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57화
제 343 장 여인원정(2)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두 여인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임영옥이 여전히 차분한 모습인데 비해 정소소는 무언가 심사가 복잡한 듯 무거운 표정이었다.
문득 임영옥이 정소소를 향해 물었
“본 파의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었는지 아시나요?”
정소소는 의미 모를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는 이내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마침 막내가 육매 (A株)의 서신을 전해주러 종남파의 숙소를 찾아간것이 기억나서 막내에게 급히 전서 구(傳書)鳥)를 보냈는데,조금 전에 답장이 왔어요.”
그녀는 소맷자락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종이는 작은 원통에 들어있던 탓에 돌돌 말려 있었는데,조심스레 펴보자 깨알 같은 글씨로 백백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정소소는 글자가 너무 작아서 무공을 잃은 임영옥이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을 염려했던지 신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서신에 따르자면 종남파의 고수들은 모두 무사하다고 해요. 근처에 있던 막내가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상황이 마무리된 후였다고 하더군요.”
임영옥은 그녀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으로는 편지의 글자를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정소소가 말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편지는 천봉팔선자의 막내인 누산산이 쓴 것이었다.
누산산은 손풍이 의식을 잃은 유소응을 데리고 자신을 찾아온 일부터 시작하여, 유소응을 치료한 후 황급히 종남파의 고수들이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달려갔으며,그곳에서 악전고투를 벌인 낙일방이 적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빈사지경에 처해 있는 광경을 보고 황급히 조치하여 간신히 위급한 상황을 넘기게 된 상황등을 소상하게 적었다. 이어 강적을 물리친 성락중이 합류하고,마지막으로 막내제자인 손풍이 동중산을 구해 무사히 돌아오기까지의 일들을 여인 특유의 섬세한 시각으로 상당히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그 편지를 모두 읽은 다음에야 비로소 임영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수 있었다.
호음. 누 소저의 도움에 감사드려야겠군요. 그들 중 누구라도 이번일로 피해를 입었다면 장문 사형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거예요.”
“이번 일이 꼭 임 소저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니니 너무 자책할 필요없어요. 쾌의당은 이번 기회에 종남파의 예봉을 꺾으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 청부와는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습격은 있었을 게 분명해요.”
임영옥도 그녀의 말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쾌의당은 예전부터 종남파와 몇 번의 크고 작은 다툼을 벌여왔으며,특히 영하 강변에서의 일 이후 운중용왕과 화중용왕은 종남파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이번의 습격도 그 사건의 연장선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임영옥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아마 정소소의 말처럼 그녀에 대한 청부가 없었어도 쾌의당의 습격은 언제고 벌어질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 그날처럼 종남파 고수들 개개인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하여 확실한 대응책을 갖고 덤비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전의 습격은 두 명의 용왕들이 가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전력을 기울인 것이어서,그들로서도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청부가 없었다면 그들로서는 굳이 과거의 원한에 연연하여 섣불리 자신들의 모든 걸 동원할 결심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하마터면 종남파의 귀한 제자들이 몰살당할 뻔했던 걸 생각하면 그녀의 가슴은 지금도 심하게 격탕되었다.
현재의 종남파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강호의 최고 문파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지만,불안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큰 약점은 그들이 다시 몸을 일으킨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문하제자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단시일 내에 보완하기 힘든 것이어서 앞으로도 상당기간 동안 종남파의 가장 큰 우환거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바꿔 말하자면 이대로 시일이 홀러문하제자들의 수가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할 수만 있게 된다면 종남파의 위상은 누구도 흔들지 못할 정도로 확고해질 것이며,그때 비로소강호제일문파의 자리에 기꺼이 도전해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종남파의 적들 또한 그 점을 누구보다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기에,필연적으로 그 약점에 대해 집중적인 공격을 해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종남파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더구나 그들 중에는 아직 제대로 무공을 배우지도 못한 어린 제자가 두 사람이나 포함되어 있었고,종남파를 재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노련한 제자와 몇 남지 않은 장문인의 사숙도 있었으며,강호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신성과도 같은 존재도 있었다.
