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3권 회람연회편 : 6화
제 329 장 양공지비(2)
솔직히 진산월은 염화옥수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동안 강일비가 알려준 세 가지 무공에는 각기 다른 비밀들이 숨어있었고 그것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 염화옥수에도 그에 견줄만한 무슨 특별한 비밀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건 강일비는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종남파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십대 제자였던 옥시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네. 그녀는 비선 이전에 종남파 사상 최고의 여고수였고,수많은 종남파의 절학들을 만들어낸 무학(武學)의 일대종사이기도 했네. 하지만 여인의 몸이라는 신분상의 제약과 그녀가 만든 대부분의 무공들이 절전된 탓에 후대에 이르러서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게 되었지.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네.”
강일비가 느닷없이 옥시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진산월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무심결에 물었다.
“염화옥수도 옥시음 조사께서 창안하신 것이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옥시음은 자신이 만들어낸 선녀진향신공의 위력을 극대화시킬 방법을 찾다가 수 공(手功)이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는것을 깨달았네. 그녀는 내공 진력을 손에 집중시켜 강맹한 위력을 투사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고,그것에 화옥수결(花i手談)이란 이름을 붙였지.”
화옥수결은 엄밀히 말하면 완성된무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무공에 대한 개념이었다. 옥시음은 선녀진향신공이 비록 여인들이 익히기에 적합한 음공이기는 해도 기본적인 위력이 여타의 절학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그 음공을 최대한 압축해서 단시일 내에 특정지점을 강하게 가격하는 수법을 이론상으로 정립해 놓은 것이다.
하나 그녀는 화옥수결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그녀의 후인들이 골격만 남은 화옥수결에 살을 붙이고 초식을 보완해서 하나의 제대로 된 무공수법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바로 화영옥수공(花影3E 手功)이었다.
“하나 화영옥수공은 화옥수결 특유의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있었네. 너무 변화에만 치우쳐 옥시음이 애초에 의도 했던 화옥수결 본연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지. 그것을 완전히 뜯어고 쳐서 독보적인 절학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비선이었네. 비선은 그 무공에 염화옥수라는 이름을 붙였는 데,실제로 비선이 염화옥수를 시전하면 아무리 단단한 호신강기라도 종잇장처럼 뚫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이 발휘되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비선 외에 누구도 염화옥수를 익히지 못했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나?”
비선이 염화옥수를 완성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진산월은 한 가지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왜 강일비가 염화옥수에 대한 이야기를 제일 마지막으로 꺼냈는지 짐작할수 있었다.
“칠음진기를 지녀야만 염화옥수를 익힐 수 있기 때문이 아니오?”
강일비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칠음진기가 절정에 달해야만 비로소염화옥수가 나타날 수 있네. 그러지 않은 염화옥수는 화영옥수공과 하등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
칠음진기는 오직 태음신맥을 지닌자만이 완성할 수 있다. 그리고 염화옥수는 칠음진기를 완성해야만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 세 가지의 기묘한 상관관계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진산월은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염화옥수는 정확히 어떤 무공이오?”
강일비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태인장에 비견될 만한 최고의 수 공절학이라고 할 수 있지.”
강일비가 저토록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한 이상 그것은 사실에 가까울것이다. 그런데 왜 염화옥수는 태인장과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을까?
진산월은 그 이유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비선 외에는 누구도 염화옥수를 펼칠 수 없기에 그무공을 제대로 본 사람도 극히 적었을 것이고,자연히 태인장에 비해평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염화옥수를 펼치면 어린아이의 손바닥만 한 작은 꽃 모양 장인이 새겨진다고 하더군. 절정에 이르면 모두 다섯 개로 된 꽃잎 문양이 나타나는데,그 장인에 격중 되면 천근 거석도 구멍이 뚫리고,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도 견뎌내지 못한 다고 했네. 태인장에 비해 강맹함자체는 떨어질지 몰라도 인간을 상대하는 데는 오히려 더욱 무서운 무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린아이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다섯 개로 된 꽃잎 문양 장인!
