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39화
제 337 장 고택풍운(2)
마적풍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다시 말씀해주시겠소?”
“서장십육사 중에서도 사람을 잘쳐 죽이기로 유명한 적금쌍마가 있는 곳이 바로 저기냐고 물었소.”
마적풍의 두 눈에 기광이 번뜩거렸다.
“어떻게 아셨소?”
백의 청년의 얼굴은 처음과 변함없이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산수재가 이곳으로 사람을 보낸다고 했는데,이곳에서 우리를 찾아온사람은 당신뿐이었소. 그런 당신이 굳이 한적한 벌판 한쪽의 인적이 끊긴 고택으로 우리를 안내하기에 짐작했던 거요.”
마적풍은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언가를 느낀 둣 가벼운 탄성을 토해냈다.
“과연 대단한 통찰력이시오. 아,그럼 아까 음식점에서 일부러 기운을 뿌려 일반인의 접근을 막았던 것은 혹시……
“산수재가 보낸 사람이라면 그 정도 기운쯤은 능히 뚫고 다가오리라생각했던 거요.”
“어쩐지. 그래서 유독 그곳에만 빈자리가 남아 있었던 것이었구려.”
마적풍은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정색을 하고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나는 마적풍이라 하오.”
“이제 보니 이십팔숙 중에서도 재주가 많기로 유명한 신호 마대협이셨구려. 반갑소. 종남의 진산월이오.”
마적풍은 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강호를 위진 시키고 있는 신검무적 앞에 서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몸이지만,당분간 진 장문인을 모시게 되었소. 모자란 점이 있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소.”
“별말씀을. 나야말로 마 대협의 신기묘산과 기묘한 솜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소. 이번에 단단히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미리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소.”
이어 진산월은 한쪽에 멀뚱하게 서 있는 흑의 청년을 가리켰다.
“이쪽은 내 사제인 전흠이라 하오.
전 사제,마 대협께 인사 드리게.”
흑의 청년,전흠은 짤막하게 인사를 했다.
“종남의 전홈이오.”
약간은 무뚝뚝한 그 모습에도 마적풍은 전혀 거리낌 없이 환한 웃음을 보냈다.
“폭뢰검객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소. 모쪼록 그 무시무시한 검이 나를 향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려. 하하.”
시종일관 자신을 낮추며 겸손을 멸었지만,마적풍은 사실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성숙해를 지탱하고 있는 이십팔숙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고수였으며,특히 지모가 탁월하고 다양한 방면에 걸 쳐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있어서 무척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무당파를 떠나기 전 이정문은 선반의 일차 집결지인 낙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흑갈방의 전초 세력 몇군데를 제거할 것을 제의했으며,진 산월이 이를 승낙하자 하남성의 초입인 맹가루에 사람을 보내 여정을 돕겠다고 했다.
이정문이 뚜렷하게 누구를 어디로 보내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예측대로 맹가루의 한 주루에서 자신을 향해접근하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정문이 보낸 사람이 마적풍이라는 것은 진산월로서도 다소 뜻밖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적풍은 신호라는 별호 그대로 정말 재주가 많고 두뇌가 비상한 인물이어서 단순히 길 안내나 하기에는 지나친 인선(人選)이었던 것이다.
이정문이 제일 먼저 지목한 목표가 바로 적금쌍마였다.
적금쌍마는 한때 신강성 일대를 공포에 떨게 했던 무시무시한 흉인(兄人)들로,서장의 마인들인 십육사중에서도 잔인하기로 손에 꼽히는 인물들이었다. 결국 그들의 악행을 보다 못한 십육사의 최고수인 서천노사가 나서서 그들을 아미금산(阿獨金 0J)이북으로는 활동할 수 없게 쫓아내 버렸다.
아미금산과 청해성 일대에서 쥐죽은 둣 보내던 적금쌍마의 모습이 불현듯 중원의 하남성에 목격된 것은 불과 한 달 전의 일로,그 소식을 접한 이정문으로서는 크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중원에서 무슨패악을 저지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끝이 쭈뼛했던 것이다.
그들이 하필이면 하남성과 호북성의 경계인 맹가루에 머물러 있고,하필이면 당대 최고의 검객인 신검무적이 무당산을 떠나 하남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는 것은 이정문에게는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자신의 최측근인 이십팔숙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마적풍을 진산월에게 보낸 것은 적금쌍마에 대한 이정문의 그런 의중을 여실히 드러내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금쌍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기회에 처단해야 한다. 그들이 중원에서 어떠한 해악이라도 저지르는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그것이 이정문의 단호한 결심이었다.
