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41화
제 337 장 고택풍운(4)
오른손과 왼손으로 복잡하게 엉킨실타래를 푸는 듯한 동작이었는데,그 동작이 계속될수록 말로 형용키어려운 음산한 기운이 양손 사이에 감돌기 시작했다.
우우응…….
마치 벌떼가 우는 듯한 음향과 함께 공처럼 뭉쳐진 희끄무레한 기운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기운에는 은은한 금빛이 일렁이고 있는데,그 때문에 더욱 보는 이의 심령을 조이는 듯한 섬뜩함이 느껴졌다.
그 광경을 본 청년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이 무형의 기운이 압축될 대로 압축되어 유형의 강기로 변한 것임을 알아본 것이다.
청년은 다름 아닌 전흠이었다. 무공을 익힌 지 십여 년이 훨씬 넘었고,하루의 대부분을 검과 함께 살아오면서 그동안 숱한 고수들과 적지 않은 싸움을 벌여온 전홈이었다.
하나 단언컨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마의인보다 강한 적수와 싸운적은 없었다.
대체 보이지 않는 기운을 얼마나압축해야 저런 식의 유형의 강기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압축된 강기의 위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자신의 검으로 그러한 강기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그의 머릿속으로 너무도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더 이상의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마의인의 양손에 머물러 있던 금빛이 이글거리는 강기가 툭 튀어나오더니 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왔기 때문이다.
무형의 기운을 몸 밖으로 끌어내어유형의 강기로 만든 것도 놀라운 일인데,그러한 강기를 발출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전흠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비틀어강기를 피하려 했다. 하나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갈 듯하던 금색의 강기가 갑자기 선회하며 더욱 빠르게 그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합!”
전흠은 짤막한 외침을 터뜨리며 수 중의 장검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금색 강기를 힘껏 찔렀다.
팡!
예상보다는 훨씬 작은 소음이 터져나왔다. 하나 그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검이 강기에 닿는 순간,전흠은 자신의 검이 쇠로 만든 거대한 철벽을 후려친 듯한 충격을 느꼈다. 손바닥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으나,그는 필사적인 의지로 검을 움켜잡으며 전력을 다해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파아아 ?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서 있던 공간에 세찬 소용돌이가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강기의 여파가 만들어낸그 장면은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케하는 것이었다. 그 소용돌이에 정면으로 휩싸였다가는 제아무리 단단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전신이 갈가리 찢겨지고 말았을 것이다.
전홈은 머리끝이 쭈뼛거리고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그것은 상대의 가공할 무공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고,이런 적수와 상대하게 된 것에 대한 설렘이기도 했으며,이번에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연함이기도 했다.
이 정도 강기의 소유자라면 자신이 싸워 보기도 전에 승부를 포기해야만 했던 그자와 능히 견줄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낙인을 남겨 주었던 무시무시한 원영만기의 주인공,절영검 비성흔과 말이다.
언젠가는 그와 같은 수준의 고수와 겨루게 될 날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설마 그 날이 이렇게 빨리 다가오게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그렇다고 그때처럼 상대의 무공이 두려워 물러서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검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볼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눈앞의 상대에 맞서고야 말 것이다.
전흠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마의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손에 들린 검에서 수십 개의 검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자 주위가 갑자기 훤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성라검법 중의 초식들인 괴성척두와 비폭성류, 성휘조현이 마치 구슬에 권! 듯 쉴 사이 없이 펼쳐진 것이다.
그 검광들은 순식간에 마의인의 사방을 뒤덮어 버렸다.
얼핏 마의인의 차가운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솜씨를 보니 확실히 무명소졸은 아니로군. 정말 제대로 몸을 풀겠어.”
그의 오른손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예의 금색 강기가 다시 튀어나오더니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전홈이 펼쳐낸 검광들이 그 강기에 닿는 순간맥없이 튕겨져 나가거나 급속도로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전흠은 쉬지 않고 성라검법의 초식들을 전개했으나, 단 하나의 검광도마의인의 금색 강기를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하나 전흠은 조금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세를 이어나갔다.
얼핏 보기에는 그의 이런 모습은 무모한 몸부림 같아 보였다.
