야 비로소 피가 멎었다.
낙일방은 그저 묵묵히 입을 굳게 다문 채 그 사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자 먼저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장문사형…….”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듯한 알아듣기 힘든 음성이 흘러나왔다.
진산월은 낙일방의 부상당하지 않은 어깨 부위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너는 잘 싸웠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하지만…….”
“천하에 용선생의 입에서 피를 토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너는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무림인들에게 똑똑하게 보여준 것이다.”
“…….”
“너는 오늘 본 파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러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믿고 지켜보도록 해라.”
낙일방은 눈을 감았다.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언뜻 엷은 물기가 내비치는 것도 같았다.
진산월은 낙일방의 심정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옆에 자리를 지켰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은 낙일방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제가 삼전을 완벽하게 익혔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요?”
“…….”
“태인장을 좀 더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결과는…….”
진산월은 한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낙일방이 참지 못하고 다시 눈을 떠서 그를 바라보았을 때야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건 나도 모르겠다. 너의 구반장법이 완벽했다면 과연 용선생을 이길 수 있었을까? 태인장 만으로 용선생의 그 가공할 월광지를 감당해 낼 수 있었을까? 직접 겪어보지 않은 다음에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
이번에는 낙일방이 입을 굳게 다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너는 아직도 발전할 여지가 충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네가 구반장법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태인장을 능수능란하게 펼칠 수만 있다면 너의 무공은 지금과는 또 다른 경지에 올라서게 될 것이다. 천단신공을 대성한다면 다소 부족했던 내공도 그만큼 상승할 수 있겠지. 그에 비해 용선생은 이미 본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는 상태이다. 더 이상의 발전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지.”
“……!”
“아직 여러 가지가 미흡했음에도 용선생과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였던 네가 완벽히 개화(開花)한 상태에서 다시 용선생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 네가 한 번 생각해 보려무나.”
낙일방은 마음이 복잡한 듯 눈빛이 몇 차례나 변했다. 진산월은 낙일방이 점차로 안정된 눈빛을 되찾은 것을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들어 형산파 진영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산파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반백(半白)의 머리를 하고 허리춤에 한 자루 검을 찬 노인이었다.
적어도 육순은 되어 보이는 노검객의 얼굴은 대추처럼 붉었고, 눈빛은 멀리서 보아도 한기를 느낄 정도로 차갑고 냉혹했다.
그 노검객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형산파에서 정말 단단히 작심한 모양이군. 오결검객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비응검 사공표가 두 번째로 나설 줄이야.”
사공표는 육십 대 중반의 나이로, 이십여 년 전 기산취악에서도 출전했던 정말 유명한 검객이었다. 무공 실력은 오결검객의 최고봉인 조화신검 사견심보다는 약간 뒤쳐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성정이 냉혹하고 손속이 매서워서 사람들이 오결검객 중에서도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형산파에서 누가 나올까 하고 신경을 기울이던 귀호가 사공표를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교리가 그것을 보았는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런 웃음을 짓고 있나?”
“저 노인네가 왜 나왔는지 알 것 같아서 말일세.”
“왜 나왔는데?”
“사공표는 성정이 잔인하고 모진 면이 있어서 한 번 눈에 찍은 사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네. 예전에 그는 소림사에서 종남삼검의 일인인 질풍검 전풍개와 싸운 적이 있는데, 그때 비록 전풍개에게 승리를 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고전을 했었지.”
“기산취악 때의 이야기로군.”
“그렇지. 그때 형산파의 다른 오결들은 비교적 쉽게 승리를 거둔 반면에 사공표는 백 초가 넘는 오랜 격전 끝에 간신히 승리했네. 그래서 사공표는 자신의 체면이 구겨졌다고 생각하고 늘 설욕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네.”
교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아니 기산취악으로 종남파를 매장시킨 장본인이 오히려 설욕할 기회를 노리다니? 뭐 그런 심보를 가진 자가 다 있나?”
“그게 바로 사공표라는 인물일세. 아무튼 사공표는 다시 전풍개를 만나면 반드시 오십 초 내에 머리를 잘라버리겠다고 몇 차례 공언했는데, 아무래도 전풍개 대신 종남파의 다른 고수를 대상으로 선택한 모양일세.”
“그러니까 자네 말은 예전에 전풍개를 통쾌하게 이기지 못한 것이 분해서 그 원한을 풀 겸 출전했단 말이지?”
“그렇다네. 그렇지 않고서야 형산파에 오결이 열다섯 명이나 되는데 가장 나이가 많은 그를 내보낼 리가 있겠나? 아마도 사공표 본인이 먼저 나가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을 게 틀림없네.”
교리는 혀를 차며 사공표의 냉엄한 얼굴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표정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독랄함과 아집 같은 게 생생하게 느껴지는군. 저런 자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지. 좀처럼 포기 하지 않고 달려드니 말일세. 종남파에서 누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애를 좀 먹겠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종남파에서 한 사람이 훌쩍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자 귀호는 참지 못하고 나직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이거 정말 재미있게 되었군.”
“뭐가 그리 재미있나?”
“종남파에서 사공표에 맞서 출전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무영검군 성락중일세.”
“그런데?”
“성락중은 바로 질풍검 전풍개의 제자란 말일세. 그러니 사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와신상담을 해온 제자와 그 사부에게 이를 갈고 있는 노강호가 정면으로 맞부딪히게 되었으니 어찌 재미있지 않겠나?”
