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42화
제 337 장 고택풍운(5)
전흠의 전신은 흐르는 땀으로 흠책젖은 상태였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한없이 무거웠고,검을 쥔 손은 거듭된 격돌로 인한 충격으로 감각마저 사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전홈은 아직 승부를 포기 하지 않았다.
‘기회가 올 것이다. 반드시 꼭 한 번은 내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
그것은 간절한 바람이라고 해도 좋았고, 필사의 염원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니면 승리에 대한 너무도 절실한 갈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양광의 손에서 발출된 금색 강기가 두 개로 나뉘어 무시무시한 기세로 자신의 머리와 가슴 쪽으로 날아오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전홈은 좌절하지 않았다. 설사 금색 강기에 머리가 박살 나거나 가슴뼈가 송두리째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마음속에 불타오르고 있는 맹렬한 투지는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전흠의 온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었고,전신의 모공이 최대한도로 활짝 열려 있어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바람이라도 한 줄기 한 줄기 모두 파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머리와 가슴 쪽으로 다가오는 두 개의 강기가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였음에도 그 강기들이 날아드는 세세한 방위와 형태,그 안에 담겨 있는 오묘한 변화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그린 둣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피부에 있는 솜털 하나하나가 일어서는 듯한 예민한 감각에 눈을 번뜩인 전흠은 옆으로 몸을 비스듬히 누이며 허리를 최대한 비틀었다.
파앗!
그의 머리와 가슴을 향해 다가오던 두 개의 금색 강기가 아슬아슬한 차이로 목덜미와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놀랍게도 중심이 잡혀 있지 않은 불완전한 자세임에도 전홈은 두 개의 강기를 완벽하게 피해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수중의 장검을 앞으로 힘껏 내뻗었다.
양광의 눈이 처음으로 살짝 찌푸려졌다. 자신의 쌍금인이 이토록 허무하게 파해되어버릴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금시라도 피를 뿌리며 쓰러질 듯하던 전홈이 절묘한 동작으로 쌍금인을 피하며 오히려 날카로운 반격을 가해오자 양광은 처음으로 위기의식을 느꼈다.
전홈이 내뻗은 일검은 얼핏 보기에는 단조로운 직선공격 같지만,검끝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실상은 날카로운 변화를 숨겨둔초식임이 분명해 보였다. 이런 식의 공격은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일단피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데,문제는 지금 양광의 자세가 양옆으로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금인마장은 그 강력한 위력만큼이나 정순한 공력운용과 높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무공이었다. 특히 삼대절초들을 펼치려면 내공을 하나로 끌어모아 압축을 해야 하기에 몸의 움직임이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단점만 아니었다면 그 강맹한 위력으로 보아 능히 서장제일의 장공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양광은 순간적으로 금인마장의 자세를 풀고 옆으로 몸을 움직여 전홈의 공격을 피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으나,이내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했다. 삼대절초 중의 하나를 사용하고도 상대를 쓰러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의 검에 물러선다는 것은 신강 땅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적금쌍마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런 결심이 전홈에게 그토록 갈망하고 고대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양광은 전홈의 검을 피하지 않고 오른손을 빠르게 앞으로 내저었다.
팡!
경쾌한 음향과 함께 금색 강기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튀어나와 전흠의 검을 향해 쏘아져갔다. 일선탈이라는 수법인데, 위력은 조금 떨어졌으나 속도가 빨라서 지금처럼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대의 공격을 탐색하는 데는 무척이나 적절한 무공이었다.
막 검과 강기가 부딪히려는 순간,전홈의 검이 세차게 흔들리더니 수 십 개의 검영으로 나뉘어졌다.
스스스슷!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퍼져나간 검영들에 양광의 시선이 잠깐쏠리는 사이 검영들이 급격하게 흐트러지며 그 속에서 하나의 섬광이 폭사되었다. 그 섬광의 위치는 처음 전홈의 검이 찔러오던 방위와 전혀다른 것이어서 양광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검광이 지척에 다다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성라검법중에서도 최고의 연환식인 비성유흔,낙성빈분,궁공성사의 삼절초였다.
