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50화
제 340 장 사중생로(2)
공동파의 무공이 원래부터 그렇게 변칙으로 흘렀던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만 해도 공동파는 여타의 도문처럼 정통을 추구하는 문파였고,기 풍 또한 청정하고 무위자연(無爲_然)하는 도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나 청성파와 도의 이론(■論)에 대한 논쟁에서 참패를 한 후,공동파는 조금씩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패배의 원인을 도에 대한 깊이의 열세가 아닌 너무 순수하고 완고할 정도로 정도만을 걷으려는 자신들의 방식에 있다고 판단한 일부 도인들이 변화와 혁신을 부르짖으면서 노선을 바꾸게 되었다.
그들의 방식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자 점차로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풍조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고,종내에는 남들이 보기에 편법이라고 할 만큼 정도에서 벗어난 길을 걷는 일조차 조금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무공 면에서의 변화는 더욱 극적이 어서,처음에는 곤륜파 못지않게 차분하고 격조를 중시하던 공동파의 무공들이 좀 더 빠르고 강력한 위력을 추구하면서 난폭할 정도로 거칠고 괴이하게 변모되어갔다.
그중에는 상궤를 벗어난 파격적인 것들도 적지 않아서,아마도 공동파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구대문파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면 사도 (邪道)의 무공으로 오인받았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복마검법인데, 처음 창시되었을 때만 해도 도가의 대표적인 검법으로 추앙받을 만큼 도풍이 짙던 무공이었으나,나중에 여러 개의 살초들이 추가되면서 살기가 가득한 무시무시한 검법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중 후반의 세 초식은 구대문파의 수많은 절학들 중에서도 가장 살기가 짙고 잔인한 초식들로 알려져 있었는데,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복마삼절초(伏魔드絶招)였다. 특히 복마삼절초의 최고 초식인 만마복수는 한 사람이 펼쳐도 수 십 사람이 펼친 것처럼 변화가 다양하고 괴이무쌍해서 일단 펼쳐지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말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무공으로 이름이 높았다.
공동파의 도인 중 한 사람이 바로 그 점에 주목하여 만마복수를 토대로 하나의 절진을 구상하기 시작했는데, 당대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장될 위기에 처했던 그의 연구가 우연히 수뇌부의 눈에 띄게 되었다. 마침 타 문파의 절정고수를 상대할 절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그 수뇌는 그 구상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고,삼십 년의 노력과 수백 번의 거듭된 수정끝에 마침내 하나의 가공할 절진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공동파가 자랑하는 대일 인합격 진 인 관혼팔담진 이 었다.
진법의 이름에 ‘담(澤)’자가 들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으나, 관혼팔담진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손뼉을 치면서 그 이름의 적절함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담’이란 글자만큼 관혼팔담진의 진정한 모습을 잘 드러내는 단어는 없었다. 마치 끝없는 수 렁에 빠진 듯 절진에 갇힌 사람으로 하여금 좌절감을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더 이상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쓰러지게 만드는 이 절진의 무서움을 단적으로 표현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도문에는 잘 쓰지 않는 역팔괘에 삼재를 혼용한 이 절진은 단여덟 명만으로 상대의 숨통을 최후의 순간까지 조이는 윤회(輪M)의 지옥을 만들어냈다. 단순히 신체뿐아니라 마음까지도 벗어날 수 없는 수렁 속에 빠뜨려 마침내는 상대를 끝없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쓰러지게 만드는 그 가공할 위력 때문에 일부에서는 정파의 무공답지 않은 악랄하고 사악한 수법이라는 지탄을 받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공동파에서는 가급적이면이 절진을 공개적으로 대중들 앞에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자연히 관혼팔담진을 이루는 팔담검객들의 신상 또한 철저한 비밀에 싸이게 되었고,관혼팔담진의 악명과는 달리 실제로 이 진법을 직접목격한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하나 조금씩 강호에 퍼져나간은밀한 소문만으로도 이 절진의 무서움은 타 문파의 고수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낙일방이 거의 최후의 순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몰리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복면인들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도 단순히 그가 강호의 경력이 일천(티後)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나 일단 그들이 공동파의 고수들임을 알게 되자,낙일방은 암흑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무지 실체를 알 수 없었던 보이지 않는 존재의 모습을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확인하게 된것 같았다.
