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358화


제 344 장 회람대연(1)

응계성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멀리 먼동이 터오고 있는지 창문밖으로 흐릿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응계성은 자리에 누운 채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밤새 뒤척거리다 잠깐 졸았던 것 같은데,머릿속은 오히려 더할 수 없이 맑았다.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고,무엇보다 기분이 고양되어 전혀 피곤하거나 힘든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오늘이다.

자신이 종남파를 위해 미력한 힘이 나마 보탤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드디어 다가온 것이다.

며칠 전,사숙인 노해광이 불쑥 찾아와 화산파와의 회람연에서 선봉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응계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을 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응계성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을 다그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몸 상태를 최선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과도한 수련을 자제하고 가급적 충분한 휴식을 취했으며,영양분 있는 음식들을 골고루 섭취하고 수면 시간도 일정하게 유지했다.

어젯밤에는 어쩔 수 없이 깊은 잠을 자지 못했지만,그래도 정신만큼은 어느 때보다 맑고 투철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니 왼쪽 다리를 제외한 모든 곳이 원활한 동작을 보이고 있었다.

응계성은 물끄러미 자신의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몇 달 전만 해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왼쪽 다리는 그동안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미세하나마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그 움직임이라는 것이 있는 힘을 기울여야 새끼발가락 하나를 간신히 까닥거릴 정도에 불과했으나,그것 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심지어 종남파의 깊숙한 곳에 머물며 좀처럼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제갈외마저 그 소식을 접하고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며 직접 찾아와서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까지했다.

응계성의 왼쪽 다리를 본 제갈외는 한동안 말문을 잇지 못했다.

의당 비쩍 말라 비틀어져 있으리라생각했던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멀껑해 보였던 것이다.

제갈외는 한눈에 그것이 어찌 된영문인지를 알아보았다. 그것은 처절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종남산을 내려온 이후 응계성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한 시진씩 왼쪽 다리를 이용한 훈련을 해왔던 것이다.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를 얼마나 혹독하게 단련해야만 멀껑한 다리와 같은 근육을 만들 수 있을까?

평생을 강호의 모진 풍파 속에서 살아오며 숱한 고수들을 치료해온제갈외였지만,응계성의 다리를 보는 순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한참 후에야 제갈외는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그때 제갈외가 한 말을 응계성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론상으로 발가락 하나를 움직일수 있다면 두 개도 움직일 수 있고,두 개가 움직인다면 세 개도 움직일수가 있다. 이론상으로는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네놈 같은 독종이라면 어쩌면 가능알지도 모르지. 지독한 놈!”

제갈외는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꼬박 하루 동안 머물면서 무려 여섯번이나 그의 발에 침을 놓아주고는 휑하니 종남산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날 이후 응계성의 왼쪽 다리는 조금 더 부드러워졌고,새끼발가락의 움직임도 조금 더 커지게 되었다.

응계성은 왼쪽 발목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마치 나무로 만든 발목인양 아무런 촉감도 느껴지지 않았지 만,응계성은 일각에 걸쳐 발목 주위의 혈도 열두 군데를 꼼꼼하게 주물렀다. 이것은 제갈외가 알려준 수 법으로,이 추궁과혈 덕분에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 발목이 아직 말라비틀어지지 않고 일정 수준의 유연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추궁과혈을 마친 응계성은 뒷마당으로 나가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왼쪽 다리를 오른쪽발등 위에 얹은 특이한 자세였는데,이것은 방취아가 창안한 금계탁속의 가장 기본적인 운신법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 특징 없이 뛰어오르는 것 같아도 될 때마다 조금씩 다른 자세를 요하기에 무척이나 많은 신경과 집중을 필요로 하는 동작이었다. 오른 발바닥의 각 부위를 골고루 단련하는 이 수련법 덕분에 응계성은 왼쪽 다리를 사용할 수 없음에도 무공을 사용할 때 필요한 여러 가지 자세들을 능숙하게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상시라면 반 시진 가까이 정신없이 된 다음에야 비로소 세수를 하고 아침 식사를 했지만,오늘은 일각만에 훈련을 마쳤다. 금계탁속의 운신법은 보기와는 달리 무척이나 힘들고 고된 것이어서 반 시진의 훈련을 마치면 몸이 무척 고단했기에,오늘만큼은 일각으로 시간을 줄인것이다.

