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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53화


제 341 장 회연전야(2)

“부르셨습니까, 사숙?”

정해는 종남파에 복귀한 뒤로 제법살집이 오르고 자세에도 여유가 풍겨서 관록이 붙은 모습이었다. 종남파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요즘에는 태도 하나하나에도 신중함과 지혜로 움이 엿보여서 노해광이 더욱 듬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수많은 군응들 앞에서 벌어진 무당산의 비무에서 종남파가 형산파를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로는 몸가짐이 더욱 의젓해지고 당당해져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강호인을 보는것 같았다.

성격적으로 소심한 구석이 있는 정해였기에 만약 종남파가 지금처럼 성세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면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였을지도 몰랐다.

정해를 바라보는 노해광의 눈빛에는 신뢰와 호감이 빛이 담겨 있었다. 좀처럼 남을 믿지 않는 노해광에게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리 와 앉거라. 너에게 부탁할일이 있어서 오라고 했다.”

정해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부탁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제게 지시하실 게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허헛. 이제는 제법 수단 좋은 장사꾼 냄새가 나는구나.”

정해가 질색을 하며 도리질을 했다.

“장사꾼이라니요? 저도 엄연한 무림인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사숙조앞에서는 그런 말씀을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제가 사숙조께 크게 경을 치고 말 겁니다.”

그 말에 노해광은 껄껄 소리 내어웃고 말았다.

“하하. 엄살을 피우기는. 사숙께서 비록 엄격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하나의 문파를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너나 나 같은 존재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계시니 너무걱정할 필요 없다.”

정해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가끔 사숙조님을 될 때마다 제가 무공에 소홀한 점을 못마땅해 하시는 것 같아 송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무공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으니 저도 참 답답하더군요.”

“사람이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겠느냐? 너의 그 대단한 장문사형도 돈 벌어오는 일을 맡기면 아주 질색을 할 것이다. 사람마다 다 쓰임새가 다른 법이니 너는 그 점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마라.”

“부끄럽기보다는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다른 동문 사형제들을 볼 때마다 조금씩 뒤처지는것 같아 부럽기도 하고,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생깁니다. 제가 좀더 무공에 재질이 있었으면 본 파에 적지 않은 힘이 되었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노해광은 그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너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

본 파의 누구도 네가 본 파에 큰힘이 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

이다.,,

정해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번에 화산파와의 회람연이 코앞에 닥치고 나니 무림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스스로의 무공이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군요.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잔재주를 부려도 본신의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결과를 내기 힘드니 말입니다.”

“그 머리 굴리고 잔재주를 피우는것도 본신의 실력이다. 각자가 서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그뿐이다. 장문사질이나 소지산 같은 녀석들이 무공으로 본 파를 이끌고 있다면,뒤에서 그들이 차질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묵묵히 지원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이다. 우리는 결코 앞으로 나서서 공을 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노해광의 묵직한 말에 정해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사숙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우리끼리 조출하게 술잔이라도 기울이도록 하자.”

“그런데 제게 시키실 일이 무엇입니까?”

노해광의 시선이 문득 정해의 두눈에 고정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이었다. 정해는 노해광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전혀 흔들리거나 꺼려 하는 기색 없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언뜻 노해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제법 배짱이 커진 모양이구나.”

“사숙께 하도 단련을 받아서 이제는 아무리 무서운 눈빛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노해광의 음성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배짱이 필요한 일이다.”

정해의 표정 또한 어느새 진지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겠군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중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흥미가 이는군요.”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애써 해놓은 일이 아무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최후의 대비책 같은 거로군요. 제가 꼭 맡고 싶던 일이었습니다.”

노해광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남의 속을 몰래 들여다보는 너구리 같은 놈이로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물론 칭찬이다. 너하고는 확실히 말하기가 편하구나. 조금만 더 배짱을 기르고,은밀한 술수에 능해진다면 능히 내 뒤를 이을 만하겠다.”