형산파 진영에서 앞으로 나오는 사공표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성락중과 전흠은 거의 동시에 몸을 움찔거렸다.
형산파와의 비무가 정해졌을 때부터 두 사람은 한편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한편은 두려운 마음으로 사공표가 꼭 출전하기를 간절히 염원해 왔다. 그리고 전풍개의 이십 년을 고통과 회한에 찬 세월로 만들었던 사공표에게 설욕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은 마침내 보답을 받았다.
하나 출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뿐이었다.
성락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흠이 몇 차례 안타까운 시선을 그에게 보냈으나, 성락중은 다만 진산월을 향해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다녀오겠네.”
진산월이 머리를 조아리자 성락중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상대가 사공표가 아니었어도 이때쯤에는 성락중이 나서야 할 차례였다. 낙일방이 일차전에서 패배한 상황에서 두 번째 비무마저 내어주게 된다면 종남파로서는 너무도 급박한 처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이기에 종남파가 내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인 성락중이 나서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성락중으로서는 그 상대가 사공표라는 것에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공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성락중의 심정은 그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것이었다.
이십여 년 전의 그날, 성락중도 사부와 함께 소림사에 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성락중은 단 한시도 그때의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하늘처럼 여겨졌던 사부와 사숙들이 형산파의 오결검객에게 하나둘씩 무릎을 꿇는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순간은 지옥과도 같았고, 오결검객들이 보여준 검법의 길은 너무도 높고 찬연해 보였다. 까마득한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한 그들의 검법을 꺾기 위해 고심참담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 많은 세월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그의 손과 몸에 새겨져 있었다.
이제 그 험하고 모진 시간을 지나 비로소 당시의 주인공이었던 비응검 사공표를 앞에 두게 되었으니, 머릿속에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그토록 높고 험하며 무섭고 사나워 보였던 사공표가 이제는 주름지고 고집 센 노인으로 보였다. 여전히 강퍅하고 매서운 인상이었으나, 그때처럼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로 두려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사공표의 얼굴에 그날 이후 늘 고통과 자책 속에서 불면(不眠)의 밤을 보내고 있던 전풍개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성락중은 선연히 떠오르는 전풍개의 얼굴을 보며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던 심중(心中)의 말을 소리 없이 내뱉었다.
‘사부. 이제는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부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사공표는 예의 독수리가 먹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성락중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날카로웠던지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사람들조차 가슴 한 구석이 섬뜩해질 정도였다.
사공표의 나이는 올해로 예순여섯. 열다섯의 나이에 청운의 뜻을 품고 형산파에 입문한 것이 벌써 오십일 년 전의 일이었다.
소림사에서 종남삼검의 일인인 질풍검 전풍개를 꺾고 강호 전역에 엄청난 명성을 떨친 것이 벌써 이십사 년 전. 그때 그는 마흔둘이라는 절정의 나이에 자신의 검법에 대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당시 강호상에서의 명성은 전풍개가 훨씬 더 높았지만, 그것은 사공표가 좀처럼 호남성을 벗어나지 않고 형산파의 영역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형산파 내에서의 평판은 조화신검 사견심이나 칠지신검 좌군풍에 조금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오결검객 중 누구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결국 종남파와의 대결에는 그들 세 사람이 나갔고, 모두 승리를 거두어 종남파를 끌어내리고 형산파를 구대문파의 지위에 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었다.
전풍개와의 싸움은 사공표로서도 좀처럼 겪어보지 못한 치열한 접전이었다. 저물어가는 종남파의 검법 정도는 쉽게 꺾을 줄 알았는데, 전풍개의 성라검법은 예상보다도 훨씬 더 무섭고 날카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전풍개라는 인간의 투지력과 근성이 대단해서 불리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고 사력을 다해 맞서는 바람에 비무치고는 상당히 유혈이 낭자한 격전이 되었다.
그에 비해 사견심과 좌군풍은 훨씬 더 수월하게 상대를 격파했다. 가뜩이나 그들 두 사람에게 은근히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사공표로서는 이기고도 기쁜 마음보다는 분하고 억울한 감정이 더욱 강했다.
소림사를 떠날 때 자신을 노려보던 전풍개의 매서운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그를 좀 더 철저히 짓밟지 못한 것 때문에 분기가 치밀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설욕의 칼날을 갈고 있을 그가 꺼림칙한 마음도 있었다.
나중에 전풍개가 복수를 위해 종남파를 뛰쳐나와 천하를 떠돌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언제고 반드시 그가 자신의 앞에 다시 나타나리라는 생각에 더욱 검을 가다듬는데 전력을 기울여왔다.
이번에 무당산에서 이십여 년 만에 다시 종남파와의 비무가 결정되었을 때, 사공표는 제일 먼저 나서서 자신이 출전할 것임을 천명했다. 비록 전풍개는 나오지 않았지만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는 종남파를 철저히 짓밟아버림으로서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을 깨끗이 떨쳐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오결검객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인 그의 발언을 무시할 사람은 적어도 형산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공표는 종남파에서 누가 나오든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남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신검무적이 나선다 해도 한 번 상대해 볼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해 서슴없이 걸어오는 성락중을 보았을 때도 두려움이나 거리낌보다는 어서 빨리 쓰러뜨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자연히 그의 몸에서는 서릿발 같은 살기를 담은 예리한 기운이 무럭무럭 흘러나왔다.
