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1권 악산대전(嶽山大戰)편 : 9화
제 321 장 우적배영(友的背影)
성락중이 사공표를 꺾고 일승일패가 되자 장내의 분위기는 한층 더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두 번의 비무는 모두 중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대결들이었고, 그 결과 또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인들 중 상당수는 막연한 호기심에서 이번 비무를 참관했으나, 막상 비무가 시작되자 종남파와 형산파가 얼마나 절실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임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비무가 아니다. 거대한 싸움[大戰]이다!’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단순히 문파의 우열을 가리기 위한 비무가 아니라 문파의 미래와 사활을 걸고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는 그야말로 처절하고 살벌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려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권법의 또 다른 경지를 보여준 옥면신권, 자신이 왜 천하무림 지법의 최고봉인지를 여실히 증명한 용선생, 그리고 검기의 최고경지인 검기성벽를 이룬 사공표와 그런 사공표를 일검에 패배시킨 무영검군까지.
단 두 번의 격전이었으나 그들이 보여준 절묘한 초식의 운용과 지고(至高)한 무공의 경지, 용맹정진하는 진지한 자세는 많은 무림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은 세 번째로 나서게 될 인물이 누가 될 것인가로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째 출전자는 종남파에서 먼저 나서게 되었다. 종남파에서 걸어 나오는 인물을 본 중인들 중 상당수는 어리둥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알록달록한 화의에 우람한 체구를 지닌 중년인이 보무당당하게 나서고 있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동안 소문으로 들었던 종남파의 고수들 중 비슷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종남파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보아 하니 검도 차지 않은 것 같은데, 옥면신권 말고 수공의 고수가 종남파에 누가 있던가?”
주위가 웅성거리는 가운데 화의 중년인은 고리 같은 눈을 부릅뜨고 형산파 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패기무쌍한 빛이 가득했고, 두 눈에는 신광이 이글거리고 있어서 마음 약한 사람은 쳐다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때 중인들 중 누군가가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저 사람은 경요궁의 궁주인 화의신수 육천기다.”
“육천기? 그가 왜 종남파의 제자로 나선단 말인가?”
사람들 사이의 소란이 더욱 커졌다. 누군가가 전후 사정을 짐작한 듯 열심히 주위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경요궁이 종남파의 속문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네. 그 뒤로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기에 헛소문인줄 알았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네.”
“그럼 육천기가 정말 종남파의 제자란 말인가?”
“그러니까 종남파에서 속문입파를 허락한 거겠지.”
“그럼 경요궁의 무공이 종남파에서 파생된 것이란 말이로군.”
“아마 그럴 걸세.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겠지.”
사람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가운데 형산파에서도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청삼을 입고 검은 수염을 기른 수려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그의 검에 매달린 푸른 수실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칠지신검 좌군풍이다!”
“오늘 정말 제대로 된 대결을 보게 되는구나. 화의신수와 칠지신검이라니. 정말 누가 이길지 승부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겠군.”
“그런데 저 두 사람이 서로 친분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글쎄. 정말 그렇다면 좌군풍은 왜 굳이 지금 나오는 거지? 이런 자리에서 친구를 상대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좌군풍을 보는 육천기의 얼굴에는 쓰디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에 비해 좌군풍은 침착하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육천기는 좌군풍을 한참이나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나올 줄은 몰랐군.”
좌군풍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자네를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뿌리를 찾은 걸세. 아주 오래 전에 잊어 버렸던 뿌리를 말일세.”
“그건 의당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사정이 이렇게 되다보니 마냥 축하할 수만은 없게 됐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 채 쓴웃음을 머금었다.
육천기와 좌군풍은 오래전부터 교우관계를 유지해오던 사이였다.
당시에는 육천기도 자신이 종남파의 후예라는 자각이 없었고, 좌군풍 또한 경요궁이 종남파에서 파생된 문파라는 걸 전혀 몰랐기에 두 사람이 친분을 나누는 데는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다. 육천기는 좌군풍의 침착하고 사리가 분명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고, 좌군풍은 육천기의 솔직함과 사내다움에 호감을 느꼈다.
