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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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5화


제 333 장 정세급변(2)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지만,산해루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산해루는 서안의 중심지에 위치해있지도 않았고,기루나 도박장을 함께 운용하지도 않았다. 사 층으로 된 누각에 뒤쪽으로 제법 넓은 객잔이 딸려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산해루는 사시사철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고,늦은 밤까지도 불이 꺼진 적이 없었다.

오늘도 초경이 훨씬 지나 이경(그更)이 가까워 오고 있음에도 산해루에는 적지 않은 인원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흥겨운 노랫가락과 떠들썩한 소리가 뒤섞여 산해루의 일 층과 이 층은 그야말로 저잣거리를 방불케 했다.

삼 층부터는 등도 거의 걸려있지 않아서 다른 곳과는 달리 어둠에 잠겨 있었는데,삼 층에 산해루의 주인인 노해광의 거처가 있고 사층에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출입할수 있는 특실이 있다는 것은 산해루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모르는 자가 없었다.

특히 산해루의 특실에 대해서는 별의별 소문이 많이 나 있어서,그 안에서 하룻밤 자기를 염원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나 사정을 알고 보면 산해루의 특실은 하룻밤을 묵는데 은자 다섯냥의 거금이 드는 무척 값비싼 객실일 뿐이었다. 다만 그 특실에 투숙하면 절세의 미녀들의 시중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천하에 보기 드문 진미와 명주들을 마음껏 맛볼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환상을 갖게 된 것뿐이었다.

그래도 산해루의 특실에 투숙했던 사람들 중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을 걸 보면 소문만큼은 아니더라도 무언가 특이한 매력이 있는 공간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시끌벅적한 산해루의 일 층에서도 유난히 고성이 오가는 곳이 있었다.

네 명의 장한이 소매를 걷어붙인 채 서로 언성을 높이고 있었는데,하나같이 얼굴이 불과한 것이 만취에 가까운 모습들이었다.

“뭐라고? 네놈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무시는 제길. 난 사실을 말하는거다. 너 같은 놈과 몇 번 어울려주었다고 내가 네놈과 같은 수준인줄 아느냐?”

“이 빌어먹을 놈이!”

그중 유독 얼굴이 붉은 장한이 분노에 찬 욕설을 퍼부으며 다른 장한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러자 그 장한은 옆 탁자로 나가떨어졌다. 그바람에 탁자 위의 음식과 술병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탁자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봉변을 당했다.

그 탁자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세 명의 백의인들이었는데,접시와 깨진 술병에서 된 음식찌꺼기와 술에 옷이 더러워지고 말았다.

가뜩이나 모두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던지라 더럽혀진 부분이 더욱 눈에 확 들어왔다.

탁자 위에 나뒹굴었던 장한이 벌떡일어나 자신을 때린 붉은 얼굴의 장한에게 덤벼들려 했다. 그때 백의인중 한 사람이 불쑥 손을 내밀어 그장한의 뒷목을 잡았다.

“어? 뭐야?”

그 장한은 자신의 목덜미를 잡은 백의인을 돌아보려 했으나,뒷목이 어찌나 세게 잡혔는지 고개를 돌릴수 없었다.

오히려 백의인이 손을 쳐들자 뒷목이 잡힌 채로 몸이 딸려 올라갔다.

그 바람에 목을 조이게 된 장한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크윽! 이거 뭐야? 안 놔……?”

장한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자기가 발버둥 칠수록 목덜미를 움켜쥔 손에 힘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더구나 그 힘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마치 거대한 쇠기둥에 묶인 것 같았다.

장한의 일행들이 이 광경을 보고 일제히 욕설을 퍼부으며 백의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심지어는 제일 먼저주먹을 휘둘렀던 붉은 얼굴의 장한도 거친 숨소리를 내며 옆에 있는 의자를 집어 던졌다.

“이놈아! 내 친구를 내놔라!”

날아오는 의자를 백의인 중 한 사람이 손으로 쳐내자,의자가 다른 탁자로 날아가는 바람에 그 일대도 난장판이 되었다. 때마침 장한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던 백의인이 장한을 일행들에게 집어 던지고 그들이 사방을 나뒹굴자 여기저기서 욕설과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음식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다시 장한들에게 달려들었고,장한들은 장한들대로 백의인들 쪽으로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접시와 술병들이 날아다니고 사방의 탁자와 의자들이 부서진 채 파편을 흩뿌렸다.

일 층 한쪽에서 벌어진 소란이 층전체로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웃으며 장내의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술병이나 의자에 한 대씩 얻어맞고는 이를 갈며 난장판 속으로 뛰어들어,소란은 그칠 줄을 몰랐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불씨를 당겼던 장한들과 백의인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다른 손님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멈춰라!”

그 고함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던 주루 안이 한 차례 들썩이더니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 중앙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당당한 체구에 탐스러운 수염을 기른 그 중년인은 다름 아닌 산해루의 주인 노해광이었다. 노해광이 모습을 드러내자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웠던 많은 사람들이 황급히 손을 늘어뜨린 채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란을 피운 장소가 어디인지를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노해광은 단순히 산해루의 주인일뿐 아니라 서안 일대를 암중에 장악하고 있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항상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다니며 때로는 호탕한 면을 보일 때도 있지만,한 번 화가 나면 그가 얼마나 무섭고 잔인하게 변하는지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잘알고 있었다.

노해광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담담한 시선이었으나,누구도 그와 감히 시선을 마주하는 사람이 없었다.

