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2권 천양현음(天陽玄陰)편 : 5화
제 324 장 현신육결(顯身?結)(2)
고진은 호남성 소양 출신이었다.
대대로 소양의 고가보는 명문세가로 이름이 높았으며,그들중 상당수는 형산파에 입문하여 혁혁한 명성을 떨치는 이름난 검객이 되었다.
고진은 다섯 살 때 처음 아버지에게 무공을 배웠는데,단 하루 만에 복잡한 가전무공의 기본구결을 암기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일곱 살의 생일날에는 많은 하객들 앞에서 고가보의 기초검법인 적하팔검(赤露A劍)을 완벽하게 시연하였고,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은 고가보에 ‘검의천재’가 나타났다고 떠들어댔다.
그 소문을 들은 형산파의 고수 신흥검(投減劍) 저일승(偏티 丹)이 고가보를 찾은 것은 고진의 나이 아흡살 때였다. 저일승은 그때 사결검객중에서 오결의 진입이 가장 유력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저일승은 고진을 면담하고는 그를 제자로 삼았으며,고진은 그 직후 고가보를 떠나 형산으로 들어왔다.
그로부터 육 년 후에 저일승은 오결검객이 되었다. 그의 오결 진입이 예상보다 늦은 것은 그가 고진을 가르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고진의 무재(武才)는 저일승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고진도 이결에 오를 수 있었다. 열다섯 살에 이결에 오르는 것은 형산파에서도 극히 드문일로,그로 인해 형산파의 제자들사이에서 고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고진의 실력은 일취월장하여 불과 서른의 나이에 오결검객이 될 수 있었다. 거칠 것이 없을 것 같았던 고진이 처음으로 좌절을 느낀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조화신검 사견심이었다.
고진이 오결검객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사견심은 한 차례 검무(劍舞)를 선보였는데,그것을 본고진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절묘함을 그 검무에서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태어난 이래줄곧 주위의 추앙을 받으며 승승장구해오던 고진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신이 오결의 말석이기에 오결 중에는 자신의 검을 능가하는 자도 있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 만,그 차이가 이리도 크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고진은 그 즉시 수련에 몰두했고,바깥 출입도 삼간 채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일 년 후,고진은 사견심을 찾아가 정식으로 비무를 신청했다. 그리고 불과 삼십 초 만에 패배를 자인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다시 일 년 동안의 뼈를 깎는 듯 한 고련 후에 고진은 사견심에게 도전했고,이번에는 오십 초를 버틸수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다시 일 년의 혹독한 수련에 들어간 고진은 나름의 자신을 가지고 세 번째로 사견심을 찾아갔다. 사견심은 이번에도 순순히 그의 도전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고진은 불과 이십 초 만에 패퇴하고 말았다. 일 년 전보다 비할 수 없이 실력이 늘었다고 확신했는데,오히려 그때보다 더욱 빠르게 패하고 만 것이다.
그제야 고진은 사견심이 지금까지 자신에게 사정을 봐주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견심이 일 년 전보다 더 빨리 그를 꺾은 것은 더 이상 사정을 봐주지 않으면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고진의 검법이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역설적으로 검법 실력이 좋아졌기에 더 빨리 패하고 만것이다.
지난 삼 년간의 수련은 고진으로서도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노력을 기울인 각고의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사견심의 그늘은 너무나 높고 깊었다.
이제 비로소 그의 진심을 다한 검을 보게 된 고진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그 검을 감당해낼 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산 위에 더 높은 산이 있고 하늘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나, 그 충격은 고진의 몸과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고진은 난생처음으로 검을 놓고 술에 취해 거리를 방황했고,밤마다 목 놓아 울기도 했다. 그런 방황이 한 달째 계속되던 어느 날,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그 사람은 늘 깨끗하고 단정했던 고진의 추레한 몰골을 측은한 눈으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렇게 힘이 드는 게냐?”
