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59화
제 344 장 회람대연(2)
오늘따라 화월루는 더욱 화려해 보였다.
원래 화월루는 장안에서도 손꼽히는 번화한 주루였다. 노해광이 산해루를 인수라면서 무서운 기세로 사업을 확장하자 한때 화월루의 경영이 위기를 맞을 거라는 말이 들린 적도 있었다. 하나 화월루는 그런 소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번창했으며, 끊임없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오히려 산해루와 화월루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을 그 일대로 끌어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든,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사람이든,혹은 아름다운 여인을 품으려는 사람이든 일단 산해루와 화월루가 있는 거리로만 가면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낭에 돈을 두둑하게 채운 후에 이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산해루보다 화월루 앞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화월루의 사방 벽에는 휘황찬란한 문양을 수놓은 비단들이 늘어져 있었고,창문마다 형형색색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언뜻 보기에도 무언가 거창한 연회가 열리고 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풍악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화려하게 수 놓아진 깃발들이 줄지어 꽂혀 있는 화월루의 정문은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강한 마력이 있었다.
정문 앞에는 네 명의 호위무사들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하나같이 두눈에 정광이 가득하고 기도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화월루의 주위를 뒤덮고 있는 인파들은 연신 정문을 기웃거리면서도 감히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인파가 갈라지며 누군가가 화월루의 정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금륜장의 장주인 금륜군자 고소명이다.”
“역시 고 장주도 초대받았구나.”
“아무래도 종남파 쪽 참관인이겠지?”
“그럴 걸세. 얼마 전에 고 장주의 막내아들도 종남파에 입문했다고 하더군. 고 장주가 몇 번이나 종남파를 찾아가서 사정했다는 소문일세.”
사람들의 소곤거림을 뒤로 하고 화월루의 정문으로 다가간 고소명은 입구를 지키는 무사들에게 배첩을 내밀고는 당당한 자세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부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던 중인들 틈에서 다시 작은 환성이 들려왔다.
“와아! 사해표국(四海鏢局)의 총국주인 사해신룡(H海神龍) 광세악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건장한 체구의 남포인에게로 향했다.
남포인의 얼굴은 자줏빛으로 붉었고,두 눈에 형형한 신광이 어른거리고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사해표국이라면 하남성의 대풍표국(大風及#37858;局)과 함께 강북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대형표국이 아닌가? 그들의 총국은 하북성에 있다고 들었는데,그들의 총국주가 왜 이곳에 왔단 말인가?”
누군가가 제법 큰 소리로 묻자,옆에 있던 사람이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얼핏 듣기로는 사해표국에서 조만 간에 장안에 지국을 낸다고 하더군.
아마 그 사전작업으로 총국주가 직접 온 모양일세.”
“허! 그러고 보니 창룡표국이 공국주의 죽음 이후 후계 문제로 다툼이 심해 문을 닫느니 마니 하는 사이에 다른 지역의 대형 표국들이 그빈 자리를 노린다고 하더니 결국 사해표국이 눈독을 들인 모양이구나.”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제이(第=)의 총국을 만든다는 각오로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을 모양일세.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그 사람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
“화산파가 있다는 소문일세. 화산파와 함께 공동으로 돈을 투자하고 지분을 나눈다고 하더군.”
“어쩐지. 아무리 사해표국이 강북전체에서도 내로라하는 표국이라고 해도 아무 연고도 없는 장안에 대뜸들어올 리가 없었는데 이상하다 생각했지. 화산파를 업고 있다면 그들의 기세가 대단하겠군. 그동안 장안일대의 표물들을 모조리 쓸어 담고 있던 대응표국이 바짝 긴장하겠는걸.”
“화산파를 등에 업은 사해표국과 종남파의 그늘에 있는 대응표국이 본격적으로 경쟁을 벌인다면 정말 볼만한 일이 되겠지. 아마 오늘의 결과에 따라 두 표국의 희비가 크게 엇갈리게 될 걸세.”
광세악은 두 명의 호위만을 대동한 채 화월루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몇 번인가 비슷한 일이 벌어 졌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때로는 호기심에 찬 눈길을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환성을 지르기도 하며 그들에 대해 여러 가지 뒷소문을 주고받았다. 그런 식으로라도 화월루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다시 몇 명의 인물들이 화월루의 정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을 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이쯤 되면 누군가가 그들의 정체에 대해 떠들 법도 하건만,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세 명의 중년인들이었는데,유난히 짙은 회의를 입고 머리에는 모두 방갓을 쓰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같은 방파의 인물들임이 분명해 보였지만, 회의와 깊게 늘러 쓴 방갓,옆구리에 차고 있는 평범한 장검 외에는 신분을 알 수 있을 만한 것이 특별히 보이지 않았
“누구지?”
“글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어도 장안 일대에서는 저런 복장을 한 방파는 없다는 걸세.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지.”
“그런 말은 누가 못하나? 모두 검을 차고 있는 걸 보니 검을 주로 쓰는 방파의 고수들인 것 같은 데……
그들이 화월루 안으로 모습을 감출때까지도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가까워지자 이제 더이상은 화월루로 들어가려는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화월루 주위에서 쉽게 떠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감이 더욱 증폭되었는지 자기들끼리 언성을 높이며 말싸움을 벌이는 자들도 있었다.
서로 화산파가 유리하니 종남파가 유리하니 시비를 벌이고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터져 나온 누군가의 외침에 일제히 소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화산파다! 화산파의 고수들이 왔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인파가 마치 벼락에 맞은 나무처럼 짝악 갈라졌다. 그 사이로 일단의 무리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신태가 비범한 십여 명의 인물들이었다. 남녀노소가 두루 섞여 있지만,누구 하나 기개가 헌앙하고 인물됨이 뛰어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눈이 예리한 자라면 그들의 소맷자 락에 작은 매화문양이 새겨져 있음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시끄럽고 소란스럽던 장내가 그들의 등장으로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중인들은 숨결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그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고만 있었다.
