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2권 천양현음(天陽玄陰)편 : 1화
제 323 장 월녀투원(1)
종남파의 고수들 중 실제로 임영옥이 검을 펼친 장면을 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낙일방과 동중산, 그리고 진산월 뿐이었다.
그나마도 사 년 전의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라 그 후로 임영옥의 검술이 어느 경지에 올라 있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진산월만이 어렴풋이나마 그녀의 경지를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자연히 비성흔에 맞서는 그녀를 보는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불안의 빛이 어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먼저 몸을 날려 비성흔에게 접근하며 검을 펼쳤을 때,종남파고수들 사이에서 헛바람을 집어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그녀가 너무 성급하게 비성흔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 이내 그들은 눈을 크게 부릅떠야만 했다.
단순히 가볍게 일검을 내뻗은 것 같은데,폭발하는 듯한 검화가 수십 개나 피어오르며 단숨에 비성흔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장내의 누구도 예상치못했던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오직진산월만이 그것이 월녀검법 중의 절초인 옥녀산화 임을 알아보았을 뿐이다.
비성흔 또한 순간적으로 놀랐음이 분명했다. 건장한 그의 몸이 한순간움찔거렸던 것이다. 하나 그는 풍부한 대적 경험을 지닌 고수답게 이내평정을 회복하고 수중의 검을 힘껏흔들었다.
파파파팍!
수십 개의 검광이 빗발치듯 사방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 검광들은 이내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검화들과 격렬하게 부딪혔다.
채채채채채챙!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날카로운 음향이 연거푸 터져 나오며 허공을 뒤덮었던 수십 개의 검화와 검영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임영옥은 달려오던 몸을 멈춰세웠고,비성흔 또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하나 안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검을 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성흔의 왼쪽 옆구리 부근 옷자락이 살짝 베어져 있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평수를 이룬것 같아도 임영옥이 선공을 취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비성흔이 약간 더 우세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짝아악!
갑자기 그녀 주변의 땅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여기저기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예리한 검기가 사방을 무섭게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뒤늦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그만큼 그 검기가 빠르고 은밀했다는 방증이었다.
이것이 바로 원공검법의 최고 경지에 오른 자만이 발출할 수 있다는 원영만기였다. 비성흔이 처음부터 대뜸 원영만기를 사용한 것은 그만큼 임영옥의 옥녀산화에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임영옥은 첫 수로 월녀검법의 절초를 펼쳤고,비성흔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자신의 비장의 절학인 원영만기를 사용했다. 비록 당장의 우열은 가려지지 않았으나,그들이 처음부터 자신의 최고 절학들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의 싸움이 당초의 예상보다 훨씬 더 격렬해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비성흔이 먼저 달려들었다. 커다란 체구에 유난히 긴 팔을 지닌 그가 쏜살같이 움직이자 마치 거대한 성성이가 달려드는 것 같은 압도감이 느껴졌다.
그의 검이 허공에서 괴이한 궤적을 그리며 임영옥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곧장 찌르는 것도 아니고 베는 것도 아닌 비스듬히 사선(斜線)을 그리며 날아드는 검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도 괴이하고 신랄했다.
원공검법 중의 금원휘과라는 초식인데,검초의 변화가 여타검법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경험이 풍부한 고수들조차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당황하기 일쑤였다.
