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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52화


제 341 장 회연전야(1)

서안의 밤거리는 흥겨움에 가득 차있었다. 한낮의 무더위가 사라지고 시원한 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서안의 밤은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모으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야등(夜M) 사이로 웃음 지으며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축제 전야를 보는 듯했다.

노해광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창문너머로 보이는 거리의 풍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문득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축제전야라. 확실히 누군가에게는 축제겠지. 그게 어느 쪽이 되느냐가 문제겠지만……

한쪽에서 조용히 시립해 있던 지일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노해광은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며 태사의에 가서 앉았다.

“아니다. 그보다 지시한 일은 알아보았느냐?”

“예. 그는 여전히 화산의 오운봉(五:雲聲) 밑의 산자락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 지내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일대는 화산파에서도 금지(禁地)로 정한 곳이라 출입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용케도 알아냈구나.”

지일환은 작은 눈을 반짝이며 히죽웃었다.

“화산파의 주방에 식자재를 배달하는 포송이란 자를 운 좋게 포섭할 수 있었습니다. 화산파에서는 닷새에 한 번씩 오운봉의 암자로 식재료를 보급하고 있는데,마침 어제가 그 날이었습니다. 포송은 비록그 보급처까지 따라가지는 못했으나,보급을 담당했던 화산파의 제자 에게서 ‘사조께서 아직도 정정해 보이시며,기력이 좋으신 듯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흠.”

노해광은 침음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해광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검단현의 스승인 한 천검 한세일이었다. 노해광은 내일로 다가온 회람연에서 혹시라도 한 세일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화산파의 다른 고수들에게는 나름의 대비책이 있지만,한세일은 맞설만한 인물이 마땅히 없기 때문이었다.

배분으로 보자면 당연히 전풍개가 나서야 하지만,전풍개는 따로 상대할 자가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전풍개의 실력으로 한세일을 감당할수 있을지 노해광은 선뜻 장담할 수 없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용진산이 자리를 비운 지금,화산파에 남은 고수중 제일의 실력자라면 많은 사람들이 수석장로인 십지매화검 선우정을 꼽을 것이다. 하나 노해광은 한세일이야말로 선우정을 능가하는 최고의 고수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한세일은 오랜 기간 동안 오운봉 아래에 칩거하고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이다.

칩거하기 전에도 한세일은 자타가 공인하는 화산파 제일의 검객이었다. 그의 성격상 그동안 놀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이십여 년간 화산의 외진 구석에서 검을 갈고 닦았을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 일이었다.

칩거에 들어갈 때 스스로의 입으로

‘앞으로 두 번 다시 강호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말하기는 했으나,노해광은 만에 하나 그가 출전할 경우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회람연은 화산파의 명운이 걸리다시피 한 중대사이기에 화산파를 끔쩍이도 아끼는 한세일이라면 스스로의 말을 번복하고 칩거를 쩔 가능성도 다분히 있었다.

‘어제까지도 한세일이 칩거지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번에 안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겠군. 자신이 없어도 충분히 본 파를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종남파와 화산파의 회람연은 이미섬서성 일대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종남파가 최근에 무섭게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구대문파 중에서도 전통의 명문인 화산파에 상대가 되겠느냐는 의견이 더 우세했으나,불과 며칠전에 무당산에서 종남파가 형산파를 격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오히려 종남파 쪽으로 조금씩 무게추가 쏠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무당산의 대집회에서 종남파가 형산파를 상대로 다섯 번의 격전을 벌인 끝에 짜릿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은 무림인들뿐 아니라 서안의 모든 사람들을 경악과 흥분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형산파는 비록 가장 늦게 구대문파에 속하게 되었으나, 그 세력만큼은 소림과 무당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성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특이한 청삼과 청건,그리고 푸른 수실이 매달린 장검은 뭇 강호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으며,그중에서도 형산파의 최고수인 오결검객의 위명은 강호를 진동시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혹자들은 앞으로 십 년 안에 형산파가 소림이나 무당을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멸문의 위기에 처해 있던 종남파가 기적적으로 회생한 데 이어 거대문파로 성장하고 있는 형산파마저 꺾었다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형산파에서는 이번에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종남파에 승리하기 위해 자파에서 가장 어른이며 무림구봉 중의 일인인 지봉 용선생을 선봉으로 내세우는 최강수를 펼쳤으며, 그 외에도 오결검객 중에서도 죄고의 고수들을 줄지어 줄전시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형산파사상 최초로 배출된 육결검객마저아낌없이 내보냈음에도 결국은 종남파에 무릎을 꿇고 말았으니,그 충격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실로 무림 전체가 그 일로 경동(,動)하고 있었다.

서안의 누구보다도 그 소식을 일찍접한 노해광조차도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믿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다시 되물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소식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을 때, 노해광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세차게 떨고 말았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이 그의 가슴속을 이리저리 휘몰아쳤다.

‘결국은…… 결국은 해냈구나!’

기산취악으로부터 이십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끝없는 고통과 인고의 세월을 겪어왔던 종남파가 마침내 그 무거운 사슬을 스스로의 힘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그때 그의 심정을 무어라고 해야할까?