성락중은 자신을 향해 진득한 살기를 내뿜는 사공표를 바라보다 먼저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종남파의 이십대 제자 성락중입니다.”
“이십대라. 십구대에 내가 알고 있던 자가 하나 있었지.”
사공표의 눈이 가늘어지며 실낱같은 광망이 흘러나왔다.
“전풍개라는 자인데, 어떤 관계인가?”
성락중은 조금도 화를 내거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의 스승님이십니다.”
“그렇군. 전풍개의 제자였군.”
사공표는 돌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 전풍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했는데, 제자를 대신 보냈군. 내가 두려워 꽁무니를 뺄 자는 아니니, 그만큼 자신 있다는 말이겠지? 정말 기대가 되는군. 기대가 돼……!”
성락중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는 사공표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점차 사공표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거두어지며 차갑고 냉랭한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형산파의 십이대 제자 사공표다. 종남파와의 숙원(宿怨)을 이번에 깨끗이 정리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 종남파와의 싸움으로 인해 남들에게 비교당하거나 수십 년간 자신을 향해 칼을 가는 걸 뻔히 알면서도 두 손 놓고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공표의 음성 속에는 미처 내뱉지 못한 이러한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창!
검이 뽑혀 나오는 음향이 더할 수 없이 청량했다.
뛰어난 검객은 검을 뽑는 동작만 보아도 상대의 실력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사공표의 발검은 거의 완벽했다. 빠르고 날카로우면서도 절제되어 있어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성락중의 발검은 기이할 정도로 느렸다. 천천히 검을 뽑아들고 중단의 자세를 취해 가는 그 모습은 대적(大敵)을 앞둔 결전이 아니라 친한 사이에 벌이는 비무를 준비하는 자세 같았다.
두 사람은 단지 검을 뽑아들고 마주보고 서 있기만 했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살벌한 격전장처럼 변해 버렸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검기들이 그들 주위를 뒤덮은 채 맹렬하게 서로를 베어가는 것 같았다.
주변의 공기가 요동을 치고 바닥에 깔려있던 부서진 돌조각과 먼지들이 저절로 허공에 떠올라 이리저리 휩쓸려 가는 광경은 보는 이를 전율케 할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교리가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정말 멋지군. 모처럼 제대로 된 검투(劍鬪)를 볼 수 있겠는데.”
“저렇게 서로의 검기가 충돌하여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검풍면적(劍風面跡)의 장면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귀호가 감탄성을 토해내자 교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납고 거칠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흥겨워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확실히 제대로 된 검객들이라 다르긴 하군. 용선생과 그 젊은 친구의 대결도 괜찮긴 했는데, 역시 강호에서의 싸움이란 검과 검이 마주치는 것이 진짜지.”
“자네, 너무 흥을 내는 것 같군.”
“저런 수준의 검객들이 벌이는 진검승부는 나도 좀처럼 보지 못해서 말이지. 자네는 설레지 않나?”
“설레긴 하지. 그나저나 사공표의 기운은 몇 년 전보다 훨씬 더 강렬해진 것 같군. 날카로움이 너무 강해서 보기만 해도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것 같으니 말일세.”
귀호의 말마따나 사공표의 검에서는 시퍼런 빛의 검기가 멀리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진하게 흘러나와 성락중의 전신을 위협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시퍼런 검기가 성락중의 몸 가까이 접근하다 일그러지거나 방향이 틀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성락중의 검에서도 무형의 검기가 강력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검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 주위를 일렁거리던 검기의 소용돌이가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본격적인 검투가 시작되었다.
파파파파팍!
장내는 삽시간에 눈부신 검광에 휩싸였다. 두 사람의 모습 또한 그 검광에 완전히 가려져 버렸다. 수십 수백의 검광들이 종횡으로 난무하는 가운데 희끗한 두 개의 인영이 검광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만이 어렴풋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들의 싸움이 어찌나 치열하던지 수많은 군웅들이 둘러싸고 있는 우적지 전체가 거친 칼바람과 싸늘한 검광에 뒤덮여 버린 것만 같았다.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지 연신 자신의 팔을 문지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교리는 한동안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장내의 치열한 격전을 보고 있다가 문득 물었다.
“사공표가 사용하는 검법이 무엇인가?”
귀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형산파의 구종 검법 중 하나인 칠살검법일 걸세. 사공표는 형산파에서도 칠살검법의 최고수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니 말일세.”
교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흉폭하고 거친 게 형산파의 정통 검법이라고?”
“칠살검법 자체가 원래 살기가 짙은데다 사공표의 손을 거치니 내가 보기에도 명문정파의 검법답지 않게 살벌하긴 하군. 그래도 저 시퍼런 검기와 빠르고 급박한 검초의 변화를 보니 확실히 칠살검법이 맞는 것 같네.”
교리는 다시 물었다.
“성락중이란 자의 검법은?”
“잘 짐작이 가지 않는군. 전풍개를 사사했으니 전풍개의 성명절기인 성라검법을 익힌 건 분명할 텐데, 생각만큼 빠르거나 날카로워 보이지 않으니 지금은 성라검법이 아닌 다른 검법을 펼치고 있는 것 같네.”
