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47화
제 339 장 의기불굴(2)
만강루는 야음에 잠겨 있었다.
깊은 밤의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삼경도 훨씬 지나 새벽이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탕! 탕! 탕!
하도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간신히 눈을 비비고 일어난 점소이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대문으로 걸어갔다.
“제길.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야밤에 잠도 안 자고 이 난리를 치는 거야?”
점소이가 채 대문을 반도 열기도 전에 누군가가 대문을 발로 걷어차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과당!
“어이쿠!”
갑자기 열려진 대문에 부딪혀 바닥에 나뒹굴게 된 점소이는 어안이 벙벙하여 안으로 뛰어들어온 사람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머리는 산발해서 허리까지 풀어 헤쳐졌고,온몸은 허연 먼지로 수북하게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얼마나먼 길을 뛰어왔는지 땀으로 홈렉 젖은 몰골에 거친 숨을 가쁘게 헐떡거리고 있는 모습이 자칫 했다가는 그대로 숨이 꼴깍 멈춰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점소이가 차마 화를 내지 못한 것은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그 사람의 눈빛이 너무도 살벌하고 무시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더욱 기괴한 것은 그의 품속에 언뜻 보기에도 푸르뎅뎅하게 굳어 있는 어린 소년의 시체가 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야밤에 문을 걷어차고 뛰어들어온사나이가 시신까지 안고 있으니 점소이가 화를 내기 이전에 두려움부터 느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허억허억! 어디 있어? 그 여자 어디 있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사람은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점소이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무슨 여자를 말하는 거요? 아니,그보다 당신은 누구인데 이 야밤에 여기 와서 여자를 찾는 거요? 그리고 그 시체는……
점소이가 그 사람의 가슴에 안긴소년의 시신을 두려운 듯 손으로 가리키자 그 사람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체라니? 죽기는 누가 죽었다는거야?”
“아니 그게……
“비켜!”
그 사람은 점소이를 와락 밀치고는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다시 몸을 돌려 점소이를 노려보았다. 붉게 충혈된 데다 기이한 빛마저 번들거리는 두 눈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점소이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지는것 같았다.
“그 여자 여기 있지? 어서 말해.”
“대체 무슨 여자를 말하는 거요?”
“그 여자, 천봉궁의……. 에이,이 런 시골 무지렁이가 천봉궁을 알 리가 없지. 아무튼 이 객잔에 묶은 여자들 중 제일 젊고 예쁜 여자가 있는 방이 어디야?”
점소이는 당황한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멀거니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젊고 예쁜 여자라니. 그렇게 말하면 누군지 어떻게 알……
“정말 몰라?”
그 사람이 눈을 부라리자 무심코고개를 저으려던 점소이의 뇌리에 문득 오늘 저녁에 불쑥 만강루를 찾아왔던 여인 한 사람이 떠올랐다.
늦은 저녁에 불쑥 찾아와서는 대뜸이곳에서 제일 좋은 방으로 내놓으라며 강짜를 부리던 그 여인은 성격답지 않게 외모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아름다웠지 않았던가?
“저…… 노란 옷을 입은 젊은 미녀라면 한 분이 계시기는 한데……
그 사람이 눈을 빛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노란 옷. 그 여자는 노란옷을 즐겨 입으니까. 성격이 좀 거칠고 안하무인이긴 하지만,얼굴이 무지 예쁘고 입이 걸걸한 여자 말이야.”
“그 여자라면…….,,
점소이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만강루의 객실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자리한 별실이었다. 하나 또한 그만큼 화려하고 깨끗해서 만강루에서도 가장 비싼 곳 중의 하나였다.
점소이가 채 그 방에 대해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그 사람은 쏜살같이 그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누산산은 대문 밖이 소란스러워졌을 때부터 잠이 깨어 있었다.
이곳은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만강루가 비록 이 일대에서 가장 큰객잔이라고 해도, 번화한 도시의 성대한 주루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런 만강루에서 심야에 화급을 다툴 만큼 급하게 요란법석을 떨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혹시나 자신과 관련된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채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별실의 문이 발칵 열리며 누군가가 별실에 있는 작은 뜨락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누 소저! 누 소저!”