고진은 반쯤 풀린 눈으로 무심코고개를 들었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외숙……
그 사람은 고진의 텅 빈 눈을 들여다보고는 이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눈 속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분노나 회한,절망의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싹트는 것이었다. 그런데 절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고진은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빛나고 자신만만했던 고진이 불과 한 달 사이에 이토록 영락(琴落)해 버리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은 고진을 어려서부터 봐왔기에 그가 얼마나자부심이 강하고 자신의 검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가 단 한 번도 부러지거나 좌절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패배는 사람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그것은 그 패배를 극복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고진은 단한 번의 좌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바닥까지 무너져 버린 것이다.
단순히 세 번이나 같은 사람에게 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패배의 과정에서 자신이 상대의 진검(眞劍)조차 제대로 끌어내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 그에게는 더욱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장차 어쩌면 형산파의 제일검객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항상 흐뭇하게 지켜보았던 외조카의 망가진 모습에 그 사람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두 숙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 사람은 빛나는 눈으로 고진을 응시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결연의 빛이 어른거렸으나,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고진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사견심을 꺾고 싶은 것이냐?”
그 음성에 실린 무언가를 느낀 듯 고진은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쳐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고진의 탁하게 흐려진 눈을 쏘아보았다.
“아니면 사견심은 물론 누구라도 능가하는 절세의 검객이 되고 싶은 것이냐?”
“사견심을 꺾으려면 간단하다. 네가 지금 사견심의 나이가 될 때까지 정진하면 그를 꺾을 수 있다. 사견심은 지금 절정의 나이이므로,앞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저물어갈 수밖에 없다. 반면에 너는 십 년,십오년 후가 인생의 절정이 될 것이다.”
고진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고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지만,그 사람은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할지 훤히 알고 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그를 이기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겠지. 그래,그게 바로 고수의 숙명이지. 정당한 실력으로 그를 능가하고 싶은 것이겠지. 그렇다면 과연 사견심을 꺾는 것으로 너는 만족할 수 있겠느냐?”
고진의 텅 비어 있던 눈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희망도,절망도 아닌 야망의 빛이었다.
그 사람도 그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겠지. 누구도 이루지 못한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것이겠지. 예를 들면 육결검객이 된다든지……
육결이라는 말에 고진의 눈에 떠오르기 시작하던 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육결검객이라!
실로 말만 들어도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가 아닌가?
형산파 제자들에게 그 단어는 누구나가 바라지만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상상 속의 경지였다. 사견심을 능가 한다고 육결검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육결검객이 되었다면 사견심을 확실히 능가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사견심뿐 아니라 강호 무림의 수많은 검객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형산파의 모든 제자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고진 또한 그러했다.
그 사람의 입에서 육결검객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고진의 눈빛은 급속도로 빛나기 시작했고,생기를 잃었던 푸석한 얼굴에도 붉은 혈기가 어른거렸다. 그것은 마치 오랜가뭄으로 생명력을 잃고 바싹 말라가던 화초가 내리는 비를 맞고 생기를 되찾아가는 모습 같았다.
그 사람은 그런 고진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조만간 너에게 기회가 갈 것이다.
그 기회를 끝까지 움켜쥘 수만 있다면 어쩌면 너는 네 소망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이 외숙이 네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진은 멍하니 그 사람,용선생 용성음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틀 후, 잠자리에서 일어난 고진은 자신의 머리맡에 하나의 책자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표지에 제목조차 없는 책자에는 반쪽자리 초식 하나가 적혀 있었다.
그 초식을 본 고진은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반 초에 불과했지만,한 번 훌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초식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광세절학임을 충분히 알수 있었던 것이다.
아흡 개나 되는 형산파의 검법 중어느 것도 그 반쪽짜리 검초를 능가하는 것은 없었다.
‘만약 이 검초를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서 익힐 수만 있다면……
시들었던 고진의 가슴에 거대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아울러 그의 뇌리에 며칠 전에 보았던 용선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것이 바로 용선생이 말한 기회일까? 그렇다면 대체 용선생은 어디에서 이 검초를 얻게 된 것일까?
당당한 형산파의 오결검객으로서 출처가 불분명한 검초를 익힌다는것은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평상시라면 고진도 그 점 때문에 몹시 고민스러워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하나의 완성된 초식이 아니라 미완성된 반초짜리라는것에 있었다.