귀호는 안력을 돋우어 한동안 장내의 격전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당히 부드럽고 유연한 동작임에도 사공표의 칠살검법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걸 보니 겉으로 보기보다는 빠르고 역동적인 힘이 담겨 있는 것 같군. 언뜻 해남검파의 무공 냄새도 나는 것 같긴 한데, 정확한 것은 나도 모르겠네.”
“흠.”
교리의 얼굴에 한 줄기 흥미로운 빛이 떠올랐다. 귀호는 시선을 격전장에 주고 있으면서도 계속 교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즉시 그를 향해 물었다.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자네는 느끼지 못했나?”
“무얼 말인가?”
교리는 턱으로 격전장을 가리켰다.
“저 두 사람의 검은 아직 단 한 차례도 서로 부딪힌 적이 없다는 걸 말일세.”
귀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러고 보니…….’
귀호는 교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단 한 번도 검과 검이 마주치는 음향을 듣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워낙 검광이 매섭게 번뜩이고 검풍이 사납게 휘몰아쳐서 미처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검이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는 소리만으로도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로 살벌한 검투에서 서로의 검이 격돌하는 일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은 실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귀호는 강호무림의 전반적인 지식에 해박하고 무공에 대한 경륜도 풍부했지만, 아직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어서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확실히 그렇군. 어떻게 저렇게 맹렬하게 싸우면서도 검 한 번 부딪히지 않을 수가 있지?”
귀호의 물음에 교리는 유난히 번쩍이는 눈으로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두 사람을 주시하며 나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내가 알기로 저런 경우는 두 가지 뿐일세.”
“그게 무엇인가?”
“첫째는 두 사람의 무공이 완전히 상극(相剋)인 경우이지. 검초의 변화가 서로 너무 달라서 검과 검이 움직이는 영역이 겹치지 않기에 검끼리 부딪힐 일이 별로 없지.”
“그래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게 아닌가?”
“그렇긴 하지. 그래도 예전에 백 초 가까이 되도록 서로의 검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싸움을 본 적이 있었네.”
“두 번 째는?”
“둘 중 한 사람이 상대의 검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충돌을 피하는 경우일세.”
귀호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지 약간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저 정도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일부러 충돌을 피한다는 건 스스로 약세를 짊어지고 싸우는 격이 아닌가?”
“그렇지.”
“왜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상대의 검이 천하의 보기 드문 보검이어서 검이 충돌하는 순간 내 검이 훼손되거나 부러질 것을 염려할 수도 있고, 상대보다 내공이 현격하게 뒤져서 약세를 보일 것을 우려했을 수도 있지.”
“…….”
“그리고 상대의 검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그 허점을 철저히 파고들려고 노리는 것 일수도 있겠지.”
사공표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칠살검법의 세 번째 초식인 무상두색(無常斗索)을 펼쳤을 때였다.
칠살검법은 빠르고 날카로운 만큼 초식과 초식의 이어짐이 무척이나 정교했다. 그래서 칠살검법을 처음 겪어보는 사람들 중에는 상대의 초식이 언제 바뀌었는지를 미처 알지 못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공표는 그런 칠살검법을 대성한 인물이었으니, 초식의 연계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 그런데 두 번째 초식인 낙락한소(落落漢瀟)에 이어 무상두색을 펼쳤을 때 초식의 이어짐이 평소와 달리 그다지 매끄럽지 않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매서운 기세로 상대방의 전신을 강력하게 휘몰아치는 낙락한소의 초식과 상반신 급소요혈을 예리하게 노리는 무상두색은 서로 잘 어우러져서 사공표가 즐겨 사용하는 연환식 중 하나였다. 그런데 당연히 성락중의 요혈 일곱 군데를 순차적으로 찔러가야 할 무상두색에 노출된 요혈은 다섯 군데에 불과했다.
사공표는 칠살검법에 통달한 인물답게 즉시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원래는 상대의 왼쪽 어깨의 한 뼘 위에서 오른쪽 아랫배 부위로 비스듬히 움직이며 차례로 상반신의 요혈들을 노려야 할 무상두색의 초식이 두 치 쯤 낮게 움직이며 요혈 두 개를 놓쳐버린 것이다.
왜 원래의 위치보다 두 치나 낮은 위치에서 초식의 변화가 시작되었을까?
사공표의 칠살검법에 대한 조예로 보아 단순한 실수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낙락한소의 마무리 변화가 원래 예정된 곳보다 두 치 낮은 곳에서 종결되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자연스레 다음 초식으로 이어지는 사공표의 검이 원래의 위치를 놓쳐버린 것이 확실했다.
사공표는 낙락한소의 시작이 완벽했음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완벽했던 낙락한소가 왜 마지막 순간에 두 치나 낮아진 것일까?
사공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초식의 변화가 금제 당하고 있었구나.’
사공표의 눈이 가늘어지며 예리한 신광이 흘러나왔다.