‘해 사조께서는 공동파 무공들이 괴이하고 편벽하게 변한 뒤로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생겼다고 하셨지. 그것은 그들이 빠름과 날카로움에 치중한 나머지 무거움과 단순함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며,그들의 무공에 조화와 중용이 빠진 이상 상극을 만나게 되며 오히려 너무도 허망하게 일패도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어. 그렇다면……
역팔괘의 반대는 순팔괘(順A卦)이다. 그리고 삼재를 포용하는것은 일원양의이다. 팔괘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일원태극(一元太極)에서 파생된 것이다.
자신이 아는 무공 중에는 팔괘와 일원,양의의 원리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은 없다. 아마 그런 무공은 천하의 어디에도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하나의 무공에 그 모두를 담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여덟 개의 검에 전신을 난자당하다시피 한 상태에서도 미동도 않고 있던 낙일방의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듯 앞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으나,조금씩 날카롭게 파고 들어온 수십 개의 검흔에 그의 몸에서는 단 한 군데도 멀쩡한 부위가 없을 정도였다.
피투성이로 변한 채 바닥으로 기울어지는 그의 몸은 마치 날갯짓하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던 종남파의 추락을 상징하는 듯했다.
막 땅에 쓰러질 듯하던 낙일방의 몸이 갑자기 크게 휘청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니,나뒹굴었다고 느낀 순간 낙일방의 신형은 어느새 땅을 박차고 허공을 비상하고 있었다.
그의 양손이 땅바닥을 가격하면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막 낙일방의 양쪽 옆구리로 다가왔던 두 개의 검이 빠른 속도로 물러나며 다시 몇 개의 검이 낙일방의 뒤를 맹렬하게 쫓아왔다.
하나 그때 먼지를 뚫고 허공으로 완전히 몸을 솟구친 낙일방은 신형을 뒤집어 몸을 똑바로 세우며 폭풍같은 기세로 쌍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두 손을 질풍처럼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처참하면서도 더할 수 없이 비장한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처럼 맹렬한 속도로 양손을 휘둘렀음에도 세찬 장력은 보이지 않았고, 위력적인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누가 보기에도 낙일방의 진력이 완전히 바닥이 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데,막 그의 목과 등을 노리고 검을 찔러오던 세 명의 복면인의 몸이 순간적으로 주춤거렸다. 그들의 앞에 퍼져 있는 뿌연 먼지의 한 공간이 작은 소용돌이를 이루며 묘한 기운이 그들의 검을 무겁게 짓눌러오는 것이다.
낙일방이 손을 휘두르는 곳과 소용돌이가 일어난 곳의 거리는 적지 않게 떨어져 있어서 둘 사이에 전혀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소용돌이의 흡입력이 대단해서 복면인들이 계속 검을 앞으로 찔러가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우옹!
마침 복면인 중 한 사람의 검이 소용돌이에 닿게 되었다. 그러자 소용돌이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복면 인의 전신을 그대로 뒤덮어 버렸다.
“어 엇?”
복면인의 입에서 처음으로 짧은 경호성이 흘러나왔다. 복면인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비틀어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려 했으나,그 순간 소용돌이 안에서 한 줄기 강력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쐐액!
그 기운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빠르게 튀어나왔는지라 팔담검객의 한 사람이며 공동파의 일대제자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검객이었던 경호조차도 일시지간 피할틈을 찾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력을 다해 자신의 수 중에 들린 검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 것뿐이었다.