임영옥 또한 순간적으로 어떻게 막아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검으로 막자니 사선으로 비틀어진 상대의 검이 마음에 걸렸고,피하자니 검의 움직이는 각도가 언제라도 직선으로 찔러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임영옥은 제삼의 방법을 선택했다. 그녀는 수중의 장검을 크게 휘둘렀다. 마치 선녀가 커다란 부채를 부치는 듯한 멋들어진 동작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비성흔의 눈앞으로 십여 개의 검영이 빠르게 다가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검영들이 거리를 뛰어넘어 난데없이 불쑥 나타날수 있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비성흔은 계속 금원휘과의 초식을 고집했다가는 그녀의 몸에 검이 닿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검영에 당할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펼친 검초는 월녀검법 중의 궁선요영이라는 것으로,짧은 거리에서 단지 하나의 동작만으로 빠르게 상대를 공격하는 초식이었다. 특히 커다란 부채만큼의 길이를 단숨에 압축해 들어가는 묘용이어서 지금 같은 상태에서의 반격으로는 가히 최고의 수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지 궁선요영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동작이 큰 만큼이나 몸의 허점을 드러내기 쉬웠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비성흔의 눈이 번쩍 빛나며 금원휘과의 식을 재빨리비원탐도로 바꾸었다. 사선으로 움직이던 검이 직선으로 바뀌며 빛살 같은 속도로 임영옥의 좌측 옆구리를 찔러갔다. 그곳이 바로 궁선요영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임영옥의 몸이 한 차례빙그르르 돌았다. 그와 함께 세찬검풍이 비성흔의 얼굴에 몰아닥쳤다.
궁선요영을 펼치면 옆구리에 허점이 드러난다는 것을 그녀가 몰랐을리 없었다. 그녀는 그 허점을 보완할 방법을 연구했고,그것이 바로 지금 펼치고 있는 선녀선무(仙女旋舞) 였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비성흔이 그녀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 꼴이 되고 말았다.
하나 비성흔은 대적 경험이 누구보다 풍부한 인물답게 단번에 절묘한 묘책을 발휘했다. 임영옥의 옆구리를 찔러가던 그의 검이 빙글 돌며 벼락같은 일검이 아래에서 위로 그녀의 목을 향해 폭사되었다.
그 속도와 변화의 절묘함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아앗?”
구경하고 있던 누군가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가 보기에도 그녀의 목이 그대로 비성흔의 검에 꿰뚫려 버릴 것만 같았던 것이다.
빠르게 회전하며 비성흔의 전면으로 다가서던 임영옥의 교구가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파앗!
잘려진 옷자락이 허공에 나풀거리는 순간,그녀의 몸은 어느새 바닥으로 바짝 내려선 채 물을 박차고 날아가는 제비처럼 비성흔을 향해돌진해 가고 있었다.
그녀가 비성흔의 살인적인 일검을 어떻게 피하고 비성흔에게 접근할수 있었는지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목을 노리고 허공으로 찔러 들어간 검을 미처 회수하지 못한 비성흔이 위기에 몰렸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 수 있었다.
비성흔의 코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눈부신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순간, 비성흔의 입에서 엄청난 폭갈이 터져 나왔다.
“합!”
그와 함께 허공으로 쳐들렸던 검이 가공할 위세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천지를 일도양단하는 듯한 검의 기세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임영옥은 어쩔 수 없이 검을 거두고 옆으로 피해야만 했다. 계속 검을 휘둘렀다면 비성흔의 앞가슴을 피범벅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 만,대신 그녀의 몸은 그대로 두 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좌악!
그녀가 지나간 자리가 움푹 파이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휘날리는 광경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 가공할 위력에 중인들의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한바탕 격렬하게 맞부딪혔던 그녀와 비성흔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팽팽한 대치에 들어갔다.
비성흔이 금원휘과의 식으로 공격해 들어가고,뒤이어 그녀가 궁선요영의 식으로 반격하고,그것을 뒤집어 비성흔이 살인적인 일검을 날리고,그녀가 몸을 뒤집어 그것을 피하며 비성흔에게 접근하다 뒤로 물러서기까지는 그야말로 숨 한두 번내쉴 사이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만큼 긴박하고 살벌한 순간의 연속이어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눈조차 제대로 깜박일 수 없었다.