뒤이어 몇 차례 장괘장권구식의 초식들을 펼치던 응계성은 동작 하나하나에 힘이 담기며 자세가 마음먹은 대로 유연하게 움직이자 그제야 비로소 수련을 멈추었다.

몸에 적당히 땀이 흐르고 밤 사이 굳었던 근육들이 풀어지면서 불길같은 투지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아올랐다. 이제야 비로소 어느 누구와 싸워도 자신의 전력을 기울일 수 있는 최적의 몸 상태가 된 것이다.

‘무조건 이긴다.’

응계성은 상대가 누구든 개의치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승리 하겠다는 마음뿐이 었다.

자신을 위해서 장문 사형은 대문파의 장문인 신분에 한낮 장사치인 손노태야에게 머리를 숙여야 했다. 한 창때의 젊음을 누려야 했을 방취아는 몇 날 며칠을 방안에 틀어박혀새로운 신법을 만드는데 땀을 쏟았으며,정해는 자신에게 줄 천지유불란 한 방울을 얻기 위해서 노해광밑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뿐이랴? 항상 무뚝뚝해 보였던 노해광은 자신에게 맞는 무공을 얻기 위해 그 귀한 호천비록을 선뜻 남에게 건네주었으며,소지산은 지금도 며칠에 한 번씩 사람을 보내 자신의 안부를 일일이 확인하고는 했다.

종남파의 모든 제자들이 자신 때문에 이런저런 노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응계성은 도저히 격동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형제들에게 짐이 되기 위해서 종남파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본 파에 힘이 되고자 했지,짐이 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때마다 응계성은 이런 말을 되뇌며 미친 듯이 뒷마당으로 달려가 무공을 수련하고는 했다.

종남산을 내려온 후 응계성은 단하루도 마음 편히 쉰 적이 없었다.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고 마음속의 칼날을 쉬지 않고 갈아왔다.

종남파에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기 위해,언제고 종남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그 날을 위해 응계성은 매 순간을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그 날이 다가온 것이다.

지금 그의 심정을 무어라고 해야할까? 설렘과 비장함,사무침과 그리움,흥분과 절제가 모두 한 옹덩이 속에 뒤섞여 그 자신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내일의 아침은 오늘 과는 절대로 같을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승리하여 본파에 비로소 작은 도움이 되는 인생이 될 것인가,아니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본 파에 짐이 되는 한 맺힌 삶이 될 것인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느냐에 따라내일 아침에 보는 세상도 달라질 것이다.

응계성은 무복을 걸친 채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절룩이는 걸음으로 자신의 거처를 벗어났다.

막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춰졌다.

대문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은 눈에 익은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손가장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신풍검 표일립도 있었고, 몇 차례나 실랑이를 벌였던 감응기 와 왕등 같은 경비무사들도 있었다.

청명숙이나 백로숙에 머물며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식객들의 모습도 보였고,좀처럼 손노태야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던 마익산의 차가운 얼굴도 시야에 들어왔다.

제법 친하게 지내는 사이도 있었고,크고 작은 충돌을 일으켜 소원해진 자들도 있었다. 또 얼굴만 몇번 마주쳤던 자들도 적지 않았다.

친한 사이든 소원했던 사이든 그들은 모두 응계성의 대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계성이 나타나자 그들 중 몇 사람은 ‘힘내라’고 소리치기도 했고,몇 사람은 ‘반드시 종남파가 이길거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묵히 응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응계성은 그들의 눈에서 그들이 보내는 마음의 소리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 손가장의 소벽력이 어떤 사람인지 화산파에 똑똑히 보여주시오.

그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응계성은 찬찬한 눈으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런 다음 빙긋 웃었다.

화가 날 때마다 웃고 웃을 때마다 더욱 무서워지는 소벽력이었지만,지금 그의 웃음은 어느 때보다 무서 웠고 흥겨워 보였다.

응계성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대문 앞을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중앙에 작은 길을 만들어 주었다.

응계성은 왼쪽 다리를 절룩이며 그통로를 지나갔다. 모두의 말 없는 시선이 그의 뒷모습을 배웅하는 가운데,그의 모습은 이내 손가장 밖으로 멀어져갔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