한쪽에서 여섯 명의 장한들에게 몰리면서도 틈틈이 전흠과 마의인의 싸움을 힐끔거리던 중년인,마적풍은 속으로 나직하게 혀를 찼다.
‘찜. 역시 폭뢰검이라는 별호 그대로 성급하군.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기백은 좋지만, 상대와 자신의 역량을 잘 판가름하여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진정한 고수의 자세일
텐데…….,
그가 보기에는 전흠이 당장이라도마의인의 금색 강기에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흠이 펼쳐낸 검광은 도저히 마의인의 근처에 접근도 못 하고 허무하게 파훼되고 있고,반면에 마의인의 금색 강기는 금시라도 전홈의 빈틈을 뚫고 들어가려는 둣 무서운 기세로 그의 주위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팽가고택에 들어오기 전에 마적풍은 전흠과 함께 정면으로 들어가 적들의 이목을 끌고,그동안 진산월이 뒤쪽으로 접근해서 혹시라도 적금쌍마가 외부로 탈출하는 일이 없도록막기로 계획했었다. 지금까지는 원래의 계획대로 일이 잘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하나 여기서 조금만 더 지체되었다가는 종남파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인폭뢰검객이 눈 깜박할 사이에 한 줌의 고혼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어찌 된 일인지 신검무적은 도통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 안이하게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을까?’
마적풍의 마음에 잠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마의인은 적금쌍마 중의 둘째인 금인도마(金刀層魔) 양광이었다.
그는 수공의 절대고수로,특히 그가 사용하는 금인마장(金刀魔掌)은 중원의 어떠한 수공절학에도 뒤지지 않는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적금쌍마의 첫째는 적수혼마(赤手魂魔) 탕손인데,그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다만 양광 같은 고수를 둘째로 둘 정도면 그의 실력 또한 그보다 결코못 하지 않을 거라는 예측만이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마적풍은 처음에 양광을 보고는 속으로 반색을 했었다. 자신들이 이곳에서 양광을 붙잡고 있으면 신검무적이 어렵지 않게 탕손을 쓰러뜨리고 자신들에게 합류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시간이 홀렸음에도 아직까지도 신검무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탕손을 제거하는 일에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있음이 분명한 것 같았다.
막 자신의 목을 찔러오는 거치도를 슬쩍 상체를 비틀어 피한 마적풍은 재빨리 허리춤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풀었는지 허리띠가 쥐어져 있었다.
하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단순한 허리띠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마적풍이 어루만지자 허리띠의 중간 부분이 풀려나오며 길고 가느다란사슬이 드러났다. 이어 허리띠의 양쪽 끝 부분을 벗기자 그 속에서 날카로운 비수가 튀어나왔다.
평범해 보였던 허리띠가 순식간에 승표(織鏢)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매끄러웠던지 장한들 중 대다수는 미처 그 사실을 머릿속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승표를 든 마적풍의 얼굴에는 조금전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차갑고 냉정한 강호인의 얼굴이었다.
팟!
때마침 자신의 가슴을 찔러오는 장검을 힐끔 내려 본 마적풍이 승표를 흔들자 장검의 앞부분이 사슬에 묶여 허공에 정지했다. 그와 함께 사슬의 끝에 달려 있는 비수가 번개같은 속도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헉!”
무심코 장검을 휘두르던 장한이 갑자기 튀어나온 비수에 화들짝 놀라피하려 했으나 사슬에 감긴 장검이 꼼짝도 하지 않자 순간적으로 몸을 멈칫거렸다. 그 순간,비수는 한 치의 착오도 없이 그의 목에 그대로 격중되 었다.
그 광경을 본 다른 다섯 명의 장한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으나그때는 이미 그 장한은 피가 뿜어나오는 목을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진 후였다.
사실 그들은 지금까지 마적풍을 합공하면서 일방적으로 공세를 취하고 있기에 어느 정도 방심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동안 변변한 공격 한 번해보지 못하고 몰리기만 하던 마적풍이 순식간에 허리띠를 병장기로 만들어 반격을 해오자 미처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한 사람을 잃고 만것이다.
그들이 사정이 달라졌음을 알아차린 것은 그때부터였다.
