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3권 회람연회편 : 8화
제 330 장 금시고사(2)
진산월은 자신이 예전에 동중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 년 전에 동중산은 강호를 유랑중에 부상을 입은 중년인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 중년인은 가슴뼈가 거의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그 와중에도 동중산이 다가가자 경계심을 표하며 그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동중산은 그 중년인이 과거 안면이 있는 만리운연 황동임을 알아보았다. 황동은 하남성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는 고수로,신법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 외의 무공은 그리 특별하지 않은 실력의 소유자였다.
동중산은 황동을 떠나는 척하며 그의 주위에 몰래 숨어 있다가 황동이 의식을 완전히 잃은 후에야 비로소그에게로 접근했다. 그리고는 황동의 몸을 뒤진 끝에 그의 품속에서 작은 옥함 하나를 찾아냈다.
그 옥함 안에는 봉황 문양의 장식용 비녀 하나가 담겨 있었는데,한 눈에 그 비녀가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아본 동중산은 비녀를 챙겨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인 황동의 곁을 황급히 떠났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뒤를 추적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이내 그들에게 몇 차례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그들의 입을 빌어서야 동중산은 자신이 황동의 품에서 가져온 물건의 명칭이 봉황금시이며,그것을 노리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의 일은 임영옥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추적에 쫓기던 동중산은 용문의 석굴 앞에서 우연히 종남파의 고수들을 만나게 되었으며,추적을 피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종남파의 제자가 될 것을 자청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는가?
당시 동중산의 의도는 불순한 것이었으며,그의 입문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종남파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많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동중산은 진정한 종남파의 제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 과정의 우여곡절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동중산의 말을 듣고 몇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지. 첫째는 동중산이 황동의 품에서 봉황금시를 가져간 것을 어떻게 알고 많은 고수들이 그의 뒤를 쫓아 왔느냐는 것이었고,둘째는 동중산이 비록 잔재주가 많다고 하지만 변변치 않은 실력으로 어떻게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용문까지 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지. 그리고 셋째는 그가 빈사지경에 처한 황동을 발견한 것이 과연 순수한 우연인 것일까 하는 점이었어.”
진산월이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임영옥의 표정은 조금씩 심각하게 굳어 졌다.
“사형은 동 사질이 봉황금시를 얻게 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봉황금시가 동중산의 손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고 해야겠지. 봉황금시는 백모란의 신물로,천봉궁의 궁주가 모용 대협에게 선물한 물건이야. 그런데 모용대협의 손에 있어야 할 물건이 어떻게 외부로 유출되어 황동의 손에 들어갔는지 의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황동을 빈사지경에 처하게 한 자가 그의 품에 있는 봉황금시를 그대로 두고 가버렸다는 점이야. 이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면 봉황금시가 모용대협의 품을 떠나 동중산의 수중에 들어올 때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어딘지 모르게 작위적이고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임영옥은 그의 지적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사형의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한 구석이 있긴 하군요.”
“천하에서 모용 대협의 품에 있는 물건을 빼앗거나 훔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다고 봐야지. 그렇다면 모용 대협이 일부러 봉황금시를 유출했다는 것인데,그건 무림에 알려진 모용 대협의 품성이나 그 후의 결과를 볼 때 거의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지.”
동중산이 가져간 봉황금시를 회수하기 위해 천봉궁의 천봉선자들이 상당수가 강호로 나왔을 뿐 아니라,나중에는 모용봉까지 소림사로 와서 결국은 봉황금시를 회수해 갔다. 모용 대협이나 천봉궁에서 일부러 봉황금시를 외부로 유출시켰다면 그러한 헛수고를 할 리가 없었다.
“사형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나는 모용 대협 쪽에서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봐.”
임영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사형은 모용 대협이 일부러봉황금시를 유출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천수관음은 지금 구궁보에 있는 모용 대협이 가짜라고 확신하고 있어. 그녀의 말이 맞는다면,진짜 모용 대협은 가짜에 의해 살해되었거나 구금되어 있을 거야.”
“둘 중 어느 쪽이라고 보세요?”
“모용봉은 모용 대협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을 거야. 그럼에도 그런 상황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진짜 모용 대협은 구금되어 있거나 인질로 잡혀 있을 가능성이 커. 그러니 모용봉으로서도 가짜 모용 대협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중요한건 모용 대협이 가짜로 바뀌게 된시점이 바로 사 년 전이라는 거야.
다시 말해서 시기적으로 보면 모용대협이 가짜로 바뀐 다음에 그의 품에 있던 봉황금시가 외부로 유출된
거지.,,
임영옥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 전에 사형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군요. 사형은 진짜모용 대협이 가짜로 바뀌는 과정에서 봉황금시가 외부로 유출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군요?”
“그래. 모용 대협이 가짜에게 당하기 직전에 그랬는지,아니면 가짜가 모용 대협을 쓰러뜨린 다음에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어쨌든 봉황금시는 둘 중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외부로 유출시켰던 게 분명해.”
“만약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봉황금시는 천룡궤를 여는 열쇠외에는 특별한 용도가 있는 물건이 아니야.”
“하지만 천룡궤는……
“봉황금시가 유출될 당시 천룡궤를 가지고 있던 사람은 철혈홍안이었어. 하지만 봉황금시는 다시 모용봉의 손으로 들어갔지. 그리고 사 년후에 이번에는 그녀가 천룡궤를 외부로 내보냈어. 나를 통해서 말이야.”