마적풍은 적금쌍마의 현재 상황에 대해 자신이 아는 바를 소상하게 밝혔다.
“적금쌍마가 이 인적도 드물고 아무도 살지 않는 팽가고택에 머무른것을 알게 된 건 이십여 일 전쯤의 일이오. 예전에는 간혹 팽가고택을 찾는 유람객들이 있었는데,언제부터인지 팽가고택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소. 처음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우연한 기회에 팽가고택에 간 유람객들의 모습이 그 뒤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진산월은 묵묵히 마적풍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암암리에 팽가고택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자연히 유람객들이 그쪽으로는 가지 않게 되었던 거요. 그 소문을 접한 누군가가 호기심에서 은밀히 팽가고택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적금쌍마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요. 그 사람은 텅텅 비어 있을 줄 알았던 팽가 고택에 몇 명이 몰래 숨어 지내는것을 발견했고,그들 중 적금쌍마가 있음을 알았던 거요.”
“그 사람은 용케도 신강에서만 활약하던 적금쌍마의 모습을 단숨에 알아보았구려.”
진산월의 지적에 마적풍은 히죽 웃었다.
“진 장문인의 심기는 너무 날카로 워서 아무것도 숨기지 못하겠구려.
그 사람이 바로 나요. 운 좋게도 예전에 서장 십이기와 십육사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용모파기를 본 적이 있었소. 다행히 내 기억력이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라서 그 희대의 살인귀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거요.”
“마 대협이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소. 팽가고택에 적금쌍마 말고 다른 자들도 있소?”
“그들의 수발을 들어주는 수하들몇이 있긴 하지만,크게 신경 쓸 자들은 아니오. 적금쌍마는 팽가고택의 지하에 있는 연무장에 머물러 있는데,좀처럼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어서 나도 운이 좋지 않았다면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요.”
“적금쌍마가 그곳에 있는 이유를 알고 있소?”
“정확히는 모르오. 다만 이곳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집회가 끝난 후무림맹의 움직임이 어떠한지를 파악하려는 게 아닌가 싶소. 다만 적금쌍마의 지난 행적으로 볼 때 단순히 조사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닐 테고,강남에서 강북으로 이동하는 무림인들을 암살하거나 배후에서 혈겁을 조장하여 혼란을 일으키는 게 주목적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소.”
마적풍은 강호에 퍼진 소문대로 확실히 식견이 탁월하고 안목이 예리했다. 진산월은 그와 몇 마디의 말을 더 나누고 나서 그의 지모가 이정문에 못지않다는 것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마 대협은 팽가고택을 쭉 지켜보았으니 그간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을 거요. 마 대협은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시오?”
진산월이 마적풍의 의견을 물은 것은 그를 그만큼 높게 평가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인지 마적풍의 눈은 어느 때보다 영활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진 장문인 같은 분이 내 졸견을 듣고 싶어 할 줄은 몰랐소.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하자면 진 장문인 정도의 실력이라면 이런저런 복잡한 계획을 세우거나 머리를 쓸 것 없이 곧장 팽가고택으로 쳐들어가면 충분하다고 보오. 다만 한 가지,혹시라도 팽가고택에 암도가 있다면 적금쌍마가 그곳으로 몸을 뻘 우려가 있을 수 있다는 게 조심스러울뿐이오.”
“그 점에 대한 마 대협의 복안은 어떻소?”
마적풍의 시선이 한쪽에 묵묵히 서 있는 전흠을 향했다.
“전 소협이 조금만 힘을 써준다면 그런 우려도 말끔히 씻을 수 있을거요.”
“어떻게 말이오?”
마적풍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해가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고 있을 무렵,오후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팽가고택으로 다가오는 두 인물이 있었다. 각기 삼십 대와 이십 대로 보이는 두 사람은 팽가고택의 정문을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한때는 맹가루 일대에서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던 팽가장은 주인이 모두 떠나고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지 자 이내 폐가로 변해 버렸다. 그나마 워낙 건물의 토대를 잘 지어서 제법 오랜 세월이 흘러도 팽가고택이라는 이름으로 가끔 유람객들의 발길을 찾는 장소가 될 수 있었었다.