두 사람의 외양이나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으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것 때문인지 두 사람은 쉽게 친해져서 이내 절친한 친분관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문파의 미래를 건 중대한 결전의 한복판에 마주치게 되었으니 가슴이 답답하고 입맛이 씁쓸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육천기는 자신의 상대로 형산파에서 누가 나오든 자신이 있었으나, 좌군풍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친한 사이이기도 했거니와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장단점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육천기도 좌군풍의 무공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하나 좌군풍이 자신을 상대로 나선 것을 보고는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좌군풍은 과묵하고 차분한 인물이었으나, 의외로 냉정하고 이기적인 구석이 있어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는 때때로 무척이나 용의주도하고 계산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과의 비무에 나섰다는 것은 자신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은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육천기는 그 점에 대해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좌군풍이 과거의 자신을 보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것이 철저히 잘못된 계산이었음을 깨우쳐줄 자신은 있었다.
종남파에 속문입파하면서 취선삼학을 비롯한 경요궁의 절기들을 전해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 얻게 된 종남파의 비전들이 더 많았다.
그중 대부분은 오랫동안의 고련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지만, 몇 가지는 당장 써먹어도 좋을만한 뛰어난 절학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약류장은 육천기의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한 놀라운 무공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유연한 동작 속에 금석이라도 모래처럼 부숴버리는 가공할 위력을 담은 이 무공을 접한 순간, 육천기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화의신수라는 별호답게 각종 수공과 권장지각(拳掌指脚)에 능한 육천기였지만, 결정적인 한방을 가진 강력한 수법이 없어서 늘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약류장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면 일 장 만으로도 절정고수를 격살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영탈혼장으로 바뀐다고 하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진산월에게 약류장의 구결을 전해 받은 다음부터 육천기는 침식을 거르다시피 하며 약류장의 연마에 매진해 왔다.
그 결과가 어떠한지는 육천기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육천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좌군풍은 그를 향해 정식으로 예를 취했다.
“형산파의 십이대 제자 좌군풍이오. 삼가 한 수 가르침을 청하오.”
그가 무림에서 통용하는 비무의 예를 취하는 것은 친구 사이가 아닌 보다 공적인 지위로 육천기를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육천기는 막상 그와의 일전을 각오했으면서도 그의 이런 모습을 보자 씁쓸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저런 냉정하고 딱 부러지는 모습이야말로 좌군풍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육천기는 한동안 묵묵히 좌군풍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도 간단하게 답례했다.
“종남파의 이십대 제자 육천기요.”
스스로의 입으로 종남파의 제자라는 말을 꺼냈을 때, 육천기의 가슴은 자신도 모르게 세차게 울렁거렸다. 종남파의 속문으로 들어가고 장문인에게 이십대 제자로 공인도 받았지만, 막상 자신이 종남파의 제자라는 절실한 생각은 그다지 없었던 육천기였다.
그런데 믿었던 친우의 냉정한 모습을 보고난 후 자신의 입으로 종남파의 이십대 제자라는 말을 내뱉고 나니 이제 비로소 진정으로 종남파에 몸을 담게 되었다는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것이었다.
‘그래, 나는 종남파의 제자다. 오늘 기필코 형산파를 꺾고 본 파를 구대문파의 자리에 복귀시킬 것이다.’
전에 없던 각오가 새삼스럽게 봇물처럼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스릉!
좌군풍의 허리춤에 묶여 있던 장검이 한 마리 생물처럼 뽑혀 나와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 유연한 발검동작만 보아도 좌군풍의 검이 어떠한 경지에 접어들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나 두려움은 없었다.
좌군풍이 그를 알고 있는 만큼 육천기 또한 좌군풍의 검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군풍의 검은 유(柔)와 변(變)으로는 능히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지만, 강(剛)과 쾌(快)는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상대해 볼만 하다.’
좌군풍의 완벽한 발검 자세를 보면서도 육천기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한 승부욕을 불태웠다. 그러고 보니 처음 좌군풍을 만났을 때 그의 고강한 검술을 보고 언젠가 꼭 진검승부를 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뜻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진검승부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육천기는 검으로 형산파의 예전초식인 포권수일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좌군풍을 보며 천천히 자신의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좀처럼 보기 힘든 친우들간의 격전이 벌어졌다.