정말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점점 기울어가는 문파와 미래가 없는 암담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실연(失■)을 핑계로 종남산을 등지게 되었을 때부터 아무런 목적도 없이 강호를 유람하며 겪었던 많은 방황과 시련,그리고 문득 되돌아온 서 안에서 한 줄기 서광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쫓아오기까지의 모든 일들이 하나하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얼굴들…….

구대문파에서 쫓겨난 상실감과 자책감에 괴로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회한에 찬 마지막 숨결을 내뱉으며 숨을 거둔 선사 하원지, 갑작스레맡게 된 장문인의 지위에 버거워하면서도 문파의 부흥을 위해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형 임장흥, 종남파의 부흥을 확신하고 기꺼이 한목숨을 바쳐 문파의 법도를 세우려 했던 사제 백동일, 그리고 지금이 순간까지도 형산파에 복수할 그날을 기다리며 검을 닦고 있을 늙은 사숙 전풍개의 주름진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얼굴도 있고,그리운 얼굴도 있으며,가슴 아픈얼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종남파의 부흥을 위해각기 다른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간절한 염원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오늘의 현실을 이루어낸 것이리라.

노해광이 격동하는 마음을 다스린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장문사질을 비롯해 강호행을 떠난제자들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정말 훌륭하게 해내었다.

이제는 자신의 일이 남아있다. 그들에 부끄럽지 않도록 화산파와의 이번 회람연을 완벽하게 치러 내야하는 것이다.

그래야 홋날 그리운 얼굴들을 떳떳한 모습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노해광은 다시 한 번 이번 회람연에 대해 다각도로 연구하고 검토에 검토를 거듭했다. 실낱같은 착오라도 자칫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에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 최선을 기울였다. 아무리 사소한 변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제 하룻밤만 지나면 그의 그런 노력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증명될 것이다.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종남파가 형산파를 꺾었다는 그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화산파에 대한 희미한 두려움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단지 여섯 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강호행을 시작하여 무수한 적들을 물리치고 끝내는 강호에 전설을 만들어 낸 제자들이 있다. 더구나 그들 중 두 명은 무공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들이었다.

본산의 모든 지원을 받고 더불어자신의 안방과도 같은 서안에서 철저한 준비를 하고도 패한다면 무슨낯으로 돌아오는 제자들을 볼 수 있겠 는가?

노해광은 지일환에게 정해를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지일환이 집무실을 나가자 잠시 태사의에 몸을 묻은 노해광은 양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며칠 동안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머리가 무거워진 것 같았다.

가만히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 노해광의 두 눈에는 복잡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검단현이 무슨 수를 쓰든 그에 대한 대비는 모두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럼에도 불길한 마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

검단현은 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그만큼 그에 대해서는 철저한 연구가 되어 있었다. 젊었을 적부터 그와 몇 번의 크고 작은 충돌을 벌였던 노해광은 종남파에 다시 몸을 담기로 한 순간부터 언젠가는 검단현이 다시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그에 대한 대비를 해왔다.

화산파의 전력 또한 상세한 분석을 마친 후였다.

화산파는 최근 벌어진 일련의 일들로 문파의 기세가 한풀 꺾였음이 분명했다. 멀리는 장로인 사익의 갑작스런 변사로 시작된 취미사혈겁으로 인한 매장원의 이탈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뒤이어 노해광과 서안에서 다툼을 벌이면서 장로 및 일대제자들의 상당수가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더구나 무당산의 집회 때문에 장문인이자 화산파 최고의 고수인 용진 산마저 자리를 비운 상태여서 한창때에 비하면 오 할에 가까운 공백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산파는 여전히 강했다.

남아 있는 전력만으로도 구대문파중 소림과 무당,형산파를 제외하고는 어느 문파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문하제자가 십여 명뿐이고 가동할수 있는 고수의 수가 지극히 한정적인 종남파의 입장에서는 화산파와의 정면충돌은 무조건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번 회람연이 그만큼 중요했다. 무리한 정면충돌을 하지 않고도 화산파와 자웅을 겨루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주위의 분위기도 좋았다.

이제는 서안의 어느 누구도 종남파를 화산파의 아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무당산에서 벌인 쾌거로 인해 오히려 종남파를 더 위에 두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만약 회람연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벌인다면,적어도 서안 일대에서는 종남파가 화산파보다 우위에 있음을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만에 하나 불행한 결과를 맺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물론이고 형산파를 꺾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는 종남파의 위상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로 자칫 종남파의 구대문파 복귀가 힘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일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그것이 노해광으로 하여금 며칠째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문파의 부흥이 온통 자신의 양어깨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자 노해광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낄 수 없었고,아무리 흥겨운 일을 벌여도 즐겁지가 않았다. 그리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노해광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단 며칠만으로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장문사질은 지난 몇 년 동안 문파의 모든 사활을 혼자서 지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젊은 나이에 그게 가능키나 한 일일까? 어떻게 이런 부담감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그 말이 없고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는 장문사질의 모습이 무척이나 보고 싶어졌다.

‘장문사질의 앞길에 장애물이 될 수는 없다. 한 번만 더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해보자:

노해광이 마음을 가다듬고 태사의에서 일어났을 때,마침 정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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