최근에는 팽가고택에 사람의 혼을 앗는 흉악한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에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는데,오늘 두 명의 유람객이 모처럼 팽가 고택의 대문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다.
팽가고택의 정문은 질이 좋은 오동나무로 만들어서 예전에는 제법 위풍당당했을 테지만,지금은 칠이 거의 벗겨져 불그스름한 잔영만 남아있는 데다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고 낙서가 나 있어 다소 흉물스러워보였다.
두 사람 중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중년인이 먼저 앞으로 나서서 팽가 고택의 정문을 열어젖혔다.
삐이끽!
문고리에 녹이 잔뜩 슬었는지 귀를 따갑게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중년인은 이곳의 지리에 제법 익숙한 듯 반쯤 부서지다시피 한 정문을 지나 이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외관은 이래 보여도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볼 만한 곳이 많이 있다네. 특히 내원에 있는 대청 일대와 장주의 집무실 아래에 있는 연무장이 볼 만하지.”
청년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걸 음을 옮겼다.
정문을 지나자 제법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예전에는 틀림없이 온갖기화이초들로 뒤덮인 정원이었을 테지만,지금은 단지 잡초만이 우거진 황량한 공터에 불과했다.
하나 중년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터의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이쪽부터 저쪽까지는 오색화원을 이루고 있었고,저기 돌조각이 잔뜩있는 곳은 여러 가지 석상들과 석등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더군. 지금도 잘 찾아보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조각들을 볼 수 있을 걸세.”
중년인은 돌조각이 수북하게 쌓인곳으로 가서 발로 조각들을 뒤적거리더니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 보게. 이 우아한 모양을. 이건 아무리 봐도 예전 팽가장이 번성했을 때 그들의 영화를 상징하던 용봉신상(龍風神像)의 한 부분 같단말일세. 이 정교하게 새겨진 음각은 천룡의 비늘이었을 테고……
조각 하나를 들고 횡설수설하던 중 년인은 조각의 한쪽을 손으로 문질렸다.
“이 거무스름한 부분은 아마도 용의 눈알? 아니 그렇다기에는 너무동떨어져 있고…… 먹물이라도 묻은건가?”
청년이 그가 들고 있는 조각을 힐끔 보더니 짧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건 아무리 봐도 핏자국 같구려.”
중년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아마 불에 탄 재가 묻은 모양일세. 피가 말라붙은 자국치고는?…”
뭐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중년인은 이내 관심을 잃었는지 손에 들었던 조각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다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터를 지나자 십여 채의 전각이 나오고 그 반대편에 작은 월동문이 나타났다.
중년인은 여기저기 크고 작은 구멍이 뚫린 전각들은 별로 쳐다보지도 않고 월동문을 가리켰다.
“저곳을 지나면 내원이 나오고,본 격적으로 볼 만한 광경들이 펼쳐질걸세. 기대하게.”
사람의 키만 한 월동문을 지나자 과연 그의 장담대로 조금 전보다는 나은 광경이 드러났다. 몇 채의 아담한 건물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가운데 제법 큰 연못이 있고,연못 한 편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정자 저편으로 다시 죽림이 우거져 있고,죽림 한가운데 뚫린 소로 사이로 한 채의 멋진 전각이 살짝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중년인은 주저하지 않고 그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저 정자에서 바라보는 내원의 풍경이 제법이지. 물론 죽림 사이로 보이는 저 건물에 비할 바는 아닐세. 저 건물이야말로 예전 팽가장의 장주가 머무르던 본원이며,크고 화려한 대청과 멋들어진 집무실,그리고 지하의 연무장까지 고루갖추어진 최고의 볼거리일세.”
쉴새 없이 주절거리며 정자로 다가 가던 중년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정자 한가운데에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한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어? 선객이 있었네?”
그 말을 들었는지 그 사람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산발하고 거친 마의를 입은 야인을 연상케 하는 사나이였다. 딱 벌어진 어깨에 산발한 머리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이 어찌나 차갑고 무서운지 간담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중년인은 마의인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순간적으로 찔끔하다가 이내어색한 웃음을 홀렸다.
“눈빛 한 번 멋지군. 안녕하시오?”
마의인은 중년인과 청년을 예의 섬뜩한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더니 다시 자리에 몸을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