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2권 천양현음(天陽玄陰)편 : 7화
제 325 장 검적공극(2)
마치 물속을 유영(흉福0하는 것처럼 고진의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그의 손에 들린 검 또한 부드럽고 유연하게 공간을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와 함께 싸늘한 한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진산월은 공격일변도의 초식을 펼쳤다가 무위에 그치는 바람에 많은 허점을 드러냈다. 하나 그것은 상당부분 그 자신이 의도한 바가 컸다.
허점을 노리고 상대의 검이 파고드는 순간,허점은 이미 허점이 아니게 되고 오히려 상대가 진산월의 치명적인 반격을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진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진산월의 몸에 있는 허점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두드러져보였다. 일부러 만든 허점이 진짜허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진산월은 단번에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고진의 검은 그의 전신을 샅살이 파헤치듯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모든 부위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때문에 일부러 만든 허점이 미처 수 습되기 전에 검세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도자기에 난 작은 구멍을 미처 메우기도 전에 도자기가 넘치도록 엄청난 물이 쏟아져 들어와 구멍이 커져 버린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그만큼 고진의 검 속에는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수많은 변화와 다양한 묘용이 담겨 있었다. 설사 진산월이 허점을 보이지 않았더라도 그의 몸 중 가장 방비가 허술한 부분이 약점으로 노출되었을 것이다.
단 일검 안에 이토록 엄청난 변화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 변화의 다양함과 복잡함은 도저히 변초를 풀어내거나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진산월조차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 검초가 어떤 식으로 펼쳐진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고진의 검이 물처럼 부드럽게 움직인다 싶은 순간,온몸의 허점이 그대로 노출되며 전신이 온통 수많은 칼날의 바다 속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대응하든 그검해 속을 헤쳐 나올 수 없을것 같았다.
그 검해가 온통 뼛골이 시릴 듯한 한기로 뒤덮여 있는 것은 아마도 고진의 검이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한 기를 지닌 검 중 하나인 냉염신검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강호행을 시작한 이후,진 산월은 강호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고수들과 적지 않은 사투를 벌여왔다. 담로검 매장원의 검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현란했고,금도무적 양천해의 칼은 전율이 일 정도로 무서웠다.
뿐인가? 음양신마 복양수의 손바닥은 가공스러울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고,천수나타 당각의 암기는 종적조차 찾기 어려워서 처음에는 미처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 강적들을 차례로 격파해온 진산월이었지만,지금 눈앞에 보이는 고진의 검은 그들 중 어느 누구의 무공보다도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느꼈다.
천지가 온통 차가운 한기의 칼날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아서 어디로 움직이든,어떻게 피하든 도저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자신의 몸을 덮어 오는 칼날의 바다를 냉정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러다 수중의 용영검을 세차게 흔들었다. 용영검이 특유의 우윳빛 검광을 뿌린다 싶은 순간,그 검광은 이내수십 개로 불어났다.
주위를 무섭게 짓쳐오는 수많은 검의 바다에 비하면 너무도 작고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하나 그 검광들이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가는 순간,그토록 가공스런 기세로 날아들던 검의 바다가 급격하게 출렁거렸다.
놀랍게도 진산월이 발출한 검광들은 수많은 칼날들을 짚단처럼 잘라버리며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숫자는 고진의 검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검광 하나하나에 담긴 기운이 훨씬 더 강력한 것이 틀림없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직후에 벌어졌다. 검광에 잘라져 사라졌던 칼날들이 다시 되살아나며 흔들리는 듯 하던 고진의 검이 처음의 위세 그대로 진산월을 향해 짓쳐들었던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진산월의 몸이 수많은 칼날에 철저하게 짓이겨져 버릴것만 같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사방으로 확산되었던 수십 가닥의 검광들이 하나로 모여들며 이내 거대한 기둥처럼 변해 버렸다. 그 검광의 숫자가 서른두 개에 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운검봉의 최고 경지인 유운삼십이봉(流雲드十그寒)이 강호 무림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파르르릉!