거칠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누산산은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어떤 미친 작자가 야밤에 이런 소란을 부리는지 모르겠군. 어디서 듣던 목소리 같기는 한데?”
방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자신의 단잠을 깨운 무례한 침입자가 다름아닌 종남파의 막내제자인 손풍임을 알아보았다. 가뜩이나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그녀로서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법도 했다.
하나 그녀가 채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손풍은 품에 안고 있던 소년의 시신을 그녀에게 불쑥 내밀었다.
“꼬마 사형 좀 봐주시오. 부탁하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용케도 더듬거리지 않고 사정을 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누산산의 시선이 그가 내민 사람에게로 향했다.
과연,그 소년은 진산월의 기명제자인 유소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야심한 시각에 천하를 울리는 종남파의 제자가 이런 꼴이 되어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종남파의 다른 고수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제 종남파의 거처를 방문했던 누산산은 그곳에 남아있는 고수들이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개개인이 모두 강호를 호령할 수 있는 뛰어난실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당대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로 손꼽히는 옥면신권 낙일방은 물론이고,형산파의 오결검객을 격파하여 자신이 절정의 검객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한 무영검군 성락중,신비스럽게 나타나 오결검객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영검 비성흔을 격파하여 일약 종남신녀라는 별호가 붙게 된 임영옥,그리고 종남파의 꾀주머니로 널리 알려진 비천호리 동중산까지 어느 누구 하나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쟁쟁한 선배 고수들과 함께 있던 손풍이 칠흑같이 어두운밤에 빈사 상태의 유소응만을 데리고 초라한 몰골로 자신을 찾아왔으니 그녀가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 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자신과 유소응을 바라보고만 있자 손풍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가득 떠올랐다.
“누 소저. 소저가 나를 못마땅해하는 건 알고 있지만,본 파의 장문인을 생각해서라도 꼬마 사형 좀 살려주시오. 그렇게만 해준다면 소저의 말씀은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소.”
항상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무례한 언사를 남발했던 손풍이 뜨거운 솥단지라도 든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하자 누산산의 마음에 갑자기 심술 맞은 생각이 감돌았다.
원래 누산산은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의식을 잃고 있는 유소응을 보자 그의 상세부터 살필 생각이었으나,당황해하는 손풍의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마음이 바뀐 사람처럼 새침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당당한 종남파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를 세우더니,사정이 급해지자 금세 태도를 바꾸는구나. 그런 자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이냐?”
손풍은 가뜩이나 정신을 잃은 지오래된 유소응을 한참 동안 안고 달려왔기에 그의 상태가 걱정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누산산의 멱살이라도 잡고 빨리 서두르라고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나 그녀의 성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기에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우선 머리부터 조아려야 했다.
“누 소저의 말이라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겠고,분이 풀리지 않아 손을 쓰겠다면 얼마든지 맞아주겠소. 그러니 제발 꼬마 사형부터 좀 봐주시오. 일단은 사람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소?”
평소와 다른 손풍의 모습에 누산산도 조금은 마음속의 심술이 풀어지는 것 같았으나,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마음과는 달랐다.
“입으로 내뱉은 건 무슨 말이든 못할까? 무릎이라도 꿇고 빌면 모를 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토록 자존심 강하고 세상 무서운줄 모르던 손풍이 그 자리에서 털썩무릎을 꿇었다.
그 광경에 놀란 사람은 오히려 누산산이었다. 누산산은 무림인이란족속이 얼마나 남에게 굽히기 싫어하고 허리가 뻣뻣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손풍은 그 고약한 성질만큼이나 콧대가 높고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어서,남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손풍이 말 한 마디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었으니,막상 그 모습을 보게 된누산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 소저. 내가 잘못했소. 나에 대한 어떤 벌이든 기꺼이 달게 받겠으니,제발 우리 꼬마 사형을 살려주시오. 이렇게 부탁하오.”
