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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56화


제 343 장 여인원정(1)

임영옥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담한 방이었다.

별다른 장식은 없었으나,그리 넓지 않은 크기에 꼭 필요한 물건들만 배치되어 있어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누워있는 침상을 살펴보았다. 비단금침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제법 질 좋은 천을 이중으로 겹친 이불은 깔끔해 보였고,침상주위도 먼지 한 롤 없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임영옥은 다시 베개에 머리를 기댄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조금 전 이었다. 마안의 객잔에서 갑작스런 습격을 당한 것이 꿈속의 일처럼 생각되 었다.

습격은 철저히 계획된 것이어서 종남파 고수들은 각기 다른 상대들과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다.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낙일방마저 꼼짝할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그녀의 앞을 막아서 준 것은 뜻밖에도 종남파의 가장 어린 제자 두 사람이었다.

그들의 충정(忠i靑)은 너무도 고마운 것이었으나,그 상태가 지속된다면 아까운 두 사람의 목숨은 헛되이 사라질 것이 너무도 뻔했다. 그래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 그녀는 위험천만한 도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역량으로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유소응이 적들을 안내해 오자 문밖에 손풍이 남아있음에도 강제로 문을 닫은 것이다.

유소응이 안으로 들어온 순간,그녀는 칠음진기로 유소응의 마혈을 제압했다. 유소응의 체내에 들여보낸 칠음진기가 그의 심맥을 보호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로 유소응의 몸을 꽁꽁 싸떴다. 그것이 절박한 순간에 그녀가 그의 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복면인과 궁장여인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려 했을 때,그녀는 그동안 선천진기로 억지로 틀어막고 있던 체내의 음기를 발줄시켰다. 선천진기에 억눌려 있던 음기가 폭발하게 되자 그 여파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있던 방안은 폭발하는 음기에 송두리째 박살 나 버렸고,그녀를 공격해 들어왔던 두 명의 남녀 또한 그 음기의 폭풍에 휩쓸려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하나 그 폭발의 여파를 가장 강하게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임영옥자신이었다. 억지로 막고 있던 음기가 분출되자 그녀는 더 이상 그 음기를 통솔하거나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전신은 몸속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음기의 통로가 되어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력을 다해 그곳을 벗어나는 일뿐이었다. 자신을 쫓아오는 두 명의 남녀를 뒤에 매달고 그녀는 사력을 기울여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방향이나 주위의 지리는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폭발하는 음기의 분출로 그녀가 펼치는 신법의 속도는 그야말로 가공스러운 것이어서 그녀를 쫓던 두 남녀의 신화경에 달한 무공으로도 쉽게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그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무작정 앞으로 앞으로만 몸을 날릴 뿐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문득 어느 순간에,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것을 느꼈다.

“임 소저……

그 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들은 것 같았으나,그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그 사람의 품에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깨어난 그녀는 곰곰이 당시의 일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하나 텅 빈 머리는 백지장처럼 아 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성별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자의 품에 쓰러질 때 맡았던 은은한 향기가 떠올랐다. 그향기는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마지막에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임영옥이 정신을 차린 것을 알고는 이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임 소저. 깨어났군요.

새하얀 백의를 곱게 차려 입은 그사람은 다름 아닌 천봉팔선자 중의 첫째인 백봉 정소소였다.

임영옥은 침상에 누운 채 가만히 정소소를 올려다보았다.

정소소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았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처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네요.”

임영옥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유달리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떠지면서 무어라 형용키어려운 영롱한 눈빛이 흘러나왔다.

정소소는 몇 번이고 임영옥을 보아왔지만,지금의 이런 모습을 보자 다시 한 번 그녀의 미모에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핏기를 찾아볼 수 없는 파리한 안색에 병색이 완연했지만,그래서 더욱 그녀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임영옥은 미모가 화려하지도 않고,폭발하는 듯한 염기를 뿜어내지도 않았으며,남자를 유혹하는 듯 한 색기도 없었다. 하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성과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서 돌아서면 다시 되돌아보고 싶어지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보지 않고서는 발견할수 없는 그녀만의 개성이었다.