사공표의 손에 들린 검은 지금 네 번째 초식인 병단천남(屛斷天南)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병단천남은 칠살검법 중에서도 특히 위력이 뛰어난 절초로, 상체의 요혈을 노렸던 검이 수평으로 움직이며 상대의 가슴을 갈라버리는 무시무시한 수법이었다. 점(點)으로 찔러갔던 검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선(線)으로 변하며 보다 폭넓은 부위를 노리기 때문에 상대는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가슴을 베이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며 상대의 가슴을 갈라놓아야 할 병단천남이 약간 밑으로 향하며 복부 주위를 스쳐 지나가 버렸다. 사공표는 병단천남을 전개하면서 주의를 잔뜩 기울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의 검초가 왜 방향이 틀어졌는지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의 검에 바짝 붙어 움직이던 성락중의 검이 막 변화를 일으키던 시점에서 위에서 아래로 아주 미묘하게 흔들거렸다. 그 흔들림은 주의를 집중시키지 않았다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아주 미세한 것이었으나, 그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기운에 자신의 검봉이 살짝 눌리며 검초의 방향이 뒤틀어지는 것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사공표는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인물답게 단번에 성락중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그 괴이한 기운의 정체를 파악했다.
‘검경(劍勁)? 아니, 단순한 검경은 아니다. 그렇구나. 검경불혈진맥(劍勁拂穴震脈)이로구나……!’
검경불혈진맥은 검경의 최고 경지로, 검에서 흘러나오는 진기만으로 사람의 맥을 뒤흔들어 격상시킬 수 있는 상승의 수법이었다. 절정에 이르도록 연마하면 단순히 사람을 살상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지금처럼 검에서 내뿜는 기운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초식이 변하는 그 촌음(寸陰)의 순간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움직이는 검 끝에 그처럼 미세하고 정교한 기운을 흘려보내 상대의 검초를 임의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 자신의 검초가 자신도 모르는 새 성락중의 검에 의해 조금씩 변질되어 왔음을 깨닫게 된 사공표는 커다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검법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공표로서는 직접 당하고도 쉽게 믿기 힘든 너무도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뒤로 성락중이 펼치는 모든 검초가 위협적이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연히 처음의 맹렬하고 사나웠던 기세가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사공표의 기세가 떨어지자 교리가 즉시 그 사실을 간파하고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 의심암귀(疑心暗鬼)라더니……. 사공표가 자신의 검에 불신(不信)을 가지기 시작했군.”
귀호는 움찔 놀라 급히 물었다.
“아니 내가 보기에는 사공표의 검초가 조금 더 강력해 보이는데?”
“그건 칠살검법인가 하는 것의 특징 때문이고, 기세가 달라졌으니 잘 살펴보게. 자네 정도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일세.”
귀호는 교리의 말을 듣고 유심히 사공표를 주시하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검법 자체는 여전히 날카롭고 매서운데,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얌전해진 것 같군. 사나운 예봉이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그게 바로 기세가 꺾였기 때문일세.”
“기세가 꺾이다니? 왜 갑자기 사공표의 기세가 꺾인단 말인가?”
귀호는 사공표의 성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기에 싸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의 기세가 벌써 꺾였다는 교리의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조금 전에 둘 중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검끼리 마주치는 걸 피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지?”
“그게 사공표란 말인가?”
“아니. 성락중이란 자일세. 그리고 아무래도 그의 의도는 단순히 사공표의 예봉을 꺾는 것만이 아니었던 것 같네.”
“그게 무슨 말인가?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성락중은 아주 교묘한 수법으로 사공표의 검초에 혼선을 주었네. 검경의 일종인 불혈진맥을 저런 식으로 사용하는 자는 정말 드문데, 저런 건 당하기 전에는 알기도 힘들뿐더러 알아도 막기 힘든 아주 고난도의 수법이지. 그래서 사공표는 자신의 검초를 뜻대로 펼칠 수 없게 되었네.”
“그래서?”
“사공표 같은 수준의 검객이 자신이 펼친 검초가 뜻대로 전개되지 않으면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이지. 하나는 굳이 검초의 변화를 원래대로 고집하지 않고 자연스레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의 검초를 고집하다가 스스로의 검에 제약을 걸게 된다는 거로군.”
“그렇다네. 처음의 반응이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고, 오히려 그걸 기회로 자신의 검초를 발전시키는 전화위복의 경우도 생길 수가 있지. 하지만 두 번 째의 반응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지네. 검객이 자기가 펼치는 검에 자신감을 잃게 되는 순간 기세가 꺾이고, 기세가 꺾이는 순간 자신의 검 또한 잃게 되는 것일세.”
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공표는 평생을 검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인데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할까?”
“검과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네. 중요한 건 그자의 성정일세.”
“성정?”
“침착하고 냉정을 잃지 않는 자라면 대부분 처음의 반응대로 달라진 검초의 변화에 적응하려 할 걸세. 하지만 열화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거나 거칠고 난폭한 사람이라면 조금 달라지지. 그런 자들일수록 자신의 검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 믿음이 흔들리거나 깨어졌을 때 곧잘 나락으로 빠지는 수가 있지. 저런 식으로 말일세.”
교리는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 귀호의 눈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무서운 기세로 설락중을 공격했던 사공표가 지금은 반대로 완연한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토록 완벽해 보였던 그의 검초 곳곳에 파탄이 드러나서 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공표가 끝까지 칠살검법의 초식들을 원래의 방식대로 펼치는 것을 보고 귀호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내고 말았다.
“저런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반대로 교리는 무언가를 느낀 듯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군. 이제 사공표라는 자가 어떤 인간인지 알 것 같군.”
귀호는 퉁명스레 그의 말을 받았다.
