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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36화


제 336 장 흑암중광(1)

낙일방은 문득 눈을 떴다.

짙은 어둠이 사위를 감싸고 있었다.

잠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그날 이후 낙일방은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잠 못 이루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생활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유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이제 날이 밝으면 파란만장한 풍운의 무대였던 무당산을 떠나 종남산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왔던 형산파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본 파로 복귀하는 여정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낙일방의 마음은 심란하기만 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일이 코앞의 현실처럼 눈앞에 선연하게 떠오르곤 했다.

구반장법의 세 가지 연환수법 중가장 무서운 삼전을 펼칠 때만 해도 낙일방은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초식들을 연계해 펼칠 때의 시기가 실로 적절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어딘가 미흡해서 완벽하게 이어지지 못했던 세 가지 초식들이 모처럼 매끄럽게 연환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평온함을 잃지 않았던 용선생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헬쑥하게 굳어졌던 것만 보아도 자신의 공격이 얼마나 시의 적절하고 날카로웠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용선생은 양손을 마주쳐 박수를 치는 것만으로 삼전의 공세를 막아냈다. 그것이 형산파의 수공중 최고봉인 유혼십이수의 마지막절학인 쌍혼합벽임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비록 삼전을 막아내긴 했으나 용선생의 내력은 크게 진탕되었고,끓어오르는 몸속의 기운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 크게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이 순간이 아니면 그를 이길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에 낙일방은 목구멍을 치밀어 오르는 선혈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무조건 그를 향해달려들었다. 그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공인 태인장을 내갈겼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에게는 너무도 참혹한 것이었다.

‘그때 내가 승부를 걸었던 것이 너무 섣부른 결정이었을까?’

낙일방은 그때 이후 몇 번이고 그생각을 곱씹어 보곤 했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내기가 흔들린 용선생을 상대로 좀더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어쩌면 승패를 뒤바꿀 수 있었을지 몰랐다.

태인장을 펼치기 전에 낙뢰장법의 일점천뢰나 구반장법의 연환삼수로 그를 좀 더 흔들었다면 아무리 용선생이라도 이어지는 태인장의 위력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을지 몰랐다.

하나 그때마다 낙일방의 뇌리에는 태인장의 경력 속을 가르고 들어오던 몇 가닥의 섬광이 떠올랐다. 산악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태인장의 가공할 공세 속을 무인지경으로 찢고 날아들던 네 가닥의 섬광!

그것들은 낙일방의 어깨와 옆구리에 네 개의 피구멍을 만들고 사라져버렸다.

그 섬광들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낙일방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팩젖어들었다. 자신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섬광들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다는 절망감이 전신을 휘감았던 것이다.

월광조산하!

일명 월광지라고도 불리는 그 지공은 용선생을 무림구봉의 일인으로 만들어준 전설적인 절학이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나머지 네 손가락을 탄주하듯 조종하여 쏘아 보내는 그 놀라운 무공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당금 강호의 제일지공(第一指功)이라 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무공에 진 것은 결코 억울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 만,그 말은 낙일방에게는 아무런위로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종남파 필생의 숙원인형산파와의 싸옴에서 자신이 패했다는 것이며,지금 현재 그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그 지공을 격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형산파와의 비무는 결국 장문사형과 사저의 활약으로 종남파의 승리로 돌아갔지만,낙일방은 남들처럼 속 편하게 그 승리를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종남파 전체의 분위기는 승리를 거둔 문파답지 않게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편이었다. 좌군풍에게 패해 기식이 엄엄했던 육천기가 겨우 위급한 순간을 넘기고,정신을 잃고 혼절해 모든 사람을 걱정스럽게 했던 임영옥이 다시 의식을 되찾은 후에도 그런 분위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낙일방은 임영옥이 정신을 차렸다는 말을 듣고도 한동안 그녀를 만나러 가지 못했다. 그녀가 당한 부상이 자신의 패배로 인해 벌어진 일같아서 도저히 그녀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동중산이 세 번이나 찾아온 다음에야 겨우 낙일방은 용기를 내어 어젯밤에 비로소 그녀의 방문을 두드릴수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여전히 초췌했고,핏기 한 점 없는 입술은 병자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사저……

낙일방은 그녀의 파리한 얼굴을 보다가 겨우 그 말만을 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그를 가만히 보고 있더니 한참 후에야 속삭이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낙 사제,고개를 들고 나를 봐.”

낙일방은 간신히 고개를 쳐들었다.

유난히 깊고 영롱한 그녀의 눈빛과 시선이 마주치자 낙일방은 더 이상견디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그의 머리 위로 들려왔다.

“호호. 나 보기가 그렇게 부끄러운거야?”

낙일방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선생과 싸울 때의 사제는 그렇게 멋지고 듬직해 보였는데,지금은 부모님이 아끼는 화병行E補)이라도 깬 어린아이 같구나.”

“낙 사제.”

그녀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낙일방은 조그맣게 대답했다.

“예……

“사제는 정말 잘해주었어. 사제가 최선을 다해서 맞서 주었기에 나도 겨우 용기를 낼 수 있었어. 사실 난 그때 조금 무서웠었거든.”

낙일방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막냇동생을 바라보는 누이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형산파의 오결검객 중에서도 사납기로 소문난 절영검과 싸운다고 생각하자 손발이 떨리고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두려움이 몰려왔어. 난 그런 절정검객과 제대로 검을 맞대고 겨루어 본 적도 없고 피비린내나는 살벌한 싸움을 한 적도 없어서 더욱 두렵고 걱정이 되었지.”

