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3권 회람연회편 : 7화
제 330 장 금시고사(1)
그녀의 속눈썹은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창백한 얼굴에 핏기 한 점 보이지 않는 입술 때문인지 콧날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거의 들을 수도 없을 만큼 미약하게 홀러나오는 숨결만 아니었다면 차갑게 식어 있는 시신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는 진산월의 마음은 그 자신도 알지 못할정도로 오묘하고 복잡한 것이었다.
금시라도 꺼질 듯한 가느다란 숨소리는 그녀의 지금 몸 상태와 진산월의 심정을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숨결은 방 안의 공기만큼이나 차가웠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또한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산월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빵에 갖다 대었다. 햇골이 시릴듯한 한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 이리도 차가 울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진산월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창백한 뺨을 가만 히 쓰다듬었다.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내려간 그의 손길은 이내 어깨를 지나 팔로 내려갔다.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살아 있는 팔뚝과 하얀손목을 지나니 어느새 그녀의 고운손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유난히 기다란 그녀의 손가락을 어루만지던 진산월의 눈빛이 더없이 침침해졌다. 이 길고 고운 손가락으로 그녀는 그의 손등을 어루만져주고는 했었다. 그리고 진산월은 다른 무엇보다 그것을 좋아했다. 검을 쥐고 무공을 수련하느라 거칠고 투박해진 손등을 그녀의 손가락이 어루만질 때면 자신의 거친 마음이 그녀의 고운 손길에 위안받는 것 같은 편안한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지금 그녀의 손은 예전처럼 곱지 않았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배어있었고,손가락 마디마디에도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작은 상처가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남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검을 휘둘러 왔을 것이다. 그녀가 비성흔과 싸울 때 보여주었던 실력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 진산월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낯선 구궁보의 후미진 구석에서 그녀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검을 휘둘러 왔을까? 그리고 그때 그녀의 심정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절절한 심정을 자신이 아닌 누가 이해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언제인지 모를 그 순간을 위해서 그녀는 돌파구도 보이지 않는 심연의 고독 속에서 홀로 외로이 칼을 갈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의식을 잃은 채 이곳에 누워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녀의 파리한 얼굴을 내려 보고 있다가 그녀의 옆에 정좌해 앉았다. 그런 다음 지그시눈을 감았다. 규칙적으로 내뱉던 그의 숨결이 점차로 잦아들며 깊은 정적이 방안을 감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새벽이 가까워 올 무렵,진산월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더욱 유현해 보였다.
진산월은 아직도 의식을 잃고 있는 그녀의 맥문을 잡았다. 살짝 기운을 불어넣자 꽁꽁 얼어붙은 그녀의 진기가 세차게 반발을 해왔다. 그 기운이 어찌나 차갑던지 진산월의 몸조차 그대로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진산월은 천천히 태을신공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미약하게 홀러나오던 진기가 꽁꽁 언 그녀의 진기를 만나자 한층 더 부드럽게 변했다.
태을신공은 종남파의 무공 중에서 위력은 가장 떨어질지 몰라도 호신에는 탁월한 효능이 있었다.
무엇보다 태을신공의 진기는 유할 뿐 아니라 포용력이 대단해서 어느 진기와도 상충하지 않고 잘 어울렸다. 지금도 임영옥의 몸을 장악하고 있는 태음신맥의 음기가 태을신공의 진기를 거부하지 않고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 다른 무공이었다면 서로 닿는 순간 강한 충돌을 일으켜 그녀의 몸은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임영옥의 몸을 파고든 태을신공의 진기는 얼어붙어 있는 그녀의 혈맥속으로 느릿느릿 스며 들어갔다. 어느 순간,진산월은 태을신공을 천단신공의 호심결로 바꾸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그녀의 몸속에 스며든 진기들이 음기와 전혀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채로 모두 호심결의 기운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그 자연스럽고 빠른 교체는 두 신공에 대한 진산월의 경지가 절정에 이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그만큼 높은 집중력과 심후한 내공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했다.