만약 나머지 반초를 형산파의 무공으로 메울 수만 있다면 이 검초는 형산파의 것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는가? 자기 위안에 가까운 생각이었으나,고진은 억지로라도 그렇게 마음을 잡았다. 그만큼 이 반 초의 검법은 놀라운 것이었으며,그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생명선이나 마찬가 지였다.
이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그는 영영 사견심의 뒷모습이나 보면서 과거의 찬란했던 시절을 되새기는 처량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 길로 고진은 축융봉 아래의 고동으로 들어갔다. 누구의 방해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막상 반쪽짜리 검초를 대하고 나자,고진은 그 검초를 완성하는 일이 자신의 당초 예상보다 몇 배나더 험난한 것임을 깨달았다. 검초자체가 워낙 독특한 발상으로 시작한 현오막측한 것이어서 그 나머지 반을 메운다는 것이 너무도 막막했던 것이다.
그 검초는 기존의 어떤 검초와도 달랐고,그 안에 담겨 있는 다양한 변화와 오의 (M義)는 가히 상상을 절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검초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에 못지않은 뛰어난 초식들이 필요했고,그것으로도 완벽하게 메꿀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나 그러한 어려움은 오히려 고진의 투쟁심을 북돋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것은 가히 혁신적인 초식이다.
이 초식을 완성하면 천하제일고수인모용 대협과도 겨루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단 일초의 검법이었으나,완벽하게 완성할 수만 있다면 모용 대협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진은 침식을 잊고 검초의 연구에 몰두했다.
형산파의 구종 검법의 모든 초식이 파헤쳐졌고,심지어는 고가보의 무공을 비롯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무공들이 낱낱이 분해되어 조금이라도 반쪽짜리 검초의 빈 자리를 메꾸는데 동원되었다.
그것은 실로 지난한 일이었으며,수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하는 것이었다.
세월은 그야말로 물처럼 흘러갔다.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반쪽짜리 검보를 손에 쥐고 고동에 들어간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잠깐 눈을 돌려보니 어느새 십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동안 고진은 반쪽짜리 검초에 대한 연구를 거의 마쳤고,그에 대한 보완책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 보완책을 다듬어 반쪽짜리 검초를 하나의 온전한 검초로 만들기까지는 다시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고,그 검초를 완벽하게 터득하기까지는 또다시 몇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결국 그가 그 미완성의 검초를 완성하고 고동을 벗어났을 때는 이미이십 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흐른 후였다. 그것은 당초의 예상을 몇 배나 뛰어넘는 너무도 오랜 세월이었다.
검초를 완성하고 고동을 나온 고진은 묘한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이룬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이었고,수십 년의 세월을 바쳐 자신이 해낸 일에 대한 자부심이었으며,천하의 누구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다른 모습이었다.
때마침 형산파의 장문인이 생일을 맞게 되자 고진은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그 연회장으로 향했다. 이십년 만에 홀연히 나타난 고진을 본많은 형산파의 고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개중에는 예전과 너무도 달라진 그의 모습에 그에게 대체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아해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곳에서 고진은 필생의 숙적이라고 생각했던 사견심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막상 사견심을 대하고 나자 비로소고진은 예전에는 알아보지 못했던 그의 무공수준에 대해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견심을 능가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견심 또한 그것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비무는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고진은 오랜만에 자신의 집인 고가보를 향해떠났고,사견심 또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로 거처에서 두문불출하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몰락한 줄 알았던 종남파가 재건되고 희대의 검객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종남파가 비무행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대강남북을 뒤흔들자 형산파의 장문인은 사람을 보내 고가보에 머물러 있는 고진을 불렀다. 형산파로 돌아온 고진은 정식으로 육결의 자격을 신청했고,비밀리에 치러진 심사에서 자신이 자격이 있음을 훌륭하게 입증해 보였다.
드디어 형산파에 처음으로 육결검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은 철저한 비밀에 부쳐져극소수의 수뇌부만이 알고 있었고,그 후로 형산파는 더 이상 종남파의 비무행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육결검객이 된 고진이라면 능히 신검무적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제 고진은 모든 형산파 제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강호제일검객과 검을 겨루게 되었다.
이십 년간이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친 희대의 검초, 구주파천황(九州破天荒)을 강호무림에 처음으로 선보일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