손풍이 머리마저 조아릴 기색이자 누산산은 황급히 그의 손에서 유소응을 빼앗다시피 건네받았다.
“저리 비켜요. 누가 그런 꼴을 보고 싶다고 했나요?”
무안한지 날카롭게 소리 지르는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엷은 홍조가 피었다가 사라졌다.
손풍은 그녀의 말투가 조금 달라진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초조함과 답답함이 가득한 얼굴로 유소응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소응의 안색은 조금 전보다 훨씬더 창백해서 핏기가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손풍이 안고 달려오는 와중에도 계속 유소응의 몸을 문질러서 조금이라도 온기를 전해 주려 했으나,언뜻 보기에도 체내에 온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막상 반쯤 얼어붙어 있는 유소응의 상태를 확인한 누산산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재빨리 유소응의 맥문을 집어보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는 그를 안아 들고 벌떡 일어났다.
“누 소저……!”
손풍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부르는 순간,누산산은 주저 없이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꼼짝 말고 여기 있어요. 멋대로 내 방안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 왔다가는 단단히 경을 칠 줄 알아요.”
탁!
굳게 닫힌 그녀의 방문을 바라보는 손풍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잔뜩일그러져 버렸다.
“크윽!”
손풍이라고 여인에게 무릎을 꿇는것이 수치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에게 무릎을 꿇기는커녕 머리조차 조아린 적이 없는 손풍이었다. 부친인 손노태야 에게도 굽히지 않았던 머리를 몇 번이고 숙이고 무릎조차 꿇어야 했던 지금의 현실이 그에게는 더할 수 없이 치욕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 손풍은 그것보다는 유소응의 생사가 더욱 신경 쓰였다.
굽혔던 허리는 일으킬 수 있다. 꿇어진 무릎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치욕과 수모도 언젠가는 되갚아줄 수 있다. 하나 끊어진 사람의 목숨은 다시 되살릴 수 없지 않은가?
‘꼬마 사형! 꼭 살아나야 돼! 절대로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 내가 고수가 되어 떵떵거리는 모습을 봐준다고 했잖아!’
손풍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임에도 늘 과묵하고 진중했던 유소응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밖을 기울였던 만강루의 사람들이 방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손풍의 모습을 보고는 숨을 죽이며 되돌아가 버렸다.
얼핏 보기에도 무림인들 간의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위세를 떨치던 밤이 조금씩 물러가고 멀리서 새벽의 여명이 조금씩 싹터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손풍은 닫힌 방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쉴 사이 없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느 것 하나 오래 머물러있지 않았다. 멍한 상태로 무릎을 꿇고 있는 손풍은 지금까지의 일들이 모두 꿈속에서 벌어진 것 같았다.
처음에 엉겁결에 반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하여 시작된 강호행이 하루하루 나름의 의미를 지니게 되고,그 속에서 자신이 이루어야 할 목표를 찾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닥친 몇 번의 살 떨리는 싸움과 열두 번에 걸친지독한 고통 끝에 마침내 십이경맥을 타통하고 무공에 입문하게 되었을 때의 짜릿한 희열감……! 무당산에서 벌어졌던 그 무시무시한 대결과 굵고 짧았던 영광스런 현장에 자신이 함께하고 있음을 자각하면서 느꼈던 말로 형용키 어려운 감동과흥분. 그리고 어젯밤의 느닷없는 습격까지 모든 사건들이 현실의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왜 꼬마 사형은 그런 모습으로 남아있었으며, 제대로 거동도 못 했던 사고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왜자신들에게 이런 일들이 거푸 일어나는 것인지……. 너무 많은 일들이 너무도 짧은 시간 속에서 벌어져서 인지 두서없이 시작된 단상들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결과도 남기지 않은 채 머릿속에서 사라져 갔다.
‘나는 한 가지만 하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한다. 꼬마 사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낸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어떤 수모를 당해도 꼬마 사형만큼은 반드시……
손풍은 마음속으로 이 말만을 몇번이고 되뇌었다.
그리고 마침내,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누산산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