호심결은 몸을 보호하고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는 천하의 어떤 신공절학보다도 뛰어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호심결이 그녀의 몸에 안착되자 거의 끊어질 듯 가늘어졌던 그녀의 숨결이 점차로 안정되며 그녀의 몸을 무서운 기세로 침식해들어가던 음기의 기운이 한층 약화되었다.
진산월은 맥문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그녀의 머리 위 백회혈을 부드럽게 자극했다. 그러자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 더 강해지더니 이윽고 굳게 닫혔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고 있음을 알고는 즉시 그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가 불러주는 구결대로 진기를 움직여 보도록 해. ‘천부적해(天府的海) 심환이기……’.]
그는 그녀가 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쉴 새 없이 구결을 반복해서 암송했다. 구결의 숫자는 모두 백서 른두 자. 그리 긴 구결은 아니었고,뜻을 이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나 이 단순해 보이는 구결이 보여주는 위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처음에는 백지장보다도 더욱 창백해 보였던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양쪽 뺨을 중심으로 은은한 혈색이 내비쳤던 것이다. 그 변화는 점차로 커져 그녀의 몸 전체로 퍼져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기만이 감돌았던 그녀의 몸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몸 전체를 휘감고 있던 냉기가 급속도로 사라져갔다.
그와 함께 그녀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가며 그녀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한 차례,두 차례 깜박이던 그녀의 눈꺼풀이 다시 감기더니 이윽고 천천히 열려졌다. 다시 나타난 그녀의 눈동자에는 선명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비성흔과의 싸움 이후 의식을 잃었던 그녀가 마침내 깨어난 것이다.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진산월의 얼굴이었다. 담담하면서도 무언지 아련한 빛이 담겨 있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그녀의 눈에 뿌연물기가 차올랐다.
“사형…….,’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쌓여있는데 막상 내뱉으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어린아이처럼 그저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앉고 누운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그녀였다.
“이건 칠음진기의 구결인가요?”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칠음진기의 구결인지 알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구결을 암송하는 순간 그녀는 체내의 진기가 구결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굳게 뭉쳐있던 태음신맥의 음기뿐 아니라 예전에 익혔던 태을신공의 진기까지 자연스레 구결을 따라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구결이 태을신공과 같은 원류의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종남파의 무공 중 태음신맥의 음기를 다스릴 수 있을 정도의 음공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이미 오래전에 절전되었던 칠음진기의 구결을 얻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더할수 없이 영롱한 눈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그녀에게 강일비를 만난이야기를 해주었다.
천수나타 당각과의 싸움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불쑥 나타난 의문의 사나이. 그에게서 무염보의 후반부 여섯 걸음을 전해 받고,다시 찾아온 그에게서 종남파의 실전된 네가지 절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까지의 과정을 차분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그녀는 침묵을 지킨 채 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문의 사나이가 오래전에 사라졌던 종남파의 전대고수인 강일비였으며,그가 마지막으로 봉황금시를 조건으로 칠음진기의 전반부 구결을 알려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녀는 놀라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진산월이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녀는 천천히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런 동작으로 자신의 머리위를 만졌다.
그녀의 손에 봉황 문양의 비녀 하나가 쥐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봉황금시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와의 조건을 수락했군요.”
“그래. 우선 구결을 받고 물건은 내일 주기로 했어.”
“하지만 이 물건은……:,
“알아. 우리 것이 아니지. 하지만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 필요는 없어.”
그녀는 봉황금시를 만지작거리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 공자가 실망하겠군요.”
“그를 실망시키는 게 싫어?”
진산월이 짐짓 추궁하는 눈으로 물어보자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뜻이 아니라는 건 사형도 잘알잖아요. 다만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
에요.,,
진산월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져 왔던 것이다.
모용봉에게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다니……. 그녀는 지금까지 그런 마음으로 구궁보에서 사 년의 세월을 지내온 것이다.
대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갖게 했을까?
한동안 장내에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임영옥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앉아 있는 진산월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그게 무언데요?”