정해는 의외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사숙께서 일은 일대로 다 하시면서 그만큼의 호평을 받지 못하는 걸 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사숙처럼 갖은 비난을 다 들으면서도 태연히 버틸 수 있을 만큼얼굴이 두껍지 못합니다.”

“하하……. 정말 내 뱃속의 회충같은 놈이로구나.”

정해의 얼굴이 처음으로 울상이 되었다.

“너구리는 몰라도 회충은 좀……

“그만큼 네놈이 내 사정을 잘 꿰뚫어보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확실히 나는 주위에서 이런저런 욕을 하도 많이 들어서 누구보다 오래 살 자신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이 비록 남에게 욕을 많이 먹고 환호를 받지도 못하는 것이지만,그래도 나름대로의 보람은 있다. 무엇보다 본 파가 강호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정해는 엄숙한 얼굴로 노해광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사숙께서 본 파를 위해 주위의 비난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를 기꺼이 진흙탕 속에 던지셨다는 것을 잘알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본파의 제자들은 모두 그런 사숙께 깊은 고마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낯간지러운 말은 할 필요 없다.

비난과 욕설이야말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자양분이나 마찬가지다. 적어도 아직은 살아있다는 생생한 증거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번에 네게 맡길 일이 그러하다. 일이 잘되어봤자 기껏해야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모든 오물을 네가 다 뒤집어써야만 한다.”

“게다가 그 일 자체가 필요 없게 될 확률도 농후하다. 그야말로 힘은 힘대로 들고 결과의 달콤함은 맛볼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하겠느냐?”

정해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꼭 해내겠습니다.”

노해광은 정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에 눈꼬리가 살짝 아래로 처져서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체구 또한 그리 크지 않았고,무공실력은 같은 배분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뒤떨어졌다.

자신의 말대로 머리 굴리는 일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외모였지만,종남파를 주목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궤령낭군이라 부르며 경원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노해광은 그동안 정해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에 그가 실제의 성격도 인상처럼 순후했고,겁도 많은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나 또한 그가 얼마나 종남파를 아끼고 사랑하며, 종남파의 부흥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종남파가 멸문의 위기에 처하고 다른 사형제들이 고난의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자신은 아리따운 신부를 맞아들이고 행복한 신혼 생활을 꾸렸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정해는 늘 다른 사형제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종남파의 안살림을 꾸려가는 데 매진해 왔다.

노해광은 정해의 반짝이는 두 눈과 굳게 다물어진 의지 가득한 입술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잘해낼 것이다. 장안부의 관리 중에 강염이란 자가 있다정해가 노해광의 지시를 받고 집무실을 벗어난 직후,다시 한 사람이 그의 방을 찾아왔다.

그를 보자 노해광은 편한 자세로 앉아있던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나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어서 오십시오,사숙.”

들어온 사람은 전풍개였다.

전풍개는 노해광의 인사를 받는 둥마는 둥 하고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매서운 눈으로 노해광을 노려보았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노해광은 이미 전풍개가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짐작이 가면서도 겉으로는 조용한 음성으로 되물었

“무슨 말씀이신지요?”

노해광을 쏘아보는 전풍개의 눈초리가 어찌나 날카롭고 사나웠던지 흡사 철천지원수를 보는 것 같았다.

“내일 회람연에 삼대삼의 비무를 제안할 거라며? 그 비무에 나갈 자로 하동원과 소지산,그리고 응계성이란 녀석을 정했다는 게 사실이냐?”

노해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풍개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돌연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변했

“네가 생각 없이 일을 벌이는 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전풍개의 음성이 평소와 달리 부드럽게 변했으나,노해광은 이것이 전풍개가 극도로 화가 났을 때 최후로 화를 억누르는 모습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억눌렀던 화가 폭발할 때는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함이 몰아닥칠 것이다.

