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2권 천양현음(天陽玄陰)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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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2권 천양현음(天陽玄陰)편 : 3화


제 323 장 월녀투원(2)

그녀의 귀로 다양한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바람 소리,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누군가의 놀라 외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검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수십 개의 강력한 기운들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다가오는 소리…….

그리고 그 많은 소리들에 섞여 거의 들리지 않는 아주 희미한 소리하나가 있었다.

조용하고 유난히 긴 호흡 소리.

그 호흡은 규칙적이면서 일정한 흐름이 있었고,어떤 상태에서도 숨이 가빠지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 나직한 호흡이야말로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검객만이 가질 수 있는 부동심(不動心)의 흔적이었다.

그 호흡의 깊은 울림이 흘러나오는 원천이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임영옥은 다시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사방을 폭풍처럼 휘몰아쳐 들어오는 수많은 검기의 홍수 뿐. 그중 어디에도 그녀가 몸을 피할 곳은 존재하지 않는것 같았다.

검을 쥔 그녀의 손이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순간,그녀의 검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점차로 증폭되어 이내 하나의 커다란움직임을 이루어냈다.

마치 멀리서 벌 떼가 날아오는 듯 한 음향과 함께 그녀의 검에서 눈부신 검광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시리도록 새하얀 검광이었다. 그 검광은 이내 폭죽처럼 피어올라 순식간에 그녀의 몸 주위로 폭사되어 갔다.

파파파파파팡!

엄청난 파공음과 세찬 경기가 주위를 온통 뒤집어 놓았다. 반경 삼 장이내의 땅이 거북의 등가죽처럼 갈라지며 크고 작은 돌조각이 사방으로 비산되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격돌이 아닐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휘청이며 뒤로 다섯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녀의 낯빛은 너무나 창백해서 단한 점의 혈색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항상 총명하게 빛나던 눈빛도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하나 그녀의 몸에는 단 한 군데의 핏물도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검에서 솟구친 검광들은 그녀의 전신을 무섭게 압박해 들어오던 수십 개의 검기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격중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그 검기들의 날아오는 방향과 속도를 예측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휘청이는 그녀에 비해 비성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확연한 그의 우세였다. 그녀가 아직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지금,비성흔이 단일 검만 날려도 그녀는 절대로 받아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비성흔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의 몸은 여전히 철탑과도 같았고 별다른 부상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아직도 시퍼런 빛을 발하는 장검이 굳게 쥐어져 있어 그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무시무시한 검기가 다발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비성흔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선 채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는 실로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사실을 홀연히 깨달은 놀라움 같기도 했고,뭔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허탈함 같기도 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지척에서 목격한 황당함같기도 했다.

장내에는 수많은 군응들이 두 사람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지만,그들중 어느 누구도 비성흔이 왜 그런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임영옥은 금시라도 쓰러질 듯 몇번이나 휘청거리고 나서야 겨우 흔들리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있었다. 하나 그녀의 안색은 여전히 허연 분을 바른 것처럼 혈색이 전혀 없이 헬쑥해서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였다. 유난히 창백한 그녀의 입술 옆으로 한 줄기 붉은 핏물이 홀러내리니 그 처연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비성흔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꺼질 듯한 목소리였다.

“이것도 종남의 무공이오……?”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끄덕여졌다.

“월녀검법 중의 검화만홍(劍花滿紅) 이에요.”

“그 안에 담긴 기운은? 그것도 종남의……?”

그녀는 말없이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비성흔은 한동안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을 응시하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종남에 이토록 괴이한 무공이 있는 줄은 몰랐군. 너무나 뜨겁고 너무도 차가워……. 검에 이런 기운을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저의 승리요……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그의 커다란몸이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비성흔이 벼락 맞은 고목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자 장내의 여기저기서 다급한 고함과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앗?”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형산파 측에서 몇 개의 인영이 쏜살같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이십대중후반의 청년들로,비성흔의 제자 들이었다. 그들은 황급히 비성흔의 몸을 살피고는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비성흔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몸 전체가 손을 대면 확연히 알수 있을 정도로 차가웠던 것이다.

그들은 비성흔의 몸을 진맥해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았는지 형산파에서 다시 한 사람이 날아왔다.

