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49화
제 340 장 사중생로(1)
낙일방은 가슴이 답답했다. 해조림사조에게 종남파의 실전된 무공을 배운 이후 어떤 상황에서도 초조하거나 갑갑함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지금은 가슴이 터져나갈 듯 답답하고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마치 끝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깊고 깊은 수렁!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복면인들의 수는 여덟에 불과하지만 마치 수십수백의 인파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고,자신의 주위를 위협하는 것은 여덟 개의 검이 아니라 수백 수천개로 이루어진 검의 숲 같았다.
아무리 그 검의 숲에서 벗어나려애를 쓰고 몸부림에 가까운 격렬한 반항을 해보았지만,자신을 옥죄어오는 공세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이 떨어지면서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 고,하해와 같았던 공력 또한 점차바닥을 드러내면서 위험한 순간이 속출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양쪽 옆구리를 파고드는 검의 공세에 무심코 뒤로 한 걸 음 물러섰다가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검에 뒤통수를 그대로 꿰뚫릴뻔했다.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앞으로 엎어지다시피 하여 간신히 살인적인 일검을 피할 수 있었으나,그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려워져서 지금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방에서 날아드는 네 개의 검광을 상대해야만 했다.
“우야압!”
낙일방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두 주먹을 풍차처럼 마구 휘둘렀다.
만근거석이라도 박살 내버릴 만큼가공할 권풍이 구름처럼 일어났으나,어찌 된 일인지 그 권풍은 처음의 기세를 유지하지 못한 채 이내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네 개의 검광 또한 함께 모습을 감추었지만, 대신 두 개의 새로운 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목덜미와 아랫배를 향해날아들었다.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세찬 경력을 뿜어내고 매서운 공격을 날려도 그들의 검기에 닿는 순간 맥없이 사그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사이를 노리고 날카로운 반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펼치는 검에 특별한 기운이 어려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그들의 움직임에 기묘한 변화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진법 속에 갇힌 순간부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중압감을 느껴야 했고, 아무리 강한 공격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낙일방은 어렴풋이 그들 개개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형의 기공(氣功)이 어떤 역할을 하지 않을까 의심했으나, 정확한 진실이 무엇인지는 지금의 그로서는 알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정말 큰일나겠구나.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데……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다는 것은 확실했으나,좀처럼 뚜렷한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있다면 그것에 전력을 기울여 건곤일척의 승부라도 걸어볼 텐데,당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시 몇 초가 쏜살같이 흘러갔다.
언제부터인가 낙일방은 자신의 주먹에 제대로 진력이 실리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뻗는 주먹의 위세가 점차로 약해져서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기가 힘들어졌다.
온몸이 땀으로 흠백 젖어서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흥건한 물기가 사방으로 튀어 나갈 정도였다. 권법을 펼치는 속도가 그만큼 느려지며 제대로 힘이 담겨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흐르는 물기 또한 완벽하게 제어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압박해 오는 복면 인들의 검은 조금도 느려지거나 기세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속도가 빨라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파팟!
처음으로 낙일방은 다가오는 네 개의 검을 완벽히 피하지 못하고 그중한 검에 옆구리를 허락하고 말았다.
단순히 피육을 스친 상처에 불과했으나,지금까지 별다른 부상 없이 나름대로 완벽에 가까운 방어를 하고 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상처를 입자 낙일방은 정신이 번쩍들어 몸놀림이 순간적으로 빨라졌으나 그것도 잠시에 그칠 뿐이었고,오히려 복면인들의 공세가 한층 더빠르고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만 해도 그의 공격을 막거나 제어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복면 인들의 그의 약세를 확인하고는 본격적으로 살수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십여 초도 흐르지 않아 낙일방은 다시 삼검 (H劍)을 맞았고,상반신이 피투성이로 변해 버렸다. 그중 어느 것도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마지막의 일검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어서 상당히 위험한 순간을 맞이할 뻔했다.
“허억…… 허억!”
자신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것을 낙일방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숨 쉬는 것조차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버린 것이다.
이제는 낙일방도 최후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전되었던 문파의 비급을 전수 받고 대망을 가슴에 안은 채 장문사형을 따라 두 번째로 강호에 출도했을 때의 일이 아련한 과거처럼 여겨졌다. 서장을 비롯한 강호의 고수들과 거듭된 격전을 벌이면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당당한 무림인이 되었다는 자부심에 홀로 가슴 뿌듯한 적도 있었고,문파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중요한 싸움에 선봉으로 나서서 아까운 패배를 당하고 몇 날 며칠을 좌절한 적도 있었다.
이제 비로소 문파의 중흥에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게 되었는데,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강호행(江湖行)은 이곳이 종착역이 될 것 같았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복면 인들의 공세를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이 서게 되자, 낙일방은 오히려마음 한구석이 후련해졌다.
‘호남의 촌구석에서 천덕꾸러기로 태어난 내가 한순간이나마 강호의 정상을 꿈꾸는 고수가 되었으니,억울해할 것도 없다. 다만 더 이상 장문사형을 보필할 수 없게 될 것이 못내 아쉽구나.’
