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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55화


제 342 장 흉살지계(2)

두기춘은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세상에 거저 얻는 것은 없는 법이다. 검단현의 입에서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걱정스러웠지만,태청강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해내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말씀하십시오.”

검단현은 비장함마저 엿보이는 두기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종남파를 멸문시켜야겠다.”

두기춘은 검단현이 무슨 말을 하든 기꺼이 들어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지금 이 순간만큼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헬쑥하게 굳어지며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검단현의 음성은 나직했지만,두기 춘의 귀에는 세상의 어떤 고함보다도 거대하게 들렸다.

“이번에 종남파의 본산을 없애야겠다는 뜻이다. 주춧돌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모두 다.”

두기춘은 검단현의 냉혹하리만치냉정한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가 무언가에 억눌린 사람처럼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게 가능하리라고 보십니까?”

검단현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내일은 가능하다. 회람연 때문에 종남파의 고수들은 대부분 본산을 비울 테니 말이다.”

두기춘의 눈이 부릅떠졌다.

물론 내일 종남파의 본산은 어느때보다 방비가 허술할 것이다. 화산파와의 회람연은 종남파로서도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는 중대사였다.

장문인을 비롯한 주력 인물들이 강호행을 떠난 지금,종남파는 화산파를 상대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전력을 기울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종남파의 본산을 공격하는 일은 어쩌면 생각보다 수월한 일일지 모른다.

하나 과연 그게 강호에서 용납될수 있는 일일까? 명문정파 사이에 중요한 회합을 하면서 뒤로는 상대의 빈집을 터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두기춘은 그 일의 성사 가능성 이전에 그와 같은 발상을 한 검단현이 란 인간에 대해 새삼 두려움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고하기로 이름 높은 화산파의 수 뇌 중 한 사람인 그가 강호의 도의 (道義)를 저버리고 흑도의 무리들도 감히 하지 못할 만행을 저지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현재의 그 누구도 그의 이러한 계획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기에 저지 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검단현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뜩였다.

“어떠냐? 해보겠느냐?”

두기춘의 몸이 바짝 긴장되었다.

단순한 질문이었으나,대답 여하에 따라 자신의 신상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검단현의 제의를 승낙하면 그는 화산파의 최고 무공 중 하나를 익힐수 있을 뿐 아니라,그토록 원하던 화산파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하나 만약 거절하게 된다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기회는 잡지 못할 것이며,평생 동안 화산파의 변두리에서 남의 뒤치다꺼리나하며 살게 될 것이다.

단지 그뿐일까?

자신의 제의를 거절한 제자를 검단현이 순순히 놔두겠는가? 정파인(IE 派人)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추악한 계획을 알고 있는 자를 과연 내버려두려 하겠는가?

어떤 식으로든 입을 다물게 하려고 할 것이며,비밀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살인멸구(殺人滅 □)는 예로부터 가장 전통적이고 확실한 비밀엄수방법 중 하나였다.

검단현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그러한 방법을 쓸 것이다. 벌써부터 두기춘을 응시하는 검단현의 눈가에 은은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지 않은가?

살아서 영화를 누리겠는가? 아니면 죽어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지겠는가?

선택의 기로에서 두기춘은 고심할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의 고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사실은 선택이 아니다. 이미내가 택할 길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검단현이 늦은 밤에 두기춘을 불렀을 때부터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니 신산 곡수가 죽고 검단현이 서안의 책임자로 내려왔을 때부터,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진산월이 먹었어야 할 만년삼정을 몰래 훔쳐 먹고 종남산을 도망쳐 내려왔을 때부터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한동안 고민에 차 있던 두기춘의 표정이 차츰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검단현은 복잡한 기색이 가득하던 두기춘의 얼굴에 점차로 표정이 사라지며 무심한 모습으로 변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의 눈가에 어른거렸던 살기 어린 빛 또한 사라져 갔다.

검단현은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내밀었다.

두기춘이 받아보자 십여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두기춘은 이내 그 이름에서 공통점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섬서성 이북이나 산서 성 일대에서 활약하는 떠돌이 낭인들이며,또한 그들이 한때 화산파의 속가제자였으나 비밀스런 이유로 파문된 자들임을 알아본 것이다.

“내일 이들과 함께 종남산으로 가

“종남파의 고수들이 회람연에 참석하기 위해 산을 내려가면 한 시진 후에 종남파의 본산을 공격해라. 그곳에 남아 있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고,모든 전각과 건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태우도록 해라.”

한 자 한 자 분명한 음성으로 말하는 검단현의 모습은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혈인간 같았다.

한 문파의 본산이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불태워진다는 것은 그 문파에게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동안 쌓아놓은 모든 것이 송두리째사라짐으로써 문파의 정통성 또한 영영 회복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회람연에서 패하고 본산마저 남아있는 제자들과 함께 한 줌의 젓더미로 변해 버린다면 제아무리 형산파를 꺾고 천지를 뒤흔드는 명성을 쌓았다고 해도 종남파의 위상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본산조차 지키지 못하는 문파가 어찌 강호에서 명문정파라고 행세할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검단현의 계획은 그무모함 만큼이나 효과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기춘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예의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종남파의 주력이 빠져나갔다고 해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적지 않은 고수들이 남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 몇 명의 제자들과 빈객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외에 얼마 전부터 종종 정체 모를 자들이 종남파 일대를 서성이고 있는데,그 수가 제법 된다고 알고 있다.”