“내가 말했지 않나? 잔인하고 오만하며 사소한 일에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아집과 독선에 가득 찬 인간이라고.”
“단순히 그런 성격만 가지고 있었으면 절대로 저런 수준의 검법을 익힐 수는 없지.”
“그렇다면?”
“검법을 보면 그 사람의 인간성을 알 수 있네.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관이나 경험, 사고방식이 검에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지. 그래서 ‘검의 길이 곧 사람의 길[劍路人路]’이라고 하는 걸세.”
“검로인로라…….”
“사공표의 검은 거칠고 날카로우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져 있네. 이건 아주 오랜 고련의 결과로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일세. 사공표의 성정이 비록 잔인하고 오만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의 일단일 뿐일세. 사공표라는 인간은 무척이나 끈질기고 집요한 성격일걸세. 그의 검초가 계속적인 파탄을 드러내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게 그걸 증명하고 있네.”
노구를 온통 땀으로 흠뻑 적시면서도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사공표를 응시하는 교리의 두 눈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저런 인간은 결코 쉽게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네. 그리고 그런 인간은 왕왕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내고는 하지. 지금처럼 말일세.”
귀호의 눈이 다시 크게 뜨였다. 교리의 말대로 장내의 판도는 어느 새 조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초식의 변화에 파탄을 드러내면서 초식의 연계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공표의 검이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짙은 검기를 쏟아내면서 장내를 조금씩 장악해 가고 있었다. 변화의 구멍을 강력한 검기로 메꾸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검을 휘두르는 속도도 한층 더 빨라져 있었다. 그 바람에 초식과 초식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생기는 허점들이 빠르게 메워지며 그 빈 자리를 강맹하기 그지없는 검기가 대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시퍼런 검기로 거대한 벽을 쌓는 듯한 광경이었다.
종내에는 사공표의 전신이 온통 검기로 휩싸여 버리자 귀호는 자신도 모르게 놀란 탄성을 토해냈다.
“검기성벽(劍氣成壁)!”
‘초식의 파탄을 메우기 위해 검기에 치중하다 보니 오히려 경지가 한 단계 더 상승한 걸세. 고집이 빚어낸 기적이라고나 할까.“
교리는 간단한 듯 말했지만, 검기성벽은 결코 단순한 경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검강으로 가는 길목인 동시에, 검기로 펼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검학(劍學)중 하나였다.
그것은 단순히 운이 좋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오랜 동안의 고련, 끈질긴 집념, 그리고 순간적인 영감과 필사의 각오 등이 모두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경지였다.
사공표는 패색이 짙은 가운데 이대로 허무하게 전풍개의 제자에게 질 수 없다는 독심(毒心)에 가까운 오기와 자신의 무공에 대한 가혹하리만치 끈질긴 집착 끝에 검기성벽을 만들어 냈지만, 그것은 그만큼 그가 평소에도 꾸준히 검을 익히는데 매진해 왔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공표의 전신이 검기로 만들어진 벽에 둘러싸이자 성락중의 검은 더 이상 그의 곁에 도달하지 못했다. 자연히 검경으로 그의 검초에 영향을 주는 수법도 통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공표의 검은 다시금 칠살검법 본연의 날카로움을 나타내기 시작하며 성락중이 완연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것을 본 교리의 얼굴에 예의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성락중이 어떤 인간인지 볼 수 있겠군. 인간의 본성이란 아무래도 위기에 처했을 때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법이니 말이야.”.
사공표의 검기가 강력해지며 검경불혈진맥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어도 성락중은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검경불혈진맥으로 사공표의 초식 변화를 억제하는 것은 비록 절묘한 수이기는 했어도 그 정도로 사공표를 꺾을 수 있다고는 당초부터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공표는 이십 년 전에 이미 성락중이 거대한 벽처럼 느꼈던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던 검객이었다. 지난 세월동안 성락중은 그 벽을 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지만, 사공표 또한 허송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성락중은 그 벽을 훌쩍 넘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사공표의 벽 또한 그동안 한층 더 높고 견고해져 있었다.
그래서 성락중은 사공표의 검초를 조금씩 무력화시키며 그에게 바짝 접근해 가면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검초를 전개하는데 혼선을 겪으며 수세에 몰렸던 사공표의 검기가 갑자기 무섭도록 강력해지며 그의 전신이 시퍼런 검기에 휩싸이는 순간, 성락중은 재빨리 대응방법을 바꾸었다.
그동안 그는 검경불혈진맥의 유결(柔訣)과 흡결(吸訣)을 번갈아 사용하여 사공표를 혼란스럽게 해왔는데, 그것을 강결(强訣)과 탄결(彈訣)로 바꾼 것이다. 그의 검에서 미약하게 흐르던 검경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며 사방에서 휘몰아쳐 오는 검기의 폭풍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팡!
검과 검의 격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폭음이 터져 나오며 세찬 경기가 거세게 일어났다. 그 반탄력을 이용하여 성락중은 사공표와의 간격을 일 장 이상으로 벌렸다. 사공표의 검기가 너무 강력해서 그대로 계속 접근했으면 필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검기와 격돌하는 순간 성락중은 가슴에 적지 않은 충격을 느껴야 했다. 속에서 울컥 핏물이 솟구쳐 올랐으나 억지로 눌러 삼킨 성락중은 물러서던 몸을 옆으로 회전시키며 사공표의 좌측 후방으로 돌아갔다.