거대하게 변한 검광과 칼날의 바다가 정면으로 격돌하며 우레와 같은 벽력음이 터져 나왔다. 주위 사방이 온통 경기에 휩싸이며 부서진 돌조각과 흩날리는 먼지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주위의 공기가 일제히 터져나가는 듯한 가공할 압력이 무섭게 휘몰아치며 우적지 일대가 폐허처럼 변해버렸다.
심지어는 비무가 벌어지는 곳에서 십 장 밖에 위치해 있던 작은 정자 마저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오랜 세월 동안 명승으로 유명한 우적지 한쪽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던 정자가 힘없이 허물어지는 광경은 많은 무림인들에게 무언지 모를 상징적인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중인들은 눈을 부릅뜨고 장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욱하게 뒤덮였던 먼지와 돌조각들이 점차로 가라앉으며 장내의 광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으음!”
누군가의 입에서 도저히 억누르지 못하는 듯한 낮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먼지가 걷히며 드러난 광경은 중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바닥은 완전히 뒤집혀진 채 수많은 칼자국이 종횡으로 나 있어 그야말로 폐허를 보는 것 같았다. 그 폐허의 한가 운데 우뚝 서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아아……! 신검무적이다! 신검무적이 승리했다!”
“신검무적 만세!”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함성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고 손이 부서져라 손뼉을 쳐댔다.
진산월은 주위의 엄청난 환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영검을 쥐고 있는 오른손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비단 오른손뿐이 아니었다. 전신에 크고 작은 검흔들이 수십 개가 나 있었고,이마에도 검날이 스쳐서 뜨거운 핏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승리했다.
정말 치가 떨리도록 무서운 상대의 검초를 격파하고 최후의 승자가 된것이다.
그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검정중원 때문이었다.
비록 검정중원을 펼친 것은 아니었으나,검정중원을 익히기 위해 고심했던 그 많은 시간들이 그로 하여금상대의 검해와 같은 일초를 감당할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다. 고진의 검은 검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것이었다.
마치 광활한 검의 바다를 보는 듯 한 그 검초에는 실로 다양한 수법과 변초들이 숨어 있었다. 검정중원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검초들을 연구해 보지 못했다면 그 엄청난 변화의 흥수에 파묻혀 질식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자신 또한 고진의 검과 비슷한 과정을 밟아왔기에 그러한 검초의 흥수 속에 숨어 있는 작은 틈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실낱같이 미세한 아주 작은 틈이었다.
검해는 하나인 것 같았지만 사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성질로 이루어져있었다. 하나가 심해를 보는 듯 거대한 힘을 담은 웅장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면, 다른 라나는 폭풍우 치는 바다 위의 격랑처럼 거칠고 난폭한 것이었다.
그 두 성질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분명하게 달랐고,그 때문에 하나로 완전하게 합쳐지지 못했다.
언뜻 완벽한 것처럼 보였던 검해속에 숨겨져 있는 아주 미묘하고 조그마한 뒤틀림!
그 뒤틀림을 향해 유운삼십이봉을 하나로 모아 쑤셔 넣자 실낱같았던 뒤틀림은 점차로 커져서 마침내 바다 전체를 가르는 거대한 균열이 되고 말았다.
진산월의 고개가 조금씩 쳐들어지며 전면의 한 곳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그에게서 불과 일 장 떨어진 곳에 하나의 시신이 길게 누워 있었다.
그 시신은 고진의 것이었다. 형산파 최초의 육결검객이 자신이 흘린 피바다 속에 누워 있는 것이다.
우습게도 그의 몸에 나 있는 검흔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진산월이 수 십 개의 검흔 때문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그는 가슴에 작은 구멍 하나가 뚫려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진산월이 흘린 피보다 훨씬 많아서 작은 피 웅덩이를 만들어 낼 정도였다.
그 피 웅덩이 속에 잠겨 있는 고진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냉염신검 또한 빛을 잃고 바닥 한쪽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삼십이봉이 하나로 합쳐진 유운검봉의 위력은 진산월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어서 고진의 검초를 파해한 검봉이 그의 가슴을 꿰뚫는 것을 알면서도 검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진산월로서도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형산파의 진형에서 누군가가 나오다가 이내 몸을 멈춰 세웠다.