선공을 한 사람은 육천기였다.
맨손과 병기의 싸움은 얼마나 간격을 잘 유지하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다. 일정 간격 이상은 병기를 든 사람이 유리하지만, 그 이하로 간격이 좁혀지면 아무래도 맨손무공을 쓰는 사람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간격을 주지 않기 위해 검을 든 사람이 먼저 공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육천기는 자신이 먼저 쌍장(雙掌)을 날렸고, 좌군풍 또한 육천기가 공격하기 전에 검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좌군풍의 성격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냉정하고 용의주도하면서도 신중한 좌군풍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검초의 변화를 달리하는 습관을 가졌는데, 두 사람 모두 이점을 잘 알고 있기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육천기가 선공을 취한 것이다.
꽈릉!
단순히 두 개의 손으로 번갈아가며 장력을 날렸을 뿐인데, 뇌성 같은 굉음이 장내를 뒤흔들며 무시무시한 기운이 좌군풍의 좌우측을 휘몰아쳐갔다. 천룡팔장(天龍八掌) 중의 쌍룡개천(雙龍開天)이라는 초식인데, 강맹한 위력에 비해 투로는 조금 단순한 편이었다. 그래서 상대의 반응을 파악하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수법이기도 했다.
왼쪽과 오른쪽을 동시에 노리기 때문에 상대는 정면으로 맞서던지 앞이나 뒤로 피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행동을 하던 다음에 펼쳐지는 창룡박호(蒼龍搏虎)를 피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일단 창룡박호에 맞서게 되면 이어지는 맹룡과강(猛龍過江), 노룡양파(怒龍揚波), 박룡분하(博龍分河)의 연환삼룡식(連環三龍式)에 당하게 된다.
연환삼룡식은 그 자체의 위력도 뛰어났지만, 설사 그 연환식을 파해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상대방은 필연적으로 육천기의 접근을 허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육천기가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육천기의 성명절학인 천룡십팔산수는 박투에 능한 취선의 취공대산수를 변형 발전시킨 무공이어서, 가까운 거리에서 그와 육박전을 벌이게 되면 제아무리 뛰어난 고수라 해도 당해내기 어려웠다.
하나 좌군풍의 반응은 그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좌군풍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수중의 장검으로 크게 원을 그렸다.
그에 따라 그의 검에서 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기운은 곧 그의 전신을 압박해 오던 두 개의 장력과 마주쳤다. 그런데 장력에 부딪힌 기운은 흩어지거나 튕기지 않고 오히려 장력을 조금씩 흡수하는 듯 하더니 이내 그의 검이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이었다.
좌군풍이 원을 그린 검을 허공에 털 듯이 슬쩍 가볍게 쳐내자 육천기의 장력들의 그 모양을 따라 그대로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마치 검으로 상대의 장력을 흡수했다가 발출해 버리는 듯한 동작을 본 귀호가 감탄성을 발했다.
“정말 대단하군. 평범한 이화접목(梨花接木)같지는 않은데, 어떤 수법인지 알겠는가?”
교리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접인지기(接引之氣)로 이화접목을 보강했군.”
귀호가 흠칫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접인지기? 검으로 접인지기를 발출해냈단 말인가?”
“그래. 아무래도 수공의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상당한 연구를 한 것 같군.”
원래 검의 고수가 수공의 고수와 싸울 때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상대가 날리는 장공이나 권경같은 경기의 처리였다. 피하기만 해서는 수세에 몰리게 되고, 그렇다고 막자니 검으로 막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런데 좌군풍은 검으로 상대가 발출한 장력을 끌어들여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함으로서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드러냈다. 적어도 좌군풍이 육천기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좌군풍이 제자리에서 육천기의 장력을 파해하자 곧바로 육천기의 커다란 손이 날카로운 기세로 다가들었다. 창룡박호의 초식이었다.
옆이나 뒤로 물러나는 상태였으면 맹렬하기 그지없는 창룡박호를 상대하는데 적지 않은 애를 먹었을 것이다. 하나 좌군풍은 그 자리에 선 채 검을 앞으로 곧장 내찌르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창룡박호를 막아 버렸다. 좌군풍의 검이 코앞으로 뻗어오자 육천기는 초식을 거두고 뒤로 훌쩍 물러나 버렸던 것이다. 육천기가 계속 초식을 전개했다면 좌군풍의 검에 그대로 손바닥을 꿰뚫리고 말았을 것이다.