태음신맥의 소유자만이 익힐 수 있는 극성의 칠음진기가 압축된그 장인의 위력이 어떠할지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이 가는 일이었다.
이제 진산월은 오래전에 실전되었던 종남파의 네 가지 절학에 숨어있는 비밀 이야기를 모두 듣게 되었다. 각각의 비밀들은 놀랍고 신비로 웠지만,또한 서로 간에 묘한 관계로 엮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들을 관통하는 핵심요소는 옥시음과 비선 조심향,그리고 태음신맥이었다. 네 절학 모두 옥시음이 원형을 만들고 비선이 완성을 한 것이며,그중 두 가지는 태음신맥의 소유자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두 가지 무공 또한 태음신맥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혹시 옥시음도 태음신맥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백 년 전의 비선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그보다훨씬 이전에 살았던 옥시음에 대해서는 더욱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조차도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이번에 강일비의 이야기를들은 후였으니,옥시음에 대한 모든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신비로 남아있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야기를 마친 강일비는 잠시 기이 한 빛이 번뜩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침착함과는 다른 냉정함이 엿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진산월은 그가 아직도 자신에게 하고픈 말이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부터 그가 하려는 말이 사실은 그가 진정으로 자신을 만난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일비는 한동안 진산월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의 오래된 비밀을 알게 된 기분이 어떤가?”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이야기 중 일부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네. 자네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말이지.”
진산월은 여전히 강일비의 의중을 몰라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강일비는 그런 진산월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네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드네. 그래서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려하네.”
진산월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제안이 무엇인지 모르지만,자 신의 신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무언가일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뇌리에 엄습했다.
그리고 강일비의 다음 말은 그의 그런 예감을 정확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자네의 사매를 살릴 방법이 있진산월은 표정이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직은 강일비의 의중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흥분으로 날뛰려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내 사매 말이오?”
“그래. 임영옥, 그 아이 말일세. 지금 태음신맥의 음기 때문에 사경을 헤매고 있지 않나?”
진산월은 아무 말 없이 강일비를 쏘아보았다. 강일비는 다시 한 차례어깨를 으쓱거렸다.
“또 그런 눈으로 보는군. 진정 사매를 살리고 싶다면 그 눈을 거두는게 좋을 걸세.”
진산월은 눈길을 거두었다. 마음속으로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난 진산월은 이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사매의 증세를 알고 있소?”
“자네 사매는 태음신맥을 타고났지. 그런데 잘못 격발된 음기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전신이 음기로 가득 차서 생명이 위독하게 된 걸세. 내가 잘못 안 건가?”
“아니,정확하오. 태음신맥의 음기를 제어하는 방법을 알고 있소?”
“태음신맥을 제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뛰어난 음공을 익히는 것일진산월의 눈빛이 자신도 모르게 강해졌다.
“칠음진기 같은 음공 말이오?”
조금 전보다 한층 더 강력한 눈빛이었으나 강일비는 이번에는 그저간단하게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그렇지.”
“칠음진기의 구결을 알고 있소?”
“아쉽게도 전반부의 구결만을 알고 있을 뿐이네. 하지만 이 구결만으로도 칠음진기에 입문할 수 있네.”
“단지 입문하는 것만으로 태음신맥을 제어할 수 있단 말이오?”
“아쉽게도 그건 아니네. 하지만 몸상태가 더 악화되는 것은 막을 수가있네.”
“몸 상태가 더 악화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강일비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자네 사매를 진료한 노방이 그녀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다고 했나?”
진산월은 강일비가 자신의 사매에 대한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경각심이 들었다. 강일비는 그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한두 달의 여유는 있다고 했겠지.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짧을 걸세.”
“어째서 그렇소?”