낙일방의 두 눈에 잠시 아련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그 빛은 이내 결연한 각오가 서린 눈빛으로 변해갔다.
‘갈 때 가더라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려줄 테다. 본 파를 건드린 대가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야 말겠다.’
흐느적거리면서도 계속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던 낙일방이 돌연 그 자리에 우뚝 몸을 멈춰 세웠다.
그의 전신을 노리고 다가오던 검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더욱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날아오는 검의 수가 몇 개인지는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뿌연 듯한 검광이 어른거리며 검들이 계속 위치를 바꾸어 연환(連環)하기에 멀껑한 상태였더라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낙일방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찌 보면 생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몸을 검날 아래 던지는 것 같은 모습이 었다.
그런 상태에서 낙일방은 오른손에 옥잠지를,왼손에 폭섬결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태인장의 구결들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복면인들의 진법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낙일방의 공격을 전혀 허용치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떠한 공격을 해도 마치 거대한 바닷물에 조약돌을 던진 것처럼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도록 하는 그 진법의 가공함이 낙일방을 이토록 구석에 몰아넣은 것이다.
접근을 허용치도 않고,아무리 강한 경력을 날려도 수렁에 빨아들인것처럼 흡수해 버리는 절진의 위력은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릴 정도였다.
하나 반대로 그들 또한 낙일방이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결정적인 공격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검이 낙일방의 몸에 직접 닿는 순간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었다.
만약 그들의 검이 낙일방의 몸을 직접적으로 타격하게 된다면,그 순간만큼은 그들 또한 낙일방에게 접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때 태인장의 가공할 장력으로 복면인들을 직접 가격하겠다는것이 낙일방의 의도였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어떤 식으로든 상대에게 한 방 먹이겠다는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지금의 낙일방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여덟 개의 장검이 수십 개의 검영을 뿌리며 사방에서 무서운속도로 다가왔다. 검마다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시퍼런 검기들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결정적인 기회를 잡은 복면인들이 끝장을 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싸?싸싸?싸?싸아
마치 대나무 숲을 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음향이 들리며 낙일방의 옷자 락이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했다.
채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검기만으로 옷자락이 베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낙일방은 그 자리에 우뚝선 채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두 눈마저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삶을 포기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낙일방은 두 눈을 감은 채 주위의 흐름에 신경을 기울였다.
‘아직이다. 아직……. 조금만
더…….,
그가 기다리는 것은 검날이 자신의 몸에 닿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나 어찌 된 일인지 금시라도 그의 몸을 처참하게 짓이길 듯하던 여덟개의 검들은 쉽게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검기들만이 그의 주위를 종횡으로 누비고 있을 뿐,검날이 그의 몸에 닿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낙일방은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경계하여 접근하지 않는단 말인가? 정말 지독한 자들이로구나.’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한 마지막시도마저 무위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시 낙일방의 마음은 암담함으로 물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낙일방은 금시라도 다가올 듯하다가 뒤로 물러나는 검의 움직임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이자들은 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아직도 간을 보고 있는 것일까? 왼쪽에 하나……
막 그의 왼쪽 옆구리를 파고들던 검이 옆구리에 혈선 하나만을 남겨놓은 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뒤이어 다시 하나의 검이 무서운 기세로 앞가슴을 찔러왔다.
‘앞쪽으로 둘…….,
그 검 또한 무방비 상태인 낙일방의 가슴을 관통할 수 있었음에도 단지 앞가슴에 선명한 혈흔만을 남기고 물러나 버렸다.
그 뒤로도 유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낙일방의 온몸은 이리저리 찔리고 베어져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했다.
하나 낙일방의 머리는 반대로 더할수 없이 맑고 개운해졌다.
‘오른쪽에 셋,좌측 상방에 넷,우측 하방에 다섯, 후면의
하단에 여섯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이릇한 생각이 계속 굴러가기 시작했다.
‘후면 상단에 일곱,여덟 번째는?
마지막은 어디냐?’
낙일방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주위를 떠도는 기세의 흔적을 파악하려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여덟 번째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수리에 여덟! 그래,이건 역팔괘(逆A卦)에 삼재(H才)를 더한 형상이로구나. 이와 비슷한 방식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낙일방의 뇌리 속으로 예전종남산의 동굴에서 자신에게 강호제문파의 무공에 대해 설명해 주던 해조림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공동파의 무공은 괴이하고 변칙적이다. 그들은 도문의 일원이 면서도 정상적인 일원,이극,삼재,사상,오행,육효,칠성,팔괘,구궁을 역팔괘,반구궁(反九宮)같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변형시켜 사용한다. 심지어는 칠성에 사상을 섞거나 팔괘에 삼재를 섞는 등의 극단적인 편법도 기꺼이 수용한다. 그들의 무공이 하나같이 도가의 무공답지 않게 편벽하고 괴이악랄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순간,낙일방은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여덟 명복면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자들은 공동파의 도인들이구나!’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들의 진법을 어떻게 파해해야 할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