사공표의 칠살검법은 빠르고 강맹한 위력을 살리기 위해 주력으로 사용하는 손의 순(順)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사공표는 오른손잡이이니 자연스레 좌측 후방이 비게 되었다. 사공표는 그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름대로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왔으나, 여전히 그쪽 방향의 수비나 공격은 다른 곳에 비해 허술한 편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릿발 같은 검기가 주위를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질주하는 광경이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다른 곳에 비해 다소 허술한 부위임에도 뚫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저 가공할 검기의 소용돌이를 돌파해야만 사공표의 몸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때 비로소 승부를 걸어볼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사공표의 검기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사납고 위협적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왜 갑자기 이토록 강해졌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공표는 두 눈을 반개한 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조금 전과는 달리 그리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고 당황하거나 분기에 찬 표정도 아니었다.
달관(達觀)한 듯한 그 모습에 성락중은 가슴 한 구석이 납덩이를 달아맨 듯 무거워졌다. 추월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 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다시 또 저만큼 앞으로 훌쩍 달아나버린 것만 같았다. 영원히 그 간격을 좁힐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순간적으로 절망스런 생각도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성락중은 이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아직 가지고 있는 것을 다 꺼내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승부에 임해본 다음에야 비로소 희망이든 절망이든 선택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성락중은 검기에 휩싸인 사공표의 좌측으로 빠르게 접근하며 수중의 장검을 곧장 앞으로 찔러갔다. 별다른 빛도 보이지 않는 평범한 일검(一劍)이었으나, 그 검이 찔러가는 방향의 검기가 급속히 사그라지며 사공표의 왼쪽 옆구리 부위가 훤히 드러났다.
단순한 것 같아도 성락중의 일검에는 그가 그동안 고련한 검법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검기의 소용돌이를 무풍지대처럼 뚫고 들어가는 그 일검의 기세는 가히 대해(大海)를 가르는 산악(山嶽)과도 같았다.
쭈아악!
마치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검기의 일단이 갈라지며 성락중의 검이 빛살처럼 뚫고 들어오자 사공표의 낯빛이 굳어지며 눈가에 흉흉한 빛이 감돌았다. 사공표는 싸우는 도중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뜨며 감정이 최고조로 고양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검기의 한쪽이 파해되며 완벽해 보였던 검기의 벽이 깨어지자 자신이 평생을 들여 쌓아놓은 성(城)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에 분기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사공표의 검이 성락중의 검을 사정없이 후려쳐갔다. 매서움을 넘어 난폭해 보이기까지 하는 거친 검격(劍擊)이었으나, 그만큼 그 안에 담긴 위력은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깡!
천지 사방이 온통 뒤흔들리는 듯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성락중의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성락중의 낯빛은 시체의 그것처럼 창백했고, 수중의 검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어 금시라도 손에서 뛰쳐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에 비해 사공표는 왼쪽 옆구리가 조금 찢어지기는 했으나 그 외에는 전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잠시도 쉬지 않고 재차 성락중에게 달려들며 검초를 날리는 그의 모습은 한 마리의 성난 표범을 연상케 했다.
까까깡!
순식간에 그들의 검이 대여섯 번이나 격돌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성락중의 검은 사공표의 검을 피하지 못하고 계속 부딪혔으며, 그때마다 그의 몸은 조금씩 흔들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사공표의 칠살검법은 그야말로 절정에 달해 있어 우적지의 중앙이 온통 그의 검이 뿌리는 변화에 휩싸인 듯 했다. 그 퍼붓는 듯한 검기의 폭풍 속에서 연신 휘청거리는 성락중의 모습은 파도치는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조각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커다란 충격이 그의 전신을 뒤흔들어서인지 그의 입가로는 검붉은 선혈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나 그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강력하기 짝이 없는 사공표의 검기를 고스란히 검으로 받아내면서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침착했고, 눈빛은 아직도 형형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사공표의 공세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수십 초가 폭포수처럼 퍼부어지는 와중에도 성락중은 끝끝내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그 많은 검초의 다발들을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일 초 일 초가 금강동인이라도 부숴버릴 듯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 엄청난 공격을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만 해도 격랑 속의 조각배처럼 금시라도 가라앉을 듯 하던 그의 모습이 언제부터 인지 사람들의 눈에는 어떠한 폭풍우가 퍼부어도 끄덕하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천년거목(千年巨木)으로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사공표의 공세가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이미 육십이 훨씬 넘은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 지금까지 엄청난 검기의 세례를 퍼부은 것만으로도 그로서는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하나 그 거센 공격으로도 성락중의 철벽같은 수비를 뚫을 수는 없었고, 마를 줄 몰랐던 사공표의 내공도 어느 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온통 시퍼런 검기로 둘러싸여 있던 사공표의 몸이 점차 드러나며 검기의 푸른 빛이 조금씩 가셔지는 순간, 지금까지 줄곧 수비만을 하고 있던 성락중이 앞으로 성큼 큰 걸음을 내딛으며 수중의 검을 곧장 찔러갔다.
