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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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4권 회인거인 편 : 6화


제 333 장 정세급변(3)

소궁의 마른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 었다.

“시키다니요? 누가 저희들에게 일부러 산해루에서 싸움을 하라고 시켰단 말입니까?”

“그렇게 물어보니 내가 바보가 된것 같군. 아니면 자네가 나를 우습게 보았던지. 자네 눈에는 내가 바보로 보이나?”

철면호 노해광을 바보로 보는 사람은 적어도 서안 일대에서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소궁이 무심결에 고개를 젓자 노해광은 탐스럽게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렇다면 내가 우습게 보였단 말이로군. 소궁,정말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소궁은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노해광의 웃음을 보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기만 했다.

그것은 먹이를 본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무서운 웃음이었던 것이다.

노해광은 소궁에 이어 변일호와 비삼, 적대룡 등 자신과 평소에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들은 노해광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소스라치게 놀라며 두려운얼굴로 고개를 멸구었다.

천천히 주루 안의 인물들을 훌어보던 노해광의 시선이 적대룡의 뒤에 있는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그사람은 체구가 커다란 적대롱의 뒤에 몸을 숨기듯 서 있어서 적대룡이 머리를 떨구지 않았다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유달리 왜소한 체구에 얼굴에는 곰보 자국이 가득한 중년인이었다. 곰보 중년인은 노해광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황급히 다시 적대롱의 뒤로 몸을 숨기려 했다. 하나 그때 이미 노해광은 그의 정체를 파악한 후였다.

“오호! 이게 누구신가? 형제들을 모두 내팽개치고 용케도 혼자 살아난 적류문의 마 문주 아니신가?”

곰보 중년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것은 분노와 깊은 원한,그리고 수치심이 결합된 것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혈음도 마강이었다.

마강은 흑선방의 수뇌들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마안거를 습격했다가 오히려 최동의 계략에 빠져 대부분의 수하들을 모두 잃고 자신만 간신히 살아나올 수 있었다. 그나마 장병기가 구문백절환을 얻으려고 그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형제들과 함께 뼈를 묻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마강이었다.

수하들을 모두 잃고 혈혈단신이 된마강이 꼭꼭 숨어있기는커녕 오히려흑선방의 배후인물인 노해광의 본거지에 나타난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수 없었다.

노해광은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마강을 향해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형제들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든 건가? 그렇다면 그 용기가 가상하다고 칭찬해주지. 아니면 너무 미련한 짓이었다고 해야 하나?”

마강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금시라도 노해광을 향해 달려들듯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분기를 가라앉히며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흥,노해광! 세상 모든 일이 네뜻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강호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노해광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지금 자네가 나를 가르치려는 건가? 강호가 어떤 곳인지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단 말이지? 이것 참 재미있군,정말 재미있는 일이야. 하하하!”

허리를 움켜쥐고 한참을 웃던 노해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이렇게 크게 웃어본 건 최근들어와서 처음 있는 일이군. 그나저나 자네가 저들을 사주해서 본 루에서 소란을 일으키게 한 장본인인가?”

“그렇다면 어쩔 테냐?”

노해광은 여전히 입가에 빙글빙글미소를 매달았다.

“정말 자네가 저들을 사주했단 말이지? 무엇으로 사주했나? 옆구리에 차고 있는 그 커다란 칼로 위협했나? 아니면 금은보화를 주겠다고 유혹했나? 그것도 아니면 아름다운미녀라도 안겨주겠다고 했나? 대체그들이 자네의 무얼 보고 꼬임에 넘어갔나?”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노해광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던 마강이 괴이 한 안광을 번뜩였다.

“정말 알고 싶으냐?”

“그래,어서 말해주게. 정말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군.”

“그렇다면 말해주지. 내가 저들을 사주할 수 있었던 건……

마강이 말을 끊자 노해광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기대되는지 관심어린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의 뒤에서 들려 왔다.

“자네가 곧 죽을 운명이라 더 이상자네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지.”

노해광의 웃음기가 감돌던 얼굴이 그대로 굳어지며 그의 신형이 번개보다 빠르게 뒤로 돌았다.

이 층에서 한 사람이 노해광이 서 있는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눈부신 백의를 입은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그를 보자 노해광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검단현……

백의 중년인,한때 철혈매화라 불리며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검단현은 노해광과 시선이 마주치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랜만이군. 이십여 년 전에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술자리에서 꽁무니를 뺀 뒤로 처음인가?”

“당신이 어찌 여길……

검단현은 양팔을 활짝 벌리며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멋진 주루더군. 신경 써서 구석구석까지 잘 가꾼 티가 나. 이런 곳인줄 알았으면 진즉에 찾아올걸 그랬어.”

노해광은 이내 평정을 되찾은 듯 떨리던 눈빛을 가다듬었지만,얼굴한구석에는 여전히 당혹감이 감돌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왔나?”

“주루에 술 마시러 왔지,다른 이유가 있겠나?”

“그걸 물은 게 아니란 걸 알지 않나?”

검단현은 짐짓 탄성을 터뜨렸다.

“아! 내가 어떻게 자네의 이목을 속이고 산해루의 이 층에 나타날 수 있었느냐고? 물으려면 좀 더 분명하게 물었어야지. 자네는 여전히 흐리멍덩한 구석이 있군.”

노해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검단현을 쏘아보고 있었다.

검단현은 그의 따가운 시선에도 오히려 더욱 활짝 웃었다.