세 초식은 각각으로도 뛰어난 위력을 지니고 있지만,지금처럼 연계하여 펼치면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살인검초가 되는 것이다.
천하의 양광도 지금 이 순간만은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상대의 곧게 뻗어오는 일검이 무언가 교묘한 변화를 담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복잡한 검영 속에 전혀 다른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살검을 숨긴 무시무시한 것일 줄은 짐작도 못 했던 것이다.
양광은 사력을 다해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팟!
왼쪽 가슴 위부터 어깨까지가 쭈욱갈라지며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양광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하나 양광은 신음 한 마디 내지 않고 비틀었던 몸을 그대로 회전하며 양손을 질풍처럼 내질렀다. 자신의 상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해 치명적인 반격을 날린 것이다. 그의 공격이 어찌나빨랐던지 장내에는 그저 두 가닥 금광이 어른거리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전홈은 일검으로 양광을 부상 입히 기는 했으나,그것이 치명적인 상처가 아님을 알고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던지다시피 하며 바닥을 굴렸다.
두 줄기 금광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등을 스치고 지나가며 등 부분 옷자 락이 바스러져 버렸다.
“즉!”
전흠은 척추삐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중에 이를 악물며 구르던 자세 그대로 이 장 밖까지 몇 바퀴나 더굴러나갔다. 막 탄력을 받은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던 전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직 채 완전히 일어나기도 전에 자신의 코앞으로 날아오는 금색 강기를 발견한 것이다.
자신의 시야를 가득 뒤덮고 있는 금색 강기를 보는 전흠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암담한 표정이 떠올랐다.
도저히 그 강기를 막거나 피할 여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강기야말로 금인마장의 최고 초식인 금마락(金魔落)이었다. 양광은 왼쪽 가슴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도 흉신악살처럼 살광을 뿜어내며 전홈을 바짝 쫓아와 결정적인 공세를 가한 것이다.
강기가 날아오는 그 찰나의 순간에 전홈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무당산에서 내려오는 날 아침에 전홈은 진산월을 찾아가 선반에 가입하겠다고 자청했다. 종남파를 위해작은 공이라도 세워야 할아버지를 볼 면목이 설 수 있다는 전홈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진산월은 한참 후에야 한 가지 조건을 내걸며 그의 청을 수락했다.
“공을 세우기보다는 네 자신의 무공에 대한 확신을 키우는 것에 더집중하도록 해라.”
그것이 진산월이 말한 조건이었다.
진산월과 동행하면서 전흠은 스스로에게 내건 약속이 있었다.
– 이제는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두 번 다시 물러서지 않겠다.
설사 한 줌의 고혼이 되어 영영 종남파로 돌아가지 못하는 한 이 있더라도 절대로 뒤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그래서 서장의 최고고수들 중 하나인 적금쌍마와 싸우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양광의 실력은 예상보다 훨씬 더무서운 것이었다. 그의 손이 움직일때마다 발출되어 나오는 금색 강기는 도저히 인간이 뿜어내는 장력 같지가 않았다. 별다른 보법을 펼치지 않고 있음에도 그는 단지 두 손을 번갈아 휘두르는 것만으로 전홈을 압도하고 있었다.
‘낙 사제라면……. 낙 사제가 이자리에 있었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몰렸을까?’
전홈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자신의 능력 이상의 솜씨를 발휘해 양광의 가슴에 일검을 격증시킬 수 있었던것은 바로 이러한 분노와 투지가 결합된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나 그러한 그의 투혼도 이제 마지막이었다. 조금 전의 일검은 전흠으로서는 자신의 진력을 모두 끌어모은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것으로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한 이상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눈앞으로 다가오는 금색 강기는 그러한 사실을 생생하게 입증해 주고 있었다.