“태음신맥의 음기는 몸속의 모든 기운을 음기로 변화시켜 버리는 효능이 있네. 그녀가 비성흔을 일격에 격상시킬 정도의 뛰어난 내공을 지니고 있다면,태음신맥의 음기는 곧그 내공을 모두 음기로 바꿔서 더욱강력한 위세를 지니게 될 걸세. 노방은 비록 최고의 의술을 지녔을지 몰라도 내가의 고수가 아니기에 이런 사정을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을 걸세.”
“그럼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된단 말이오?”
강일비는 진산월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길면 열흘,짧으면 닷새에 불과할걸세.”
진산월의 가슴은 커다란 추를 매달은 듯 한없이 무거워졌다.
사실 그는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있을 거라는 노방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나름대로의 방책 한 가지를 생각해 두고 있었다. 칠음진기와 연관이 있을 걸로 의심되는 남해 청조각에 다녀올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나 열흘이라면 아무리 그의 신법이 빠르다 해도 도저히 청조각이 있는 절강성 보타산까지 갈 수가 없었다. 하물며 오 일이라면…….
그의 무표정한 얼굴 한구석에 살짝창백한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강일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칠음진기에 입문하게 되면 그 기간을 적어도 삼 개월 이상 연장할 수 있지. 그동안 자네는 나머지 구결을 얻으면 되는 것이네.”
“나머지 구결은 어디에 있소?”
“그건 자네가 알아보는 수밖에 없네.”
비선의 후예들이 가지고 있소?”
진산월의 거듭된 물음에 강일비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자네가 알아보게.”
진산월은 한동안 강일비를 응시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혹시 신목령의 현음진기가 바로 칠음진기가 아니오?”
만약 그렇다면 칠음진기의 나머지 반쪽을 얻을 방법이 생길지도 몰랐다.
하나 강일비는 고개를 저었다.
“제법 날카롭게 짚었지만,현음진 기는 칠음진기가 아닐세.”
진산월로서는 암담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 이어지는 강일비의 말에 진산월은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음진기는 칠음진기의 변형일세.”
“변형?”
“칠음진기는 오직 태음신맥의 소유자만이 익힐 수 있네. 우연히 칠음진기의 구결을 얻은 누군가는 이 사실이 못내 원망스러웠지. 그래서 태음신맥을 타고나지 않아도 칠음진기를 익힐 수 있는 방법을 오랫동안 모색해왔네.”
“그 결과 칠음진기의 몇 가지 요소를 바꾸어 태음신맥의 소유자가 아니어도 익힐 수 있게 만든 걸세.”
“그게 바로 현음진기란 말이오?”
“그렇지. 현음진기는 절세의 음공이긴 하지만 칠음진기에 비하면 약간의 손색이 있네. 누구나가 익힐수 있는 만큼 범용성은 더 뛰어나지만, 정순함에 있어서는 칠음진기 본연의 위력에 미치지 못하네. 무엇보다 현음진기로는 태음신맥을 제어할수 없네.”
강일비의 말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지만,진산월은 다시 한 가닥 기대를 품게 되었다.
현음진기는 칠음진기를 변형시켜 만든 무공이다. 따라서 현음진기의 주인은 칠음진기의 구결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음진기는 신목령주의 무공이다.
따라서 신목령주를 추적하면 칠음진기의 나머지 구결을 얻게 될지도 몰랐다.
단지 미약한 가능성뿐이었지만,진 산월은 그것만으로도 컴컴한 하늘에서 한 줄기 동아줄을 발견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의 그런 기분을 조롱이라도 하려는 듯 강일비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칠음진기의 전반부 구결을 알려주는 것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네.”
그제야 비로소 진산월은 강일비가 조금 전에 말한 ‘제안’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조건이 있는 교환인 셈이었다.
칠음진기의 전반부 구결을 주고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산월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오?”
강일비의 음성은 낮고 조용했으나,진산월의 귀에는 벼락처럼 크게 들렸다.
“봉황금시를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