검단현이 파악한 자들은 다름 아닌수신대원들이었다. 초가보가 멸망한 후 초가보주의 아들인 방화를 찾아종남파로 들어온 그들은 그 후로 줄곧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종남파를 지켜 왔다.

서른 명의 수신대원들 중 절반은 얼마 전에 대주인 혈화창 우문화룡을 따라 서안으로 내려갔으나, 나머지 열다섯 명은 아직도 종남파의 본산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다.

검단현은 그들이 과거 초가보주의 최측근 수하들인 수신대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으나,그들 개개인이 제법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며 현재 몇 명이 종남파에 남아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 열다섯에 빈객과 제자들을 합쳐서 내일 종남파의 본산을 지키는 자들의 수는 많아야 스물다섯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일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검단현이 두기춘에게 준 명단에 적힌 자들은 화산파에서 비밀스런 일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히 키운 고수들로,강호에 퍼져있는 명성에 비해훨씬 더 고강한 무공을 지닌 실력자 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임독양맥을 타통해 일류고수의 수준을 넘어선 두기춘도 승산을 장담하기 어려운 무공의 소유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두기춘의 표정은 여전히 신중했다.

“이들만으로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강호의 일은 워낙 예측하기 힘드니 말입니다.”

검단현은 선뜻 그 의견에 수긍을했다. 오히려 그런 신중함이 더욱마음에 드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들 외에 한 사람을 더지원해 줄 생각이다.”

“그가 누구입니까?”

검단현은 문득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오게.”

방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열린 문 사이로 불어오는 밤바람에 유등 속의 나비가 한층 더 세차게 파득거렸고,그만큼 어지러운 그림자가 방안을 이리저리 휘돌아다녔다. 벽을 따라 일렁이는 그림자 사이로 방안에 들어온 사람의 하얀 옷자락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흐릿한 불빛 아래 드러난 그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이제껏 냉정함을 잃지 않고 있던 두기춘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악살……

그 사람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왠지 모르게 보는 이의 가슴에 섬뜩함을 남기는 차갑고 살벌한 웃음이었다.

“맞아. 내가 바로 장병기야.”

그는 다름 아닌 소문삼살의 막내인악살 장병기였던 것이다.

두기춘이 물러간 후,장병기는 검단현의 앞에 가서 태연한 표정으로 앉았다.

“애송이치고는 눈빛이 제법 살아있군. 화산파의 일대제자 다운 기백이 보이는걸.”

검단현은 아무 대꾸도 없이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장병기는 싱겁게 히죽 웃었다.

“걱정 마시오. 맡은 일은 철저하게 해낼 테니. 내일 적어도 종남파에서 숨을 쉬고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게 될 거요.”

문득 검단현은 힐끔 그를 돌아보았다.

“그 일은 걱정하지 않네.”

“그럼 무엇이 그리도 신경 쓰이는거요?”

“자네 눈에 그렇게 보이나?”

“그렇소.”

“신경 쓰는 일이야 많이 있지. 자네도 있지 않나?”

웃음기가 감돌았던 장병기의 얼굴이 가면을 씌운 것처럼 딱딱하게 변했다.

마강의 청부를 받고 흑선방의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나섰다가 검마의 아들에게 막혀 도망치듯 몸을 빼야 했던 일은 그에게는 너무도 커다란 치욕이었다. 그 원한을 갚기 위해 서안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검단현이 접촉해 오자 주저하지 않고 선뜻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높은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만큼 장병기는 자신의 상처를 헤집는 듯한 검단현의 말에 불쑥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나 검단현은 아무리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장병기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장병기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는 것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현했다.

“흥.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시오.

어쨌든 나는 내 할 일만 해치우면 그만이니.”

“나도 그 이상은 바라지 않네. 명심하게,종남파의 인물은 단 한 명도 살려두어서는 안 되네.”

장병기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거듭 확인하는 검단현의 말이 의아한 듯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하고 싶은 게 뭐요?”

“방금 나간 그자는 원래 종남파의 제자였네.”

장병기의 얼굴에 피식 미소가 걸렸다.

“종남파의 제자가 화산파로 들어왔다가 원래의 문파를 멸문하는데 선 봉에 섰다는 말이오? 명문정파의 제자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한 행적인데?”

다분히 비꼬임이 가득 담긴 그의 말에도 검단현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오늘부로 그는 본 파에서 파문당할 걸세. 정식으로 파문장이 발송되는 것은 며칠 후가 되겠지 만,거기에 적힌 파문일자는 오늘이 될 걸세.”

“그건 또 무슨 꿍꿍이요?”

“종남파에서는 아직 그를 정식으로 파문하지 않았네. 다시 말해서 본파에서 파문당하게 되면 그는 종남파에 적을 둔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걸세.”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장병기는 손뼉을 탁 치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하핫! 정말 정파의 행사는 못 따라가겠는걸. 이렇게 혁신적인 방법을 쓰다니,이 정도면 가히 토사구팽(鬼死約意)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고 할 만하오.”

장병기의 웃음에는 비웃음과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으나,검단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았다.

종남파의 제자는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아야 한다는 내 말을 잊지말게.”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나저나 이번 일을 해내면 그자에게 뭘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자신의 이름까지 걸었던 것 같던데.”

“때로는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약속도 있는 법이지.”

장병기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흐흐. 죽은 자와의 약속 같은 거말이오? 그나저나 내일이 정말 기대되는군. 그자의 마지막 표정을 보고 싶어 벌써부터 견딜 수가 없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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