전홈이 더 이상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였다. 그의 귓전으로 누군가의 짤막한 전음이 들려왔다.
“또다시 포기하려는 게냐?”
그 음성을 듣는 순간,전홈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진산월의 음성이었다. 언젠가는 가까이 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도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것 같은 아득한 곳에 위치해 있는 장문인의 무심한 듯한 그 음성을 듣자 전흠의 몸 깊은 곳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맹렬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 무언가는 순식간에 그의 몸과 마음을 활활 불태웠다. 그리고 그때문득 그의 뇌리 속으로 오래전의 광경 몇 가지가 스치듯 떠올랐다.
어린 시절,무공을 익히는 재미에 흠백 빠져 밤새 검을 휘두르다가 문득 새벽녘에 우연히 본 할아버지의 연무장면!
종남산에서의 어느 날 밤,그림처럼 펼쳐지던 장문인의 환상적인 검무!
그리고 남궁세가에서 벌인 고통스럽고 처절했던 남궁선과의 혈투!
그때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뿌렸던 검의 움직임은 어찌그리도 아름다웠던지?…”.
지금까지 그는 몇 번이고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했지만,그때의 검로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꺼져가던 마음속에서 다시 불같은 투지를 일으킨 이 순간에 그때의 검로가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억지로 변화를 의식하지 않는다.
내 검은 그저 마땅히 움직여야 할 곳을 흘러갈 뿐이다.’
전흠의 검이 미끄러지듯 허공의 한 부분을 유연하게 베어냈다.
그 순간, 그의 몸을 휩쓸어버릴 듯 가공할 기세로 다가오던 두 개의 금색 강기가 그대로 갈라지며 뒤편에서 날아오던 양광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파아아…….
갑자기 검광과 강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더니 주위에 죽음 같은 적막이 흘렀다.
한쪽에서 막 여섯 명째의 장한을 쓰러뜨리고 다급한 표정으로 돌아보던 마적풍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바닥에 한 사람이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양광이었다. 놀랍게도 금시라도 전흠을 도륙할 듯했던 양광이 오히려 비참한 모습으로 자신이 홀린 피바다 속에 누워 있는 것이다.
전흠은 양광의 시신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검을 쳐든 자세 그대로 그는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마적풍이 무심코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하나의 신형이 전홈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지금까지 담벼락에 앉아 있던 진산월이 어느새 몸을 날려 다가온것이다.
진산월은 허공을 올려본 채 미동도 않고 있는 전흠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장검을 뽑아서 검집에 넣어주고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수고했다. 이제 쉬도록 해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흠의 몸은 그대로 허물어지둣 진산월의 품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헛,전 소협!”
마적풍이 깜짝 놀라 다가오자 진산월은 전흠의 몸을 가볍게 안아 들고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력을 모두 소모하여 잠시 정신을 잃은 것뿐이오.”
마적풍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다행이오. 난 또 전소협이 양광과 양패구상이라도 한 줄 알고……
이어 그는 새삼스런 눈으로 진산월의 품에 안겨 있는 전흠을 바라보았다.
“설마 전 소협이 양광을 쓰러뜨릴줄은 몰랐소. 전 소협의 무공으로는 양광의 금인마장을 감당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는 예상외의 일을 만들어 낼 수있소.”
진산월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마적풍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적금쌍마의 첫째인 적수혼마 탕손이 보이지 않는구려.”
진산월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탕손은 당신의 말대로 지하 연무장에 있었소.”
마적풍은 움찔하여 급히 되물었다.
“그는 어떻게 되었소?”
진산월은 잠시 양광의 시신을 돌아보다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번 다시 악행을 저지를 수 없게 되었소.”
마적풍이 반색을 했다.
“그럼……
“탕손의 신세도 저자와 똑같소. 적금쌍마란 이름은 앞으로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