강력한 위력이 있을 뿐 아니라 날카로운 연계 변화가 숨어 있는 자신의 초반 공격을 너무도 수월히 막아내는 좌군풍을 보고 육천기는 한층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쉽지 않겠군. 정말 쉽지 않겠어.’
육천기의 짐작대로 좌군풍과의 싸움은 고전의 연속이었다.
좌군풍은 육천기의 무공 노수(路手)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지 그가 어떤 무공을 펼쳐도 단순하고 절묘한 동작으로 파해해 냈다. 특히 노림수가 담겨 있는 무공은 아예 그 원천을 제거하여 어떤 노림수도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좌군풍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도 아니었다.
육천기 또한 좌군풍의 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지 않았다.
좌군풍이 주로 사용하는 검법은 청풍검결(淸風劍訣)이었다. 청풍검결은 형산파의 구종검법 중 칠 위에 올라 있는 검법으로, 원공검법 같은 기묘함이나 칠살검법 같은 날카로움, 유룡십이검 같은 자유분방함은 없었다. 대신 어떤 검법과도 상생이 잘 맞아서 다른 검법과 혼합하여 사용할 경우 최고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좌군풍은 원공검법과 칠살검법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검법에 두루 능했기 때문에 청풍검결을 바탕으로 하여 여타 검법의 절초들을 고루 섞어 사용하곤 했다. 그럼에도 그는 한 가지 검법에 정통한 다른 오결검객들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오랫동안 폐관수련을 하고 있는 냉홍검 고진과 오결의 제일인자라는 조화신검 사견심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도 감히 그의 검에 견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의 별호에 ‘신검’이라는 두 글자가 붙어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검이 얼마나 높게 평가받고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칠지’는 그의 검법이 다방면에 능통하여 마치 사방으로 일곱 개의 가지를 뻗은 것 같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좌군풍의 검은 물 흐르듯 유연한 움직임으로 육천기의 전신을 노렸으나, 육천기는 장난처럼 가볍게 장력을 날려 번번이 검기의 흐름을 끊어 버렸다. 단순해 보였지만 장력을 날려 검기의 흐름을 제어하는 것은 흐름의 맥(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십여 초가 지나도록 두 사람은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치지 못하고 서로의 수법을 파해하는 것에 더 주력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켜보는 중인들 중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그들의 싸움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나 교리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생각보다 살벌한 싸움이 되겠군.”
그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귀호가 눈을 번쩍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런가? 그냥 보아서는 이대로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다가 대충 마무리될 것 같은 모습인데…….”
“단순한 비무였다면 그렇게 되었겠지. 서로 상대의 무공을 칭찬해 주면서 말이지. 하지만 이건 그런 친선을 위한 비무가 아니지 않나?”
“그렇지. 어떻게든 승부를 내야하는 싸움이지.”
“서로의 무공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승부를 가리기 위해 집중하다보면 예상외로 치열해 지는 수가 있네. 더구나 반드시 상대를 꺾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그 치열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험악해 질수도 있지.”
형산파와 종남파는 현재 일승일패인 상황이었다. 종남파의 남은 출전자 중 한 사람이 신검무적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본다면 이번 비무의 결과에 따라 어쩌면 의외로 빨리 승패가 결정될지도 몰랐다. 다시 말해서 종남파가 이기게 되면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형산파로서는 그 점을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번 비무의 승리가 필요했다. 만약 형산파가 승리하여 이승일패가 된다면 아무리 신검무적이 남아 있다고 해도 승부의 저울추는 형산파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본다면 좌군풍과 육천기의 싸움에서 누가 승리할지가 이번 비무 전체의 판도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교리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다소 밋밋해 보였던 좌군풍과 육천기의 싸움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 발단은 좌군풍의 검법이 특유의 부드러움에서 벗어나 강하고 빠른 초식들로 바뀌면서부터였다. 지금까지 청풍검결을 바탕으로 하던 좌군풍이 칠살검법과 원공검법의 초식들을 본격적으로 혼용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성질의 공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청풍검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육천기조차도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느낄 정도로 좌군풍의 검은 무섭도록 빠르고 날카로운 변화들을 뿌려냈다.