십여 장의 거리를 훌훌 날아온 그사람을 보자 비성흔의 제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용선생이었던 것이다. 낙일방과의 비무에서 적지 않은 내상을 입고 피까지 토했던 용선생이었지만, 그동안 진기요상을 해서인지 겉으로는 별다른 부상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용선생은 비성흔의 옆에 앉아서 그의 상세를 살폈다. 제일 먼저 그의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댄 용선생은 미약하나마 숨결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 다음에는 부상당한 부위를 살펴보았다. 비성흔의 몸에는 크고 작은 칼자국이 나 있고 적지 않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지만,목숨이 위태로 울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단지 가슴팍 부근에 나 있는 하나의 검흔이 조금 특이해 보일 뿐 이었다.

그 검흔은 옷자락을 자르고 들어가 그의 가슴에 실선같이 가느다란 자국을 남겼다. 다른 상처는 모두 많든 적든 피가 흘러나왔는데,그 부위만 핏기가 없이 실처럼 가느다란선만 그어져 있는 것이 용선생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용선생은 그 검흔에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시린 냉기가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그 냉기의 서늘함에 용선생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깊어졌다.

‘강력한 음한지기 때문에 심맥이 상했군. 다행히 심맥이 완전히 얼기 전에 본 파의 광양신공으로 심맥을 보호했기에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구나.’

용선생은 유연한 동작으로 비성흔의 심장 부위 오개 대혈을 짚어 한 기가 더 이상 몸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손가락이 비성흔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차가운 냉기에 용선생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람의 몸에 이런 냉기를 남길 수 있다니……. 칠음진기인가, 아니면……

용선생은 비성흔의 몸에 긴급 처방을 하여 일단 그의 상세가 악화되지 못하게 한 후 그의 몸을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동안 심유한 눈으로 임영옥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임영옥은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핏기가 없이 창백한 얼굴을 제외하고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차분하고 고아한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던 용선생은 말없이 몸을 돌려형산파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임영옥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진산월이 서 있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그녀는 살짝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종남파 진영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그 모습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종남파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오랜동안 연인 관계였으니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하게 생각했고,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려운 싸움을 이기고 힘이 빠진 사매를 장문인이 부축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 일부 사람들은 진산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걸어오고 있는 임영옥을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종남파의 진영으로 돌아온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려지자마자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니,사실은 이미 진산월의 어깨에 머리를 댄 순간에 반쯤은 의식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혼절한 임영옥을 그녀의 손을 잡은 진산월이 진기로 그녀의 몸을 이끌다시피하여 데리고 온 것이다. 그와중에도 걸음을 옮긴 것은 아마도 그녀 자신도 느끼지 못한 필사의 의지였을 것이다.

동중산이 제일 먼저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다가왔다.

“장문인. 사고께선……”

진산월에게 무언가를 물으려던 동중산은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진산월의 얼굴 표정은 별로 달라진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동중산은 무언지 모를 무거운 중압감에 차마 더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과 어느 때보다 무서운 신광이 이글거리는 그의 얼굴을 도저히 제대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진산월은 임영옥을 자리에 뉘었다.

그리고는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덮을 것을 가져오너라.”

동중산은 쭈뼛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노 신의께 모시고 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전에 먼저 한 가지 할 일이 있다.”

그 음성의 무거움에 동중산의 입에서 절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게 무엇입니까?”

진산월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가로질러 형산파의 진영으로 향했다.

“마지막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본 파가 형산파를 꺾는 장면을 반드시 지켜봐야만 한다.”

동중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목이 메어와 입을 열면 울음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았기에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형산파의 오결 검객을 상대하고 쓰러진 임영옥과 그런 그녀에게 최후의 승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진산월의 마음이 너무도 절절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진산월은 한동안 말없이 형산파를 응시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그의 귓전에 그녀가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기 직전에 속삭였던 음성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낮고 조용한 음성이었다.

“사형이 마무리 지어줘요……”

물론이지.

당연히 마무리 짓고야 말 것이다.

형산파와의 질긴 악연과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기산취악의 악몽을 반드시깨버리고야 말 것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홀렸던 그 많은 땀과 눈물과 피로 얼룩진 세월을 반드시 보상받고야 말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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