‘그런데 그때 사제가 용선생과 싸우던 장면이 떠올랐던 거야. 사제는 자기보다 몇 배나 나이를 먹고 이미강호의 전설이 된 절세의 고수와 싸우면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어.

오히려 용선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최고 절초를 펼치고도 피를 토하게 만들었지.”

임영옥은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낙일방을 응시하며 낮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 사제의 모습을 떠올리자 갑자기 거짓말처럼 마음속의 두려움이 사라지며 눈앞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어. 상대가 무시무시한 형산파의 오결 검객이라는 생각보다는 충분히 자웅을 겨루어 볼 만한 한 명의 고수라는 생각이 들게 된 거지.

그래서 비로소 용기를 내어 나설 수 있었던 거야.”

“사저……

“그러니 이제 화병을 깨고 혼이 날까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숙이지 말고 어깨를 펴고 떳떳한 얼굴로 고개를 쳐들어. 사제는 내게는 어떤 사람보다도 훌륭하고 멋진 최고의 영웅이니까.”

낙일방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조그만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되물었다.

“제가 영웅이라고요?”

임영옥은 유난히 길게 늘어진 속눈씹을 천천히 깜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뿐만 아니라 본 파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

낙일방은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임영옥을 하염없이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임영옥은 그런 낙일방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낙일방은 그녀의 방을 나올 때까지 더 이상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자마자 자리에 누운 채 잠을 청했던 것이다.

하나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사저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지난 며칠간 그토록 자신을 괴롭게 했던 용선생의 지공은 더 이상 뇌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낙일방은 더 이상 누워있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을 꼬박 지새웠음에도 전혀 졸립다거나 머리가 무겁지 않았다.

낙일방은 주섬주섬 옷을 입은 다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주위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멀리 거무스름한 산등성이 너머로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희미한 여명이 조금씩 움터오고 있었다. 낙일방은 우두커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공터 한복판에 서서 천천히 몸을 풀더니 구반장법의 초식들을 느릿느릿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새벽의 공기는 제법 차가웠지만,그만큼 신선하고 청량했다.

구반장법은 낙일방이 알고 있는 무공들 중 가장 복잡하고 현묘했으며 위력적이었다. 또한 그만큼 익히기가 힘들었다.

낙일방의 현재 구반장법에 대한 성취는 칠성을 넘어 팔성에 가까워 오고 있었는데,그래서인지 어둠을 가르는 그의 손길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면서도 변화무쌍했다. 이조차도 낙일방이 어깨와 옆구리의 부상 때문에 공력을 전혀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로 펼쳤기 때문이었다.

구반장법을 펼칠수록 낙일방은 점점 그 신묘함에 빠져들어 갔다. 머릿속이 명경지수처럼 맑아지며 그동안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던 모든 괴로움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낙일방은 질리지도 않은지 몇 번이고 계속해서 구반장법의 초식들을 반복해서 펼치고 또 펼쳐냈다.

그가 막 구반장법을 네 번째로 펼치기 시작했을 때,누군가의 차가운음성이 들려왔다.

“자지 않고 꼭두새벽부터 무슨 청승이냐?”

낙일방은 천천히 손을 멈추었다.

온몸이 흐르는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기만 했다.

낙일방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정원 한쪽에서 전흠이 특유의 퉁명스런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낙일방은 자세를 똑바로 한 채 그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전 사형,평안히 주무셨습니까?”

“네가 그렇게 요란 법석을 떨고 있는데 내가 편히 잠들었을 것 같으냐?”

낙일방의 연무는 공력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별다른 소음이 나지 않았으나, 낙일방은 굳이 그 점을 들먹이지 않고 살짝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이 오지 않아잠시 수련을 한다는 게 사형의 숙면을 방해하고 말았군요.”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무슨 걱정거리가 그리도 많기에 잠도 안 자고 새벽부터 설친 게냐?”

그렇게 말하는 전흠의 나이도 낙일방보다 불과 두 살이 많을 뿐이었다.

비단 그뿐 아니라 전흠 또한 며칠째 잠들지 못하는 신세인 건 마찬가 지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른 새벽부터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정원한쪽을 서성거리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홈의 두 눈은 퀭하니 들어가 있었고,양쪽 뺨도 홀쭉해서 가뜩이나 강퍅하고 사나운 외모가 한층 더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눈빛 또한 험상궂게 변해 있어서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것 같은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전흠이 이렇게 변한 것은 모두 형산파와의 비무가 끝난 후부터였다.

아니,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성흔을 상대할 자신이 없어 스스로 출전을 포기한 후부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형산파에 설욕할 날을 기다리며 십여 년간 칼을 갈아왔던 자신이 막상일이 닥치자 상대를 이길 자신이 없어 물러나고 말았으니,그가 느꼈을 자괴감과 수치심이 얼마나 거대한지는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막상 그의 고통이 얼마나 심대한지는 그 자신 외에는 누구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자신도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날 이후 전홈은 주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한 채 자신의 방에 처박혀 칩거하고 있었다. 그런 전흠이 안타까워 동중산을 비롯한 종남파의 고수들이 차례로 그를 방문하여 위로했으나,전홈은 그때마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전홈이 밤이 되면 잠들지 못하고 어두운 산속을 서성이는 것을 모두들 알면서도 쉬쉬하고 있었다.

그런 전흠이 자신처럼 불면의 밤을 보내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새벽 연무에 나선 낙일방과 만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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