그래서 육천기가 지금까지 해왔던 검기의 흐름을 찾아 그 맥을 끊는 방식의 대응은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었다. 워낙 검기의 변화가 심하고 속도 또한 확연히 빨라져서 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파파팍!
순식간에 육천기의 상반신이 검세에 노출되면서 삼엄한 검기에 옷자락이 군데군데 잘려나갔다. 육천기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연거푸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서며 좌군풍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더니 이내 오른발로 바닥을 가볍게 찼다.
파악!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그의 다리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좌군풍의 아래턱을 노리고 솟구쳐 올랐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로 가공스러운 이 발차기 공격은 창룡선풍각 중의 일섬각(一閃脚)이었다.
창룡선풍각은 천룡십팔산수와 함께 육천기가 가장 자신하는 상승 절학이었다. 다만 그 위력이 너무나 파괴적이고 살기가 짙어서 반드시 죽어야 할 상대가 아니라면 극도로 사용을 자제했기에 강호무림에서는 그 진면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좌군풍 또한 창룡선풍각에 대해서는 이름만 알고 있을 뿐, 자세한 변화나 묘용은 알지 못했다. 육천기가 그의 앞에서도 제대로 펼쳐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좌군풍은 하마터면 치명적인 상황에 빠질 뻔 했다.
뒤로 물러나는 육천기를 따라 무심코 앞으로 움직이던 좌군풍은 순간적으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육천기의 앞발이 상상을 불허하는 각도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좌군풍이 그 무시무시한 일섬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힐끗 본 육천기의 표정에서 그가 무언가 회심의 한수를 준비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좌군풍은 사력을 다해 몸을 뒤로 젖혔고, 육천기의 앞발은 그의 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좌군풍은 턱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에 눈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뒤로 젖힌 몸을 옆으로 비틀며 날카로운 이검(二劍)을 날렸다. 막 발차기로 좌군풍을 공격했던 육천기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섬뜩한 검날이 그의 콧등으로 날아들었다. 그 속도와 날아드는 기세가 어찌나 빨랐던지 무언가 번쩍하는 섬광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헛!”
육천기는 다급한 헛바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 간신히 일검을 피해냈다. 하나 좌군풍이 동시에 날린 두 번째 검격은 미처 피할 수 없었다.
팟!
옆구리가 검광에 스치며 피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 사이의 격전에서 처음으로 피가 뿌려진 것이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피를 본 육천기는 사람이 변한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미친 듯이 창룡선풍각을 펼쳤는데, 마치 하늘을 나는 한 마리 천룡처럼 허공을 이리저리 휘돌며 날아드는 그의 발차기에 좌군풍은 몇 차례나 정통으로 격중 당할 뻔한 아슬아슬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중 한 번은 어깨 부위를 가격당해 어깨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검을 쥐지 않은 왼쪽 어깨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좌군풍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는 육천기의 발이 지나갈 때마다 몸을 최대한 따라붙으며 벼락같은 검초를 날렸는데, 그때마다 육천기의 몸에서는 크고 작은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조금 전과는 달리 피를 마다하지 않는 혈전(血戰)을 벌이자 그 치열함에 중인들은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육천기가 창룡선풍각의 절초들을 펼칠 때마다 좌군풍의 몸은 금시라도 그 강철 같은 발차기에 그대로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하늘조차 갈라놓을 듯한 그 가공할 발차기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격중 되면 아무리 좌군풍이라 할지라도 다시 일어서지는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틈틈이 펼치는 천룡십팔산수는 더욱 위력적이어서 그의 쌍장이 움직일 때마다 형산파의 진영에서는 놀람에 찬 외침이 흘러나오고는 했다. 창룡선풍각과 함께 펼쳐지는 천룡십팔산수는 가히 경세(驚世)적이어서 그가 왜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공의 고수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 비해 좌군풍의 검은 더욱 빠르고 날카롭고 유연해졌다.