그녀의 목을 노렸던 비성흔의 일검은 원공검법 중에서도 가장 살기 짙은 초식인 맹원탐조였고,그 무시무시한 일검을 피한 그녀의 수법은 월녀보 중의 반월선무(半月仙舞)와 수상월영이었으며, 가공할 기세로 내리꽂히던 비성흔의 마지막 일격은 궁원먹식(窮遠貢食)이었다.
두 사람이 펼친 초식들은 하나같이 절초가 아닌 것이 없었으며,그들의 공수는 더할 수 없이 날카로 우면서도 위력적이었다.
잠깐 멈춰진 듯했던 두 사람 사이의 검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달려들었다. 비성흔은 무시무시한 원영만기를 잔뜩 끌어올린 상태에서 원공검법의 절초들을 쉴 새 없이 펼쳐내며 그녀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에 비해 임영옥은 표홀하면서도 우아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가 볍고 부드러운 동작임에도 검초의 변화는 더할 수 없이 빠르고 영활했다. 그래서인지 거칠고 예리한 비성흔의 검이 좀처럼 그녀의 검에 막혀본연의 위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중인들은 비성흔의 실력은 이미 익히 소문으로 알고 있었지만,그동안 이름조차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종남파 여검객의 솜씨를 보고는 그야말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당대 무림의 어떤 여고수가 형산파 오결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인 비성흔과 이와 같은 팽팽한 싸움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여인치고는 비교적 훤칠한 키였으나, 비성흔에 비하면 절반밖에 되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녀린 몸으로 거칠고 무시무시한 비성흔의 검에 정면으로 맞서는 그녀의 모습은 말그대로 하늘의 선녀를 연상케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격투는 점점 더 치열해졌고,그만큼 보는 이의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 살벌한 순간들이 거푸 이어졌다.
비성흔의 검이 예리한 파- 공음을 내며 그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짓쳐들 때면 당장에라도 그녀의 아리따운 몸이 몇 토막으로 잘라져 처참한 시신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고,그녀의 섬섬옥수에 쥐어진 검이 유연하면서도 섬세하게 비성흔의 검초사이를 파고들 때면 금시라도 비성흔이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언뜻 보기에는 그녀가 조금 더 유리한 듯했다. 비성흔은 이미 몇 군데의 상처를 입고 있어 적지 않은 피를 홀리고 있는 반면에 그녀의 몸은 단 한 군데의 상처도 없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하나 실력이 뛰어나고 안목이 예리한 몇몇 고수들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비성흔이 더 우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안색이 갈수록 창백해지며,꼭 다문 입술에 얼핏 핏기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감당하고 있는 원영만기의 기운이 조금씩 그녀를 압박해 들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비성흔은 이와 같은 살벌한 격전을 적지 않게 경험한 노련한 인물이 었다.
반면에 임영옥은 비성흔 같은 절정검객은커녕 다른 고수들과 싸워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의 차이는 격전이 계속될수록그녀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예상은 점점 현실화되어 갔다.
격전이 오십 초를 넘어서 백 초에 육박하는 순간,그와 그녀의 검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맞부딪혔다.
캉!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주춤물러났다. 비성흔의 강력한 원영만 기를 힘겹게 막아내던 그녀가 마침내 처음으로 확연한 약세를 보인 것이다.
그것을 본 비성흔의 검초가 더욱빨라지고 검기는 더욱 매서워졌다.
비성흔 또한 지금이 그녀를 꺾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파파파팟!
사방이 온통 비성흔이 발출한 원영만기의 기운에 휩싸였고,부서진 돌가루가 휘날리며 눈도 제대로 뜨기 어려워졌다. 지금 비성흔이 펼친 것은 노원광란이란 초식으로,원공검법 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이었으나 그만큼 공력의 소모가 심해서 비성흔도 좀처럼 시전하지 않는 절초 중의 절초였다.
무섭게 휘몰아치는 원영만기의 검기는 수십 가닥이나 되었다. 그중한 가닥에라도 맞게 되면 쇠로 만든 금강동인이라도 잘라지고 말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그녀가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에도 절망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