“나는 내 발로 걸어왔네. 내 거처부근을 배회하고 있는 자네의 끄나풀들의 눈을 피하는 일이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그 뒤로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어. 대로를 따라 곧장 이곳으로 들어왔는데,아무도 막아서 거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오히려 어리둥절할 지경이었지.”

노해광은 검단현의 말에서 자신의 수하들이 그를 감시하는 데 커다란맹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검단현과의 대치가 며칠째 계속되면서 그가 머무르고 있는 거처 일대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지만,그곳만 벗어나면 오히려 방비가 소홀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줄곧 노해광의 눈과 귀가 되어 왔던 흑선방이 적류문과의 일전으로 하부조직이 궤멸되는 바람에 감시체계가 전반적으로 허술해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게다가 설마 검단현이 대로를 통해 산해루로 직접 오겠느냐는 심리적인 허점이 결합되어 일시적인 공백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노해광은 웃고 있는 검단현의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방 먹었군. 확실히 자네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야.”

검단현은 느긋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자네는 상대하기 만만하더군. 예전에도 늘 내가 무서워서 나만 보면 꽁무니를 랬으면서 무슨 배짱으로 감히 내게 덤빌 생각을 한 건가?”

“예전과는 사정이 달라졌지. 본 파도 그렇고,나도 그렇고.”

“달라진 건 하나도 없네. 종남파는 여전히 본 파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자네도 내 상대가 아니야. 그걸몰랐던 게 자네의 가장 큰 실수일세.”

“죽을 자리에 들어오고도 큰소리를 치는군.”

검단현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크하하. 이곳이 용담호혈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것 참 재미있군. 이렇게 재미있는 농담은 정말 모처럼 만일세. 하하.”

검단현은 조금 전에 노해광이 했던 말을 빗대어 조롱하듯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노해광은 그런 검단현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용담호혈까지는 아닐지라도 자네 혼자 헤쳐나가기는 힘든 곳이지.”

검단현은 계속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혼자 왔다고 누가 그러던가?”

“마강까지 두 사람이라고 해두지.”

“그러니까 우리 둘만 이곳에 왔다고 누가 그러더난 말일세.”

검단현의 말에 무언가를 느낀 듯 노해광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검단현은 재미있다는 듯 그를 보며 빙글거렸다.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위에서 아무도 자네를 도와주러 내려오지 않는 게 슬슬 이상해지는 모양이

“자네는 지금까지 나한테 이런저런말을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사실 자네를 붙잡고 시간을 끄는 건 나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나?”

노해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노해광은 위에서 나는 희미한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삼 층과 사층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삼 층은 그의 집무실과 그를 호위하는 수하들의 거처가 있고,사 층은 몇 개의 특실이 있다. 그리고 지금 그 특실 중 하나에는 아주 특별한 손님이 머물러 있었다.

삼 층의 수하들은 하나같이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다. 그럼에도 전혀 아무런 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습격을 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공격을 해온 자들이 그들을 뛰어넘는 무공의 소유자들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위에 누가 올라갔나?”

노해광이 황급히 묻자 검단현은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많지 않네. 본 파의 일대제자 네명과 두 분의 장로일세.”

검단현의 말대로 많지 않은 숫자이 긴 하다. 삼 층에 머무르는 수하들은 모두 열두 명이나 되며,사 층의 손님들까지 포함하면 스무 명에 가까운 인원이 있을 것이다.

하나 그 상대가 화산파의 일대제자 네 명과 두 명의 장로들이라면 사정은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숫자는 절반도 되지 않아도 그러한 전력이 라면 삼 층과 사 층의 인원들로는 절대로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화산파의 장로와 일대제자들은 하나같이 특수한 신분이어서 그들이 외부세력을 공공연하게 침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야음을 틈타 주루로 난입한다는 것은 화산파의 명성으로 볼 때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검단현은 창백해진 노해광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산해루가 제아무리 용담호혈이라고 해도 본 파가 힘을 기울인다면 진즉에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없애버릴 수 있었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러지 못한 것은 첫째,아직 종남파와 본격적인 대결을 벌일만한 상황이 아니었고,둘째는 자네가 이곳에 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세. 그리고 셋째는 별다른 명분 없이 멀쩡한 주루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었지.”

“그런데 왜……

“그런데 왜 오늘 갑자기 일을 저질 렸느냐고? 첫째로 종남파에 대한 본파의 방침이 확실히 정해졌고,둘째로 자네가 이곳에 있음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지.”

검단현은 아직도 일 층에서 노해광을 노려보고 있는 마강을 턱으로 가리 켰다.

“그리고 셋째는 확실한 명분이 있지 않나? 산해루의 식솔들을 모두 죽이고 이곳에 불을 질러 홀랑 태운자는 다름 아닌 마강일세. 마강은 산해루의 수족인 흑선방에 당한 자신의 수하들 복수를 하기 위해 오늘 혈겁을 일으킨 걸세.”

노해광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마강을 향했다.

마강은 이미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을 뽑아든 채로 진득한 살기를 날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병기를 든 무리들이 사람들 틈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적류문의 잔당들이었다.

검단현의 말대로라면 이들은 오늘 산해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살해한 다음 산해루를 불 질러 버릴 속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적류문의 잔당들은 불문곡직하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병장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악!”

“왜 우리를……!”

몇 사람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다른 사람들이 주루의 구석으로 도망을 쳤다. 하나이내 그들은 하나둘씩 차디찬 시신이 되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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