갈수록 속도가 빨라지고 변화가 날카로워지는 그 검이야 말로 청풍검결의 진수(眞髓)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어떤 검법을 섞든 그 검법 본연의 위력을 증폭시켜 더욱 무서운 검초로 만드는 것이 청풍검결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지금 육천기는 자기가 마주하고 있는 검법이 원공검법인지 칠살검법인지, 아니면 또 다른 형산파의 어느 이름난 검법인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청풍검결의 어떠한 초식도 보이지 않고 더욱 매섭고 날카로운 검초들이 자신의 사방을 무섭게 조여오고 있었다.
그제야 육천기는 자신이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청풍검결이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청풍검결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면 지금처럼 자신은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다른 검법들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며 나타나는 것이다.
형산파의 구종 검법중 하나를 통달한 오결검객들이 적지 않음에도 그들 중 누구도 좌군풍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좌군풍이 청풍검결로 보완하는 검법들이 그들이 펼치는 것보다 더욱 위력적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좌군풍은 청풍검결의 진정한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육천기의 전신은 크고 작은 부상으로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좌군풍 또한 왼쪽 어깨가 탈골(脫骨)되고 몇 군데가 창룡선풍각의 발차기에 스치면서 청수하고 고고했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두 절대고수의 사력을 다한 싸움에 장내의 긴장감은 점점 높아져 갔다.
어느 새 그들의 격투는 백 초에 가까워가고 있었다.
무림 고수들 간의 격투에서 백 초란 상당히 의미 있는 숫자였다. 절정의 실력을 지닌 고수가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백 초 동안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했다는 것은 두 사람의 무공이 백중지세란 뜻이었다. 그래서 비무 중에 백 초가 넘으면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무승부로 결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물론 육천기와 좌군풍, 둘 중 어느 누구도 백 초가 넘었다고 싸움을 중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백 초가 되는 순간, 서로 상대를 향해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고 있었다.
육천기의 양 발이 무섭게 선회하며 좌군풍의 머리를 향해 풍차처럼 날아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양 손에서는 날카로운 두 개의 경기가 뿜어 나와 좌군풍의 양쪽 옆구리를 노리고 있었는데, 두 손과 두 발을 동시에 이용하는 이런 공격은 보기에도 기묘했지만 상대하는 사람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그저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수법은 창룡선풍각 중의 쌍륜각(雙輪脚)과 천룡십팔산수 중의 절초인 천룡파미(天龍擺尾)를 동시에 전개한 것으로, 가히 육천기 무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좌군풍은 한 눈에 그 이수이각(二手二脚)의 공격을 모두 완벽하게 틀어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허점이 없고 속도와 방위의 배합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놀라운 공격이었다.
“훌륭하구나!”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짧은 찬사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검이 뿌연 검기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 좌군풍이 펼친 것은 원공검법의 백원적과에 칠살검법의 절초인 병단천남, 유룡십이검의 용유대해에 있는 변화가 포함된 것으로, 형산파 검법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육천기는 주위의 공기가 돌연 차가워진 듯한 느낌에 가슴 한 구석이 섬뜩해졌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을 리는 없으니, 이것은 필시 좌군풍이 발출한 뿌연 검기 때문일 것이다.
육천기의 뇌리에 형산파만의 독특한 진기 운용으로 만들어진 독보적인 검기가 떠올랐다. 강호 무림에는 단순한 유살검기의 변형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육천기는 그 검기의 진실한 명칭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대유혼성검기(大幽魂醒劍氣)구나.’
대유혼성검기는 음유하고 살기 짙은 유살검기보다 훨씬 더 음유할 뿐 아니라 특유의 괴이한 기운이 담겨 있어 검을 막는다 해도 그 기운이 내부로 침투하여 심맥(心脈)을 공격하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혼(魂)을 깨운다(醒)’는 다소 낭만적인 이름과는 달리 치명적일 정도로 은밀하고 잔인한 수법이어서 형산파에서도 공개적으로 내세우지 않고 아주 비밀리에만 전수하기에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실정이었다.