만에 하나 그들 중 누구라도 변을 당했다면 단순히 문파제자 한 사람을 잃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영옥은 안도와 함께 어떤 절박감을 느꼈다.
‘더 이상은 그러한 습격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모두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본산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군림천하의 대망을 위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강호의 낯선곳을 돌아다니고 있을 장문 사형에게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장문 사형 혼자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임영옥은 의식적으로라도 진산월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다. 단지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통스럽고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 때문에 그녀는 지그시입술을 깨물었다.
아직은 나약해져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는 본 파를 위해서,장문 사형을 위해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며,그 일은 자신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을 해내야 한다.
모든 일을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그녀는 진산월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을 것이다. 그에게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하소연하고,원망하며,질책할 것이다.
그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했는지 고백하고,애원하며,투정부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마음 편히 쉴수 있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임영옥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정소소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예전과 같은 차분하고 조용한 시선이었으나,왠지 모르게 평상시와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던 것이다.
임영옥은 그런 시선으로 정소소를 보며 특유의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를 만나게 해주세요.”
정소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임 소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녀를 만나야겠어요.”
“하지만……
“그녀도 어쩌면 나와의 만남을 예상하고 있을 거예요. 내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
죠
무언가 입을 열려고 했던 정소소는 임영옥의 말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소소는 한동안 아무 대답 없이 임영옥을 바라보기만 했다.
임영옥 또한 더 이상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으며,자신이 아는 정소소라면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한참 후에야 정소소의 고개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살짝 끄덕여졌다.
“알겠어요.”
임영옥은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그녀의 손을 잡았다.
임영옥의 손에는 처음으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몸속에 잠복해 있는 지독한 한기 때문에 늘 얼음장처럼 차갑던 손에 사람다운 온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그것을 알아차린 정소소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어둡게 변했다.
그 온기는 회광반조의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꺼져가는 모닥불이 마지막 불빛을 반짝이듯이 그녀의 몸속에 남아있는 한 줌도 되지 않는 진원진기가 마지막 몸부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빛이 꺼진다면 그녀의 몸은 태음신맥의 음기 때문에 꽁꽁 얼어붙고 말것이며,숨결 또한 꺼지고 말 것이다.
정소소는 힘주어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마세요, 임 소저. 그녀도 결국은 사람이고,여자예요. 그 점을 잊지 마세요.”
임영옥은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파리한 웃음이었으나,세상의 어떤 미소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알아요.”
물론 알고말고.
아무리 무서워도 그녀 또한 사람이었다.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채 사람을 죽이고,늙지도 않은 채 백 년을 훨씬 넘게 살고 있는 마녀였지만,그래도 몸속에 피가 흐르는 엄연한 사람이었다. 가벼운 손짓만 으로도 세상의 어떤 남자든 유혹할수 있고,숨결 하나로도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들을 시체로 만들어버릴수 있지만,아직도 매일같이 거울을 보며 단장을 하는 천생 여자이기도했다.
그래서 더욱 무서운 여자였다. 단지 자신과 같은 신맥(神M)을 타고 났다는 것만으로도 생면부지의 남을 태연하게 살해할 수 있는 정말 무서운 여자.
자신은 이제 그런 여자를 상대로 최후의 도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임영옥은 전혀 마음이 불안하거나 떨리지 않았다. 오직 진산월의 품에서 편히 안겨있게 될 순간만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려 했다.
정소소는 그녀의 손을 몇 번이고 두드린 다음 방을 나갔다.
막 방문을 나서기 전,정소소는 다시 한 번 임영옥을 바라보았다.
“종남파의 고수들에게 전할 말은 없어요?”
“나는 치료를 위해 다른 곳에 갈테니 먼저 본 산으로 가 있으라고 전해줘요.”
정소소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려다 머뭇거리며 다시 물었다.
“진 장문인에게 전할 말은?”
임영옥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수천수만 마디의 말을 했는데,더할 말이 남아 있을리 없었다.
정소소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임영옥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급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 떠 있는 미소는 모든 것을 초연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너무도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이었다. 정소소는 차마더 이상 그 미소를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