진산월같이 냉정하고 한 치의 빈틈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그녀를 연인으로 삼게 된 연유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진산월과 임영옥은 다른 사람들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연인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절실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해 스스로를 자제하는 이해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다소 밋밋하고 미온적인 관계 같기도 했지만,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처럼 정열적이고 뜨겁게 서 로를 바라는 사이도 없는 것 같았다.

정소소는 가끔 자신이 먼저 진산월을 만났다면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곤 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어쩌면 그러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나 지금그들이 보여주는 그러한 관계는 절대로 될 수 없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헌신과 신뢰,그리고 희생은 다른 어떤 연인 사이에서도 쉽게 볼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관계에 대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옆에서 지켜 보아온 정소소는 한편으로는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이 들고는 했다.

특히 임영옥의 처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은 몇 배로 증폭이 되고,절실함은 가슴이 타들어 가는 고통스러움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자신이 이럴지언정 임영옥 본인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그럼에도 임영옥은 단 한 번도 좌절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녀는 정소소를 향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정 소저가 있는 곳까지 가고 싶었지만,장담은 할 수 없었어요. 다행히 하늘이 도운 모양이군요.”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면서도 설레게 하는 묘한 음색이었다.

진 장문인이 그녀에게 빠져든 것에는 이 독특한 목소리의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정소소의 뇌리를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몸은 어때요?”

임영옥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공을 상실했어요.”

정소소의 눈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임영옥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그녀는 여전히 차분하고 조용한 모습이었다.

정소소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임 소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어요. 억눌렸던 음기가 분출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음기가 모두 빠져나간 덕분에 몸이 편안해졌어요.”

몸이 편안해졌다고?

단순히 그것뿐일 리가 없지 않은가?

정소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흐르면 심맥이 굳기 시작할 거예요. 태음신맥의 음기를 제어할 기회가 영영 사라지고 마는 셈이니……

앞으로의 그녀는 태음신맥을 제어할 힘을 잃고 점차로 심맥이 굳어져끝내는 목숨을 잃어버리는 비참한 결말밖에는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정소소는 차마 그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임영옥 또한 그 사실은 이미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 임영옥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나는 이미 예견했었어요. 두 명의 용왕이 나를 찾아왔을 때부터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었지요. 다행히 정 소저에게 올 수 있어서 내예상보다 일이 훨씬 더 잘 풀린 셈이에요.”

“하지만 그들을 사주한 사람은

“그녀겠지요.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이 변할 것에 한 가닥 기대를 했었지만,아무래도 그녀는 더 이상나를 용납할 수 없었나 봐요.”

정소소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미안해요.,,

임영옥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정 소저 덕분에 앞으로의 일을 차질 없이 진행할 시간을 얻게 되었어요.”

임영옥은 정소소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속삭이듯 물었다.

“예전에 나와 한 약속을 잊지 않았지요?”

정소소는 아무런 대답 없이 임영옥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두 여인의 시선이 서로 허공에서 마주치며 수 많은 말과 표정들이 침묵 속에서 오고 갔다.

한참 후에야 정소소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임영옥의 창백한 얼굴에 처음으로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복잡한 빛을 띤 미소였다.

“고마워요.”

정소소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불쑥 입을 열었다.

“임 소저는 정말 그대로 괜찮겠어요?”

“나머지는 장문사형의 몫이에요.

장문사형이라면 알아서 잘할 거예

“하지만……

정소소는 무슨 말을 하려다 끝내 하지 못했다.

비록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매달려있지만,파리한 임영옥의 얼굴에는 실로 다채로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 복잡하고 처연하며 깊은 한C恨)과 정,고뇌로 가득 찬 표정에 말문이 막히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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