진산월은 임영옥의 손에 들린 봉황금시로 시선을 돌렸다.
“모용봉은 왜 이 물건을 사매에게 맡기려고 그렇게 애를 썼을까 하는생각.”
“그가 내게 이걸 맡긴 것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세요?”
“그러지 않았으면 굳이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유를 대면서 사매에게 반강제로 떠안기지는 않았을 거야.”
모용봉이 임영옥에게 봉황금시를 준 것은 그녀가 진산월을 만나기 위해 구궁보를 벗어나려 할 때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봉황금시를 노린 세력들에 의해 여러 차례 위기에 처했고,진산월과 천봉궁의 도움으로 간신히 무사할 수 있었다.
구궁보로 복귀한 후 그녀는 봉황금시를 모용봉에게 돌려주려 했으나, 모용봉은 중추절까지 그것을 몸에 지니고 있다가 돌려달라며 봉황금시를 돌려받지 않았다.
모용봉이 단순히 봉황금시를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증표로 생각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라는 건 임영옥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길이 없었다.
“봉황금시는 정말 이상한 물건이야. 그 자체는 아무런 효능도 없는 데,단지 천룡궤의 열쇠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노리는 천하의 기물이 되었지. 그런데 내가 천룡궤를 구궁보로 가져가자 모용봉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매가 돌려주려는 봉황금시를 돌려받지 않고 구궁보밖으로 나가게 했어. 천룡궤를 열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지척에 있는 데도 말이지.”
진산월의 음성은 담담했으나,주위가 워낙 조용해서 임영옥의 귀에는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한 마디로 모용봉은 천룡궤가 열리기를 바라지 않았던 거야. 그의 말대로라면 천룡궤에 모용 대협의 무공에 버금가는 놀라운 절학이 담긴 취와미인상이 있을 텐데도 말이지. 왜 그는 그런 선택을 해야 했을까?”
임영옥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상한 일은 또 있어. 천수관음은 구궁보에 있는 모용 대협이 가짜라고 말했는데,모용 대협을 지척에서 모시는 모용봉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만약 천수관음의 말이 사실이라면,모용봉이 천룡궤가 열리기를 바라지 않는 건 혹시라도 그 안의 물건이 가짜 모용대협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
만약 그렇다면 모용봉이 사매에게서 봉황금시를 돌려받지 않고 중추절운운한 이유가 설명이 돼. 모용봉은 중추절까지만 천룡궤 안의 미인상이 가짜 모용 대협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 뒤의 일은 어찌 되든 좋았던 것이겠지.”
“결국 봉황금시는 단순히 가짜 모용 대협의 시선을 우리에게 돌리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던 거야. 그러니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더 이상의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는 거지. 우리는 이미 봉황금시로 인해 중분?}고통과 위험을 받아왔어. 그러니 그것을 넘기는 것에 너무 마음을 두지마.”
임영옥은 한동안 봉황금시를 어루만지고 있다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작은 물건에 그토록 많은 비밀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군요. 사형은 강 사백이 봉황금시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동안 봉황금시를 주로 노려왔던 세력들은 쾌의당과 신목령인데,이 번에는 오래전에 실종되었던 강일비까지 가세를 한 거야. 아마 그도 그들 중 어딘가와 손이 닿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봉황금시가 원래의 주인 손에 있었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거지. 나는 지금도 의문을 가지고 있어. 봉황금시가 외부로 유출된 것이 과연 순전히 우연한 것이었을까? 누군가의 의도가 담긴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지.”
임영옥의 표정이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형은 봉황금시의 원주인인 천봉궁에 무슨 의도가 있을 거라고 의심을 하시나요?”
“봉황금시는 원래 석가장의 전전대장주인 천룡객 석동의 물건인데,석동은 이것을 연인인 백모란에게 주었지. 그런데 백모란의 품에 있어야 할 봉황금시가 갑자기 외부로 유출되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다가 동중산에게 전해졌어. 나는 나중에 동중산에게 봉황금시를 얻게 된 자세한 경위를 전해 들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