그것은 화산파의 인물들의 전신에서 하나같이 칼날같이 예리한 기운이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 표정만큼이나 그들이 흘리는 예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섣불리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화산파의 고수들은 입을 굳게 다문채 화월루 안으로 한 사람씩 들어갔다. 그들 중 마지막 인물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하나둘씩 숨을 내쉬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휴우! 화산파의 고수들이 저렇게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군.”
“누가 아니래나. 꼭 불공대천의 원수를 맞이하는 것처럼 비장해 보이 기조차 하군. 그들의 모습을 보니 오늘 반드시 종남파와 결판을 내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역력한 것 같네. 아무래도 오늘은 한바탕 피바람이 불지도……
“쉿! 말조심하게.”
무심코 말을 하던 사람은 친구의 질책을 받자 찔끔하여 급히 입을 다물었다.
“오늘 같은 날은 그저 몸조심,입조심을 하는 게 상책이네. 우리 같은 사람은 그저 조용히 눈치만 살피고 있다가 결과가 정해지면 승자에게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내면 그뿐이네. 결코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떠들필요가 없단 말일세.”
“알았네. 조심하겠네. 그나저나 어쨌든 오늘만 지나면 그들의 싸움도 일단락될 테니 장안도 이제 조용해지겠군.”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나?”
“왜? 누가 이기든 패한 쪽에서는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회람을 돌려서 이렇게 쟁쟁한 고수들까지 증인으로 내세우는 마당에 설마 약속을 깨겠나? 명문정파의 위신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이곳에 온 양 파의 고수들은 사실 주력이 아닐세. 주력은 모두 무당파의 대집회에 가 있지. 그러니 그들이 돌아오게 된다면 이번 결과에 상관없이 또다시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치지 않겠나?”
그 사람은 갑자기 설레는 표정이 되었다.
“그래,드디어 신검무적이 오는구나!”
“신검무적뿐 아니라 옥면신권과 종남신녀도 오겠지. 중요한 건 돌아오는 자들이 그들만이 아니라는 것일세.”
“그들 외에 또 누가 있나? 아! 무영검군과 비천호리도 있지?”
“잊었나 본데,무당파의 집회에 참석한 자들은 종남파의 고수들뿐이 아닐세.”
“그렇군. 화산파도 있었지.”
“그래. 다시 말해서 신검무적뿐 아니라 화산파의 장문인인 육합신검도 모두 장안으로 돌아온단 말일세. 회람연이 끝났다고 해도 그들이 온다면 장안은 물론이고 섬서성 전체가 풍운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을 걸세.”
듣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럼 장안이 평안해질 날은 아직멀었단 말이군. 그들의 격돌 때문에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해서 불안한데 말이지. 그래도 신검무적을 볼 수 있으니……
“신검무적이 그렇게 좋나?”
“자네는 안 그런가? 신검무적을 볼생각에 흥분되지 않느냔 말일세.”
“솔직히 흥분되고 설레는 거야 자네나 매한가지지. 하지만 장안에 더이상의 피는 흐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네. 솔직히 지금까지 너무 많은피가 흘렀어.”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나?”
“어쩌겠나? 그게 강호에 몸을 둔문파들의 숙명인걸.”
그들이 떠들고 있을 때,다시 주위가 술렁거렸다. 조금 전과는 다른 기이한 열기가 소리 없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종남파다!”
누군가의 짤막한 한 마디 외에 더이상의 고함이나 외침은 없었다.
하나 모든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정신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종남파의 고수들은 모두 다섯 명이 왔을 뿐이었다. 열 명이 넘는 다양한 연령층의 고수들인 화산파와는 숫자부터 현격한 차이가 났다.
두 명의 청년과 두 명의 중년인, 그리고 노인 하나.
단출한 숫자이지만 그들을 보고 화산파보다 뒤처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젊은 두 청년은 신검무적의 사제들이었고,두 명의 중년인은 신검무적의 사숙들이었다. 그리고 늙은 노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종남파를 지켜온 전설 같은 존재였다. 강호제일검을 사형으로 두고 사질로 둔 고수들을 무시할 자는 적어도 현 강호에는 아무도 없었다.
밑바닥에서 일어나 강호의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종남파는 모든 장안사람들의 자랑이고 희망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으나,주위에 늘어선 많은 사람들은 뜨거운 눈으로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을 한 사람한 사람씩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열떤 분위기는 냉정하고 위압감마저 어렸던 화산파 고수들의 등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종남파 고수들은 중인들의 보이지 않는 성원을 받으며 한 사람씩 화월루로 들어갔다. 제일 마지막으로 한쪽 다리를 절룩이는 소벽력의 모습이 화월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으로 화월루의 정문은 굳게 닫혔다.
닫힌 정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화월루의 현판 옆으로 향했다.
온갖 꽃들과 비단 장식으로 휘황찬란한 화월루의 현판 양쪽에 언제부터인지 두 개의 깃발이 내걸렸다.
하나는 하얀 비단에 매화문양이 수 놓아져 있었고,다른 하나는 푸른색의 비단에 한 자루 검이 그려져있었다.
화월루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장안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장치였다. 그 깃발이 오르내리는 것으로 화산파와 종남파의 회람연결과를 밖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 두 깃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고요한 흥분과 그보다 열띤 갈망이 번뜩이고 있었다. 누가 이기든 이번 싸움으로 장안이 다시 평화를 되찾기를 바라지만,가급적이면 그승자가 종남파가 되었으면 하는 소소한 희망이 조금씩 장내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