육천기도 좌군풍에게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 듣지 않았다면 그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변화무쌍한 검초에 대유혼성검기가 가세하자 무서운 위세로 펼쳐지던 육천기의 공세가 순간적으로 주춤거렸다. 이대로 계속 초식을 끝까지 전개한다면 최소한 하나의 공격은 격중 시킬 수 있겠지만, 대신에 대유혼성검기의 침투를 막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어느 것이 더 이익인지 판단할 겨를은 없었다. 다만 이 상태에서 공격을 거두고 물러난다면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육천기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팡!
좌군풍은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육천기의 살인적인 쌍륜각은 간신히 피했으나, 왼쪽 옆구리를 정통으로 가격 당했다.
우두둑!
단숨에 갈비뼈가 부러지며 그의 허리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숙여졌다.
육천기 또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비록 우수로 좌군풍의 옆구리를 부수었으나, 좌군풍이 날린 검초를 모두 피하지 못하고 어깨와 우측 허벅지에 이검을 맞고 말았다. 검에 격중 된 부위가 쩌억 갈라지며 핏물이 솟구칠 줄 알았는데, 특이하게도 핏물만 살짝 내비칠 뿐이었다. 특히 우측 허벅지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처가 심했음에도 옷자락에만 겨우 붉은 피가 묻었을 정도였다.
대신 육천기는 상처 부위에서 뼛골을 시리게 하는 기운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육천기는 황급히 상처 주위의 혈도 몇 군데를 지압해서 기운이 다른 곳으로 퍼지는 것을 막았다. 그 바람에 좌군풍이 숙였던 허리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검을 쳐드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어야만 했다. 결정적인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좌군풍 또한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운 듯 했으나,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수중의 장검을 기이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파아아…….
그에 따라 마치 바람 한 줄기가 대나무 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음향이 흘러나오며 수십 개의 검영이 자욱한 안개처럼 육천기의 전신을 뒤덮어갔다.
두 사람이 모두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좌군풍이 먼저 선공을 취했다는 것은 육천기에게는 상당히 불운한 일이었다. 간신히 좁혔던 거리가 무의미해지며 수세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검의 고수를 상대로 수공의 고수가 수세에 몰리게 되면 판세를 뒤집기가 무척이나 힘들어진다. 삼엄한 검기를 뚫고 반격을 가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좌군풍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대유혼성검기는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상태를 불러올 수 있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육천기가 황급히 지압해서 억눌렀음에도 여전히 차갑고 음유한 기운이 막힌 혈도를 뚫으려고 요동치고 있었다. 만일 한 군데라도 더 대유혼성검기의 침입을 허용하게 되면 간신히 막고 있는 다른 기운들도 폭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육천기는 이제 승부를 걸어야 할 시기임을 깨달았다.
육천기는 양쪽 어깨를 흔들며 과감히 자신을 향해 몰아쳐오는 검영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센 격랑에 휩쓸리는 작은 나뭇잎 같았다.
파아아!
그의 양쪽 어깨 부위 옷자락들이 터져나갔으나 기적적으로 단 한군데도 베인 곳이 없었다. 경요궁의 전대궁주이며 한때 강호제일기사라 불리었던 천절신사 조현이 창안해낸 표묘일보(縹緲一步)가 실로 오랜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검기의 벽을 뚫고 들어가자 좌군풍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가까이 서 본 좌군풍의 얼굴은 평상시와는 달리 무겁도록 창백하게 굳어 있었고, 두 눈에서는 주위를 얼릴 듯한 싸늘한 신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친우의 그런 낯선 모습을 음미할 겨를도 없이 육천기는 그의 앞가슴으로 바짝 다가섰다.
육천기가 자신이 펼쳐낸 검영을 뚫고 접근하자 좌군풍은 입술을 깨물며 돌연 왼손으로 내뻗었던 오른팔의 오금부위를 가격했다. 그러자 앞으로 내밀었던 검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눈 깜박할 사이에 육천기의 목덜미를 찔러왔다. 그 기괴한 변화는 실로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어서 육천기가 알았을 때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육천기의 눈에 순간적인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육천기는 지금 약류장을 펼칠 완벽한 기회를 잡은 상태였다. 이런 위치에서 약류장을 발출한다면 좌군풍으로서는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떠난 약류장은 무영탈혼장이라는 또 다른 이름답게 단숨에 좌군풍의 심장을 부수어 놓을 것이다.