허공의 한 점을 쏘아가는 검의 움직임은 한없이 단순한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할 수 없이 표홀해 보였다. 그 검의 움직임을 따라 주위의 공기가 송두리째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일검이야 말로 지금까지 가혹하리만치 무서운 사공표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면서도 성락중이 노리고 있던 회심의 한 수였다. 그 검초에는 사부인 전풍개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성라검법의 여러 절초들과 절친한 친우인 전관평이 보여준 해남검파의 절묘한 무학들, 그리고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무인들과의 비무에서 얻은 다양한 무리(武理)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고오오오…….
사공표는 사력을 다해 마지막 남은 진력까지 끌어올려가며 칠살검법의 검초를 펼쳤으나 허공을 압도하며 다가오는 성락중의 검을 막을 수는 없었다.
파앗!
마지막 순간, 눈부시도록 찬연한 검광이 번뜩이는 것을 끝으로 장내를 뒤덮었던 검기의 소용돌이와 검 그림자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군웅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성락중은 검을 펼친 자세 그대로 오른 발을 앞으로 내딛고 손을 앞으로 쭈욱 뻗고 있었다. 그에 비해 사공표는 양 손을 늘어뜨린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고 허탈한 표정이었다.
사공표의 고개가 천천히 떨구어지며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향했다.
그의 가슴 부위가 조금씩 붉게 물들더니 이내 시뻘건 핏물이 흘러내렸다. 사공표의 노구가 한 차례 휘청거렸으나, 검으로 몸을 지탱하여 간신히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사공표는 오른 가슴을 피로 물들인 채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성락중을 바라보았다.
“내 심장은 왼쪽에 있는데, 왜 오른쪽 가슴을 노린 거냐?”
성락중은 내밀었던 검을 거두고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이것은 결투가 아니라 비무였습니다.”
사공표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한 차례 부르르 떨리더니 거센 노성이 터져 나왔다.
“노부를 봐준 것이냐? 전풍개가 그렇게 시키더냐? 나를 꺾게 되면 구차한 목숨을 살려서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라고?”
“사부님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는 그저 검을 익힌 사람으로서 제게 검의 길을 열어준 문파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사공표는 성난 눈으로 성락중을 쏘아보았으나, 성락중의 표정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입가로는 검붉은 피를 흘리고 얼굴색은 창백하기 그지 없었어도 그는 여전히 담담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공표는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더니 이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냈다.
“아! 작은 성취를 얻고 세상을 다 가진 듯 오만을 떨었으니 이런 신세가 된 것도 당연한 일이지. 언덕 위에 더 큰 산이 있음을 어찌 몰랐을꼬. 이제 두 번 다시 노부가 강호에 나와 검을 휘두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공표는 무거운 탄식을 연거푸 토해내더니 이내 쓸쓸히 몸을 돌려 장내를 벗어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은 유난히 초라하고 고독해 보였다.
노강호의 허무한 퇴장에 장내가 숙연해진 가운데, 귀호가 문득 생각난 듯 교리를 돌아보았다.
“정말 모처럼 보는 멋진 검투였는데, 결말은 무척이나 씁쓸하군. 자네 소감은 어떤가?”
교리는 별반 표정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똑같이 봐놓고 무슨 소감을 묻는가?”
“검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그의 검을 실컷 보았으니 성락중이라는 인간이 어떤지 말해 보지 않겠나?”
“흠.”
교리의 얼굴에 문득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흥미로운 인간이지. 전형적인 무인(武人)의 상(像)이야.”
“그렇게 포괄적인 이야기 말고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 자네가 본 성락중은 어떤 인간인가?”
교리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끈기와 집념의 화신(化神)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는 분명 내공과 검의 속도, 검기의 발출에서 사공표에 뒤졌네. 사공표가 검기성벽을 이루는 순간부터는 일방적으로 몰렸지. 그럼에도 그는 사공표의 가공할 공격을 견디어 냈네. 사공표의 진력이 바닥날 때까지 악착같이 버티고 버텨낸 거지.”
귀호가 연신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건 정말 대단하긴 했지. 보는 나도 손에 식은 땀이 잔뜩 났을 정도였으니 말일세.”
“그리고는 최후까지 노리고 있던 일초로 단숨에 승부를 뒤집어 버렸지. 그 일초는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상당히 비범한 초식이었네.”
“어떤 초식인지 알겠나?”
교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일정한 형식이 없이 즉흥적으로 창안해낸 초식일 걸세. 참고 참았다가 기회가 오자 자신의 모든 걸 담은 일초를 마음이 가는 대로 펼쳐낸 거지. 그런 초식은 절대로 일부러 만들거나 머리로 짜낼 수 없는 걸세. 당시의 상황과 심정, 그 외의 여러 가지가 결합하여 자연스레 뿜어 나온 것이지.”
“그렇다면 다시 또 그런 초식을 펼치지는 못한단 말인가?”
“길이란 처음에 가는 게 어렵지 한 번 갔던 길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법일세. 그가 일단 그 초식을 펼친 이상 언젠가는 다시 그 초식을 마음 대로 펼쳐 보일 수 있을 걸세. 그리고 그때 종남파는 새로운 절초 하나를 얻게 되겠지.”
귀호는 입을 쩝쩝 다셨다.
“부러운 일이군.”
교리는 수중의 검을 거두고 단정한 걸음으로 돌아가는 성락중의 고아한 얼굴을 한동안 가만히 주시하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생긴 건 점잖고 유약해 보이는데, 정말 대단한 근성을 지니고 있군. 이래서 인간이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법이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