승표를 손에 든 마적풍은 사람이 바뀐 것처럼 날카롭고 매서운 공격을 거푸 퍼부었다. 그 바람에 다섯명의 장한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공격을 피하는 데 급급한 실정이었다.
휘휘휘휙!
이 장 길이의 사슬에 양쪽으로 비수가 하나씩 달렸을 뿐임에도 그 두개의 비수들이 어찌나 영활하고 날카롭게 움직이는지 금시라도 목에 피구멍이 뚫려버릴 것만 같았다. 게 다가 사슬을 움직이는 마적풍의 가벼운 손짓에 따라 비수들의 위치가 판이하게 바뀌어 버리니 마치 수십개의 비수가 동시에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시 한 명의 장한이 갑자기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비수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옆구리를 꿰뚫린 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팟!
장한의 옆구리를 뚫고 지나간 비수는 사슬의 끌림에 따라 다시 튀어나왔는데,그 바람에 장한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크악!”
남은 네 명의 장한들은 마적풍의 병기가 보여주는 기묘한 위력에 놀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마적풍은 마적풍대로 마음이 다급했다.
양광을 상대하고 있는 전홈의 처지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전홈은 그동안 성라검법의 절초들을 거푸 펼쳐내며 양광의 가공할 금인장에 맞서고 있었다. 양광의 금인마장은 장공이 강기로 압축된 상태에서 움직이기에 그 위력은 강맹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반면에 변화의 다양함은 그에 못 미치는 편이었다.
전흠은 몇 번의 격돌 끝에 그 사실을 알아내고 성라검법에 간간이 유운검법의 변화들을 섞어서 사용했는데,그래서인지 이십 초가 지나도록 제법 팽팽하게 양광에 맞설 수 있었다.
그런데 마적풍이 자신의 독문병기를 꺼내 장한 한 명을 쓰러뜨린 순간부터 양광의 대응이 달라졌다.
그때까지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금색 강기를 단조롭게 움직이던 양광이 수하의 죽음을 보고는 일을 마무리 지을 결심을 했는지 비할 수 없이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단순한 듯했던 금색 강기의 움직임이 전혀 딴판으로 빠르고 정교해지며 무섭게 전흠을 압박해 들어왔다.
그제야 전흠은 지금까지 양광이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자신을 상대로 몸을 풀고 있었음을 깨닫고 이를 부드득 갈았으나,상황은 그가 화를 낼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파앗!
지금도 무섭게 선회하던 금색 강기가 생각도 못 했던 절묘한 각도로 날아들자 전홈은 사력을 다해 몸을 뒤틀다시피 하여 간신히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하나 그 바람에 그의 몸은 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 순간,그의 몸을 스쳐 지나가던 금색 강기가 돌연 두 개로 나뉘어아직도 몸을 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전흠의 머리와 가슴 쪽으로 날아들었다. 이것이 바로 양광의 금인마장삼절초 중 하나인 쌍금인이었다.
장한들을 상대하면서도 틈틈이 전흠을 지켜보던 마적풍은 깜짝 놀라그를 도우려 했으나, 그때 마침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네 명의 장한들이 수비는 도외시한 채 그를 향해전력으로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네 개의 병기들을 연거푸 사슬로 완벽하게 막아내면서도 마적풍의 마음은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지금 당장 반격에 전념하면 네 명의 장한들중 허점을 드러낸 두세 명을 쓰러뜨릴 수는 있겠지만, 그 사이 전홈은 양광의 금인마장에 당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전홈을 도와주기에는 목숨을 내건 장한들의 공세가 제법 매서웠을 뿐 아니라,전흠과의 거리도 너무 떨어져 있었다.
‘아!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자신이 너무 안일했다는 자책과 함께 탄식을 토해내던 마적풍의 눈이 갑자기 크게 뜨여졌다.
장한들의 공격을 사슬로 봉쇄하고 늦게나마 승표에 붙은 비수라도 떼어 던질 요량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의 눈에 문득 담벼락 위의 무언가가 들어왔던 것이다.
안력을 돋우어 보니 담벼락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마적풍은 하마터면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진 장문인! 당신은 사제가 죽는데도 그 자리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셈이오?’
담벼락 위의 인영은 다름 아닌 마적풍이 그토록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진산월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진산월은 전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담벼락 위에 앉아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