친우의 비장하리만치 굳어진 얼굴과 너무도 악다물어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입술을 본 육천기의 얼굴 또한 그처럼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침내 육천기는 오른손을 부드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솜털처럼 가벼운 장력이 너무도 유연하게 좌군풍의 가슴에 와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좌군풍의 검은 그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파앗!
비명은 없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시뻘건 핏물이 하늘높이 솟구치는 가운데,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물러선 사람은 좌군풍이었다.
좌군풍은 두 걸음 뒤로 물러나서 한 차례 몸을 떨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우욱!”
시커멓게 죽은피를 토해낸 그의 안색은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해 보였으나,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 부근을 내려 보더니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서 일 장 떨어진 곳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상반신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가고 있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육천기였다.
종남파 진영에서 동중산이 재빨리 달려와 육천기의 상세를 살폈다.
황급히 육천기의 상처를 본 동중산의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우!”
비록 목덜미가 두 치쯤 갈라지긴 했으나, 동맥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서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동중산은 급히 육천기의 상처를 지혈하고는 좌군풍을 힐끔 돌아보았다.
좌군풍은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육천기를 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는 무어라고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동중산이 육천기의 몸을 안고 종남파 진영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좌군풍은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후우…….”
그의 뒷모습은 살벌하도록 치열한 싸움의 승자답지 않게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귀호가 급히 교리를 향해 물었다.
“대체 마지막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건가? 육천기가 좌군풍의 검을 뚫고 접근하기에 그의 승리가 유력한 줄 알았는데, 왜 좌군풍은 멀쩡히 서 있고 그가 쓰러진 건가?”
“확실히 육천기가 결정적인 위치를 잡긴 했지. 하지만 좌군풍의 반격이 놀라웠네. 아마 각 파 마다 비밀리에 가지고 있는 비전 중 하나겠지. 가까이 접근하는 자를 상대하기 위한 최고의 수법이라고 보여 지는군.”
“내 말은 그게 아닐세. 육천기는 분명 좌군풍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날렸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무공이었을 게 분명하네. 그런데도 단지 좌군풍을 두 걸음 물러나게 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네. 적어도 양패구상(兩敗俱傷)은 할 줄 알았거늘.”
“제대로 내질렀다면 양패구상이 아니라 양패동사(兩敗同死)가 되었겠지. 그만큼 마지막 순간은 서로에게 흉험했으니까.”
“그런데 왜 육천기만 쓰러지고 좌군풍은 멀쩡했느냐는 말일세.”
귀호가 열을 내어 질문을 해도 교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굳이 말하자면 심성의 차이랄까?”
“심성이라고?”
“육천기는 마지막 순간에 차마 친우의 목숨을 끊을 수 없어서 전력을 기울이지 못했네. 반면에 좌군풍은 친우의 생사를 도외시하고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반격을 날렸지. 그게 승부를 가른 걸세.”
귀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말했다.
“자네의 말대로라면 확실히 두 사람의 심성이 승부를 가른 것이로군. 아니, 심성이라기 보다는 우정의 깊이가 달랐던 것일까?”
교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단지 심성일 뿐이라니까. 우정의 깊이는 대동소이할 걸세.”
“그런데 왜?”
“왜 그렇게 현격한 차이가 났느냐고? 육천기는 자신의 일격에 좌군풍이 절대로 살아나지 못한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손에서 힘을 뺀 걸세. 하지만 좌군풍은 육천기의 목이 잘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최대한 사선(死線)은 피하려고 했네. 그래도 잘린다면 그건 어쩔 수 없다는 각오를 했겠지. 그만큼 그에게는 승리가 절실했네.”
“…….”
“똑같은 상황에서 한 사람은 친우의 목숨을 걱정했고, 다른 한 사람은 문파의 승리를 염원했네. 우정의 깊이? 좌군풍이라고 육천기의 죽음을 바랬을까? 왜 쓰러진 육천기의 목에서 피가 나왔을 것 같나? 좌군풍이 진정으로 육천기의 죽음을 바랬다면 그 특이한 검기를 썼을 거야. 하지만 좌군풍은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그 검기를 쓰지 않았지. 최후의 최후까지도 친우의 목숨만큼은 살리고 싶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