경호의 손에 들린 장검이 강력한 기운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끝부분이 부러져 버렸다.
경호는 그 기운이 가공할 위력의 지공임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단순한 지공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떻게 선회하는 장법 안에 지공을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경호가 채 놀라운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두 명의 복면인이 소용돌이에 휘말렸다가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지공에 낭패를 당할 뻔했다. 그들 중 누구도 부상을 입거나 검을 놓친 사람은 없었으나,모두들 크게 놀란 듯 복면 사이로 보이는 두 눈에 경악의 빛이 담겨 있었다.
소용돌이는 이내 사라졌지만,지금까지 거칠 것 없이 무서운 기세로 낙일방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팔담검객들의 기세가 처음으로 주춤거리게 되었다.
다시 두 명의 복면인이 낙일방의 앞뒤를 노리고 빠르게 다가왔다.
낙일방은 미친 듯 휘두르던 양손을 멈춘 채 금시라도 쓰러질 듯 신형을 휘청거리면서도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시체처럼 핏기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에 유혈이 낭자한 몸이었으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매섭게 빛나고 있어서 그가 아직 승부를 포기한 것이 아님을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낙일방이 펼친 수법은 천둔장법 중의 조천와류에 옥잠지를 섞은 것으로,천둔장법은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는 절묘한 변화가 있는 반면에 위력이 떨어지는 면이 있어서 그동안 낙일방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팔괘와 역팔괘를 떠올리는 순간,천둔장법의 초식들이 하나같이 팔괘를 바탕으로 변화를 극대화 시키는 무공임을 생각해 낸 것이다.
낙일방은 먼저 흙먼지로 적들의 시야를 가린 다음 조천와류를 사용하면서 떨어지는 위력을 보완하기 위해 옥잠지의 구결을 추가했는데,그효과는 자신이 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더 탁월한 것이었다.
문제는 지금 낙일방의 진력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에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두 개의 검을 힐끗바라보는 낙일방의 두 눈에 한 줄기 결연한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팔담검객들은 낙일방의 기묘한 수 법에 세 명의 동료들이 낭패를 당한 광경을 목격했기에 마음속으로 그만큼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인지 낙일방의 앞뒤를 공격하는 두검객들의 손길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매서웠다. 더 이상의 반격을 용납지 않고 이제는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공격이었다.
두 개의 검이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낙일방이 돌연 몸을 반쯤 돌려 자신의 앞뒤를 날아오는 두 개의 검을 향해양손을 쭈욱 내뻗었다.
지금까지는 낙일방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경력에 따라 검이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며 그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는 했었다. 그런데 지금 낙일방의 손에는 일체의 공력이 담겨져있지 않았다. 그저 맨손을 검날 앞에 가져다 댄 것이다.
콱!
놀랍게도 낙일방의 양손에 두 개의 검이 그대로 붙잡히고 말았다.
상대가 발출하는 경력을 조종하여 기운을 흡수 내지는 반사시키는 관혼팔담진의 공세가 처음으로 막히게 된 것이다.
맨손으로 검날을 잡았음에도 낙일방의 손은 전혀 잘라지거나 베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천단신공조예가 경지에 도달해 굳이 묵령갑을 끼지 않고도 맨손으로 도검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묵통기를 숙달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낙일방이 묵령갑을 끼고 있었다면 팔담검객들도 검을 손으로 잡는 상황을 예견했을지 몰랐다. 하나낙일방의 손에는 어떠한 장갑도 끼어져 있지 않았기에 설마 그가 맨손으로 자신들의 장검을 그대로 움켜 잡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낙일방이 자신들의 검을 잡았음에도 두 명의 복면인들은 순간적으로 놀랐을 뿐,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에 다른 검객들의 검이 그의 전신을 그대로 갈라버릴 기세로 날아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양손으로 검을 잡아버렸기에 낙일방으로서는 더 이상 피하거나 막을 여지를 스스로 봉쇄해 버린 격이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