“봉황금시는 천룡궤를 여는 열쇠일뿐이고,천룡궤는 봉황금시가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평범한 궤짝일 뿐이야. 다시 말해서 두 물건은 함께 존재해야만 비로소 그 가치가 있는 물건들인데,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두 물건들이 만나지 못하게 작용하는 어떤 힘이 존재하는 것같아. 사 년 전에 봉황금시가 강호로 떠돌게 된 것도,사 년 후에 천룡궤가 다시 강호에 나타나게 된 것도 모두 그 속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의도가 숨어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도에 놀아나거나 희생되어 버린 것이고.”
“그건 너무 속상한 이야기로군요.”
임영옥은 살짝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그 미소 속에는 한 없는 씁쓸함과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 봉황금시와 천룡궤로 인해 종남파와 진산월이 겪었던 그 많은 시련과 고통들이 모두 누군가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면 그건 너무도 분통스럽고 이가 갈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나 담담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 속에는 차갑게 가라앉은 불길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한없이 냉정하면서도 맹렬한 분노를 담고 있는 불길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생각했지. 만약 누군가가 그토록 봉황금시와 천룡궤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라면,그 의도를 꺾고 봉황금시와 천룡궤를 만나게 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고 말이지.”
“사형……
“단순히 칠음진기의 구결을 얻기 위한 요구 조건 때문이 아니야. 봉황금시는 이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해. 사매의 손을 떠난다면 머지않아 봉황금시와 천룡궤는 반드시만나게 될 거야.”
임영옥은 그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사형은 강 사백이 가짜 모용 대협에게 봉황금시를 가져가리라고 생각하나요?”
“지금 봉황금시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그자야. 그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봉황금시를 입수하려 하겠지. 강일비가 자기 손으로 가져다주든 그렇지 않든 봉황금시는 조만간에 반드시 그자의 손에 들어가게 될 거야.”
“그것을 알면서도……
임영옥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 진산월의 입에서 여느 때보다 더욱 가라앉은 음성이 홀러나왔기 때문이다. 그 낮은 음성속에 담긴 결연함은 임영옥으로서도 좀처럼 보지 못한 강렬한 것이었다.
“그래. 이것으로 봉황금시와 천룡궤로 우리를 농락한 누군가에게 한 방 먹일 수 있겠지. 그리고 그들의 숨은 의도를 깨는 순간,우리는 비로소 그동안 우리를 무겁게 짓눌러왔던 봉황금시와 천룡궤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다음 날 아침, 악자화의 방문을 두드렸던 진산월은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는 것을 알고 방문을 열어 보았다.
텅 빈 방안에는 쓸쓸한 공기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악자화가 머물렀던 흔적은 누군가가 누워있던 형상이 역력히 남아 있는 침상뿐이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다가가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악자화가 떠난 지 오래되었는지 한 점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은 침상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자신이 나간 후 악자화는 이곳에 홀로 누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치 않은 몸으로 아무런 기별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그의 심정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는 이제 신목령에서도 외로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솔직히 진산월은 그의 가슴 속에 종남파로 돌아오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은근히 기대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나 온기 잃은 침상만큼이나 텅 빈 공간은 그의 그런 마음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침상 위에 앉은 채 무심코 눌린 흔적이 남아 있는 베개를 만지던 진산월은 문득 베개 밑에 삐죽 나와 있는 작은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베개를 치우자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산월은 종이를 펼쳐 보았다. 두서없이 써내려간 듯 잔뜩 흘려 쓴글씨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오래전에 보았던 악자화의 필체였다.
〈강호의 바람이 정말 차갑군.
이제는 제법 강호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었는데,그건 나의 오만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에게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 못내 씁쓸하구나.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못다 간 칼이 있고,이루지 못한 꿈도 남아 있다.
일전에 아주 우연히 이상한 말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말인 줄 알았는데,이런 꼴을 당하고 나니 혹시라도 그때의 일로 인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현음진기의 비밀을 캐려는 게 발각되어 그런 줄 알았는데,하룻밤 동안 꼬박 머리를 굴려 보아도 그것이 십 년 가까이 신목령에 충성을 다한 나를 이런 꼴로 만들만한 중차대한 비밀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일의 진정한 내막을 추적해 보려 한다.
만약 내 예측이 맞다면,이십 년전의 기산취악이 벌어진 진정한 배후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내 예측이 틀린 것이라면?
강호의 바람이 어디까지 차가워질 수 있는지를 좀 더 생생히 느끼게 되겠지.
창문 너머 움터오는 새벽의 여명이 마치 그날 같구나.
종남산을 내려오던 그 날의 아침같아. 그날의 공기,그날의 풍광,그날의 하늘이 지금도 선명하게 그려지는구나. 더불어 그날의 각오
5-?.
이번에는 반드시…….〉
악자화의 글은 이렇게 끝이 났다.
진산월은 한동안 묵묵히 악자화가 남긴 서신을 몇 번이고 읽어 보았다.
그리고 끝내 맺지 못한 마지막 부분을 조용히 뇌까려 보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 글을 쓸 때의 악자화의 심정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파리한 안색에 초췌한 몰골을하고 있어도 예리한 빛을 잃지 않던 그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악 형……
진산월은 서신을 움켜쥔 채 텅 빈허공의 한 점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치 그곳에 악자화가 있는 듯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그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심중의 말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아직도 당신을 기다리고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