고진이 이미 숨이 끊어졌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문득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평상시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있는 용선생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늘 혈색이 좋았던 용선생의 안색은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창백하게 핼쑥했다. 그는 피바다 속에 식어가고 있는 고진의 몸을 한참동안이나 쳐다보다가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마주쳤다.
진산월은 이내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몸이 멀어질 때까지도 용선생은 미동도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서는 진산월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자는 용선생뿐이 아니었다.
교리 또한 좀처럼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있었다.
귀호가 그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보아도 신검무적이 펼친건 검정중원이 아닌 것 같네.”
교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호는 입맛을 다셨다.
“쩝. 이번에도 결국 검정중원을 보지 못했군. 검정중원을 쓰지 않고도 형산파의 육결검객을 꺾다니,과연강호제일검객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교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입을 놀려 댔다.
“최강의 검학이라는 검정중원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정말 멋진 격전이 아니었나? 비록 몇 초싸우지는 않았지만,고진의 검초도 그렇고 신검무적의 반격도 그렇고 실로 놀라운 무학들이었네.”
“저런 무공들을 볼 수 있다는 것만 으로도 이번에 무당산까지 달려온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교리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귀호가 달래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말게. 모르긴 해도 오늘 그들이 사용한 수법들은 결코 검정중원의 아래가 아니었을 걸세. 그런 무공들을 두 개나 보았다는 걸로 충분하지 않겠나?”
문득 교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기분 나쁘다니? 내가 왜 기분 나빠한단 말인가?”
그의 반문에 귀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검정중원을 보지 못한 실망감 때문에 꽁해 있었던 게 아니란 말인가?”
“그건 조금 아쉽긴 했지만,그런 걸로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니지.”
“그럼 대체 왜 그런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나?”
“생각할 게 있어서 말이지.”
“무슨 생각?”
“노괴물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서……:,
“노괴물이라니?”
귀호가 황급히 물었으나 교리는 빙글거리며 그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시치미 떼긴. 자네도 짐작하고 있으면서.”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짐작하고 있다니?”
“그렇게 어색해 할 필요 없네. 그정도야 자네가 동행하자고 달라붙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으니.”
이번에는 귀호가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한지 그의 눈빛이 여러 차례 변했다.
교리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지 허공을 올려보며 혼잣말처럼 조용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수작이 헛수고가 된 걸 알게 된 노괴물의 표정이 보고 싶긴한데,그가 다음에 어떤 수를 쓸지 잘 예측이 가지 않는단 말이야. 틀림없이 둘 중 하나일 텐데.”
“그나저나 용선생도 딱하게 됐군.
문파와 아끼는 조카를 위해서 스스로 그 고매한 머리를 숙이기까지 했는데,그게 모두 무용지물이 됐으니 말이야.”
교리는 그때까지도 말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귀호를 슬쩍 돌아보더니 이내 다시 피식 웃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나?”
귀호는 평상시와는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말을 내가 들어도 상관이 없나?”
“왜? 내가 너무 조심성 없게 중얼거린 것 같나?”
“그게……
귀호는 무어라고 말하려 했으나,이내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중요한 일에는 철통 같은 방어를 해오던 교리가 갑작스럽게 허술한 면을 보이자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그런 짐작은 정확하게 맞아떨어 졌다.
교리가 그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작별인사를 고했던 것이다.
“이별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우리의 동행은 여기까지로 하세. 자네와 다니는 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 만,여러모로 재미있는 경험이었네.”
“자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 쪽에서 먼저 규칙을 어기지 않는 한,내가 손을 쓰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세. 인연이 있다면 말이지.”
귀호가 말릴 사이도 없이 교리는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갔다. 별로 빠른 것 같지 않은데, 숨한 번 내쉴 사이에 이미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귀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홀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그는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짊어진 사람처럼 침울한 얼굴로 한참 동안이나 서성거리며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주위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떠나갈 때도 그는 그 자리에 선 채 여전히 움직일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