노해광은 태반이 박살 난 탁자와 의자들을 보고는 이내 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 싸움을 시작한 자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이내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의 얼굴에 당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누구도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자 노해광은 그중 한 사람을 지목했다.

“변일호(卞一虎). 자네가 제일 열심히 싸운 것 같으니 자네가 말해보게.”

노해광에게 지목을 받은 변일호는 체구가 우람하고 거친 수염이 얼굴가득 나 있어 용맹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노해광의 말마따나 그는 조금전의 싸움에서 누구보다 맹렬하게 주먹을 휘둘렀고,그만큼 맞기도 많이 맞았다.

두 주먹이 피로 물들어 있고,자신도 얼굴의 여기저기에 멍을 달고 있는 변일호는 피 묻은 주먹을 슬쩍옷자락에 닦으면서도 노해광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쩔쩔떴다.

“제…… 제가 오늘 술이 너무 과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네를 탓하려는 게 아닐세. 술마시다 주먹질 몇 번 하는 거야 주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 나는 다만 오늘 싸움을 최초로 벌인자들이 누구냐고 묻고 있는 걸세.”

변일호는 찔끔하여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쪽에서 처음 싸움이 났었는 데……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서 있던 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 났다.

“우…… 우린 아닙니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모두 피해 그일대가 텅 비어버렸다. 그곳에는 산산이 부서진 탁자의 잔해들과 빈 술병들만이 휑하니 굴러다니고 있었다.

노해광의 조용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해보게. 저쪽의 누구인가?”

그리 크지 않은 음성임에도 변일호는 얼굴이 핼쑥하게 변한 채 땀을 주르르 홀렸다.

“분명히 저쪽에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의인이 사람 하나를 집어 던졌고,그때부터 주먹질 이 난무했었는데……

변일호가 쩔쩔매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노해광이 그의 말을 받았

“그런데 지금은 그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군.”

변일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 걸 보니 그들은 모두 줄행랑을 친 모양입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두 합창을 하듯 떠들어댔다.

“맞습니다. 백의를 입은 세 사람과 장사꾼 차림의 네 명이 먼저 시비가 붙었습니다. 그들이 싸우는 통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휘말리게 된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자네들은 가만히 있었는 데,누군가가 싸움을 시작했고 자네들은 운이 없어서 끼어들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정말 억? ”

“주동자들은 이미 모두 빠져나간것도 모른 채 자네들끼리 열심히 주먹다짐을 하며 내 가게의 기물들을 파괴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 말에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주루를 모두 때려 부술 기세로 싸우던데,자 네들 중 누구도 싸움을 말리거나 자제를 하는 사람이 없더군. 내가 조금만 더 늦게 내려왔으면 정말 볼만한 일들이 벌어졌을 거야.”

노해광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을 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점차로 굳어져 갔다.

“정말 신기한 일 아닌가? 자네들중 상당수는 내 주루의 단골손님들이고, 이 주루가 내 소유이며 내가 늘 머무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네. 그런데도 사소한 다툼에 끼어들어 소란을 확대시키고 나로 하여금 기어코 집무실을 벗어나일 층으로 내려오게 만들었네.”

노해광의 시선이 다시 주루 안을 쓰윽 훑었다. 날카롭지도,그렇다고 매섭지도 않은 평범한 시선이었으나중인들은 그 시선이 닿는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내 주루에서 싸움이 벌어진 건 지난 겨울에 떠돌이 낭인들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일세. 소궁. 자네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지?”

노해광에게 지목당한 인물은 비쩍마른 체구에 유난히 하관이 긴 중년인이었다.

소궁은 열심히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때 흥안령 쪽에서 행세깨나하던 칠랑인지 팔랑인지 하는 낭인들이 일부러 대놓고 행패를 부렸었지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소궁은 그때 생각을 하는지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모두 다음날 팔 하나와 다리 하나가 잘린 채 남문 밖에 버려졌지요.”

“그래도 그들은 행운이었던 거야.

다리 하나가 남았으니 몸을 움직일수도 있고,팔 하나가 남았으니 음식을 먹는 데 지장이 없지 않겠나?”

“그렇습죠,모두 나으리의 넓은 아량에 감복했을 겁니다. 헤헤.”

“그러니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닌가?”

“무엇이 말입니까?”

“흥안칠랑(興安七浪) 이후 본 루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난 적은 몇 번있어도 싸움이 크게 번져서 기물이 파괴되거나 사람이 다친 적은 없었네. 그런데 오늘은 내가 집무실에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소란이 벌어졌고, 누구도 그걸말리거나 제지한 사람이 없었네.”

“그런데 막상 사건을 일으킨 자들은 모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나와 안면이 있는 자들만 남아 있더란말일세. 마치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심지어 비삼(費드),적대룡(秋大龍) 같은 겁 많고 소심한 자들도 모두 도망치지 않고 남아 있으니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자네들은 설마 흥안칠랑 꼴이 나는 게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아니면 내가 그때처럼 아량을 베풀어자네들의 손과 다리를 하나씩 잘라주기를 기대하고 있단 말인가?”

몇몇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시커떻게 변했다. 그들 중 유난히 체구가 왜소한 인물이 비삼이고,그 옆에 있는 다소 뚱뚱한 체구의 중년인이 적대룡이었다.

차분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던 노해광의 시선이 소궁에게로 향했다.

“그러니 말해보게,소궁. 자네들에게 이런 짓을 시킨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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