“지산은 노부도 인정하는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으니 선정된 것이 당연하고,동원 또한 비록 행실이 가볍기는 하나 수십 년간 노력을 게을 리하지 않았으니 어느 정도의 모자 람이 있더라도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문파에서 뛰쳐나가 상가의 개가 된 놈을 이런 중대한 비무에 내보내려 하다니. 어찌 된 연유인지 소상히 밝히도록 해라.”

전풍개의 말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억눌렀던 하를 터뜨리고야 말겠다는 선전포고였다.

그런 전풍개를 바라보는 노해광의 시선은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차분한 시선을 받자 전풍개는 격동했던 마음이 점차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동안 노해광이란 인물이 전풍개에게 쌓아놓은 신뢰 때문이었다. 노해광은 결코 엉뚱한 판단을 하거나 경솔한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해광은 그의 그런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제가 내일의 회람연에서 검단현에게 삼대삼의 제의를 할 계획인 건 분명합니다. 아마 검단현은 수락하든 수락하지 않든 나름의 복안을 가지고 선택을 할 것입니다.”

전풍개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노해광의 말 속에서 묘한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검단현이 그 제의를 수락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검단현이 지금 현재가장 주목하는 것은 본 파에 쓸만한 고수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비무에 참가할 숫자를 늘릴수록 화산파에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 있지요.”

확실히 노해광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강호행을 떠난 제자들이 합류하지 못하는 지금,종남파의 고수들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물론 본산의 제자들을 제외한 빈객이나 노해광의 수하들은 적지 않은 수가 있지 만,화산파와의 회람연에 그들을 출전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반면에 본 파의 제안을 수락한다면 이견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기에 그 제안을 승낙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손가전장의 애송이를 쓰겠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놈이 그동안 손가전장에서 무슨희대의 무공을 익혔는지는 모르지 만,그놈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화산파의 고수를 상대로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지든 이기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승부는 다른 쪽에서 판가름날 테니 말입니다.”

전풍개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동원을 믿고 있는 것이라면 너무경솔한 판단이다. 그 녀석의 실력이 나름대로 뛰어나기는 하지만,화산파의 고수를 상대로 무조건적인 승리를 장담하기는 힘들다.”

“승리는 힘들어도 지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일전에 동원에게서 묘한 말을 들었습니다. 성 사형과 자주 대련을 하다 보니 너무 많이 패한 게 분하고 억울해서 쉽게 패하지 않는 방법을 연구해 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 사형 수준의 고수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는 방법을 만들어냈다고 하더군요.”

전풍개의 표정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그 녀석이 쓸데없는 재주 몇 가지를 가지고 있는 건 알고 있지. 그게 과연 화산파의 고수들에게도 통용될수 있겠느냐? 그리고 일단 네 말이 맞다고 해도 그걸로 화산파와의 비무에서 승리하지는 못할 게 아니냐?”

노해광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그래서 사숙의 역할이 중요합니

“내 역할이라니?”

“검단현이 삼대삼의 비무를 승낙한다면 제 목표는 그 비무에서 한 번이기고 한 번 비겨서 무승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최후의 승부 하나로 모든 걸 결정지을 수 있게 됩니다.”

“음!”

전풍개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노해광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사숙께 마지막 승부를 걸어볼 생각입니다. 고수가 많아서 출전자를 예측하기 힘든 화산파를 좁은 골목으로 몰아넣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니 말입니다.”

전풍개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했다.

하나 어디에서 조금 전과 같은 분기 어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막상 자신에게 누구보다 무거운 짐이 주어지자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전풍개의 모습을 노해광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종남파의 명운을 걸고 화산파와 마지막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점 때문에 전풍개는 미처 한 가지 질문을 마저 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검단현이 노해광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노해광은 그것에 대한 비책을 전풍개에게 발설하지 않게 된 것에 마음 깊숙이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비책의 주인공은 전풍개가 아닌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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