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60화
제 344 장 회람대연(3)
이번 회람연은 모처럼 서안에서 벌어지는 최고의 연회였다.
사실 연회라는 말이 무색하게 회람연이 열릴 때마다 한바탕 혈투극이 벌어지고는 했으나,그래도 명문정파 사이의 회람연에서 눈살을 찌푸릴 정도의 참변이 일어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당사자들뿐이었다면 정말 살벌한 싸움이 벌어질지 몰라도 각 파에서 초청한 여러 명숙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다들 최후의 선까지는 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문파의 위신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 오늘의 회람연은 여러모로 여타의 회람연과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 회람을 돌린 당사자들이 현재강호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두개의 문파였고,둘 중 어느 누구도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 사이에 이미 적지 않은 피가 흘렀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늘 회람연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종남파에서 초청한 인물은 모두 다섯 명으로,금륜장의 장주인 금륜군자 고소명 외에 대응표국의 국주인일도풍뢰 단리정천,쌍하보의 철혈수사 국조린,철기보의 철기은창 하대경,그리고 관중일관의 노호공 장력패였다. 하나같이 서안 일대를 주름잡는 문파의 주인이거나 뛰어난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으나,한편으로는 이미 종남파와 연관이 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인물들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화산파에서 초청한 자들중 서안에서 활동하는 인물은 금수장의 장주인 만금호 양송표와 천지무관의 관주인 일도경동 위송림뿐이었다.
금수장은 서안의 오대전장 중의 하나이기는 했지만 순수한 무인들의 단체라기보다는 군부와 양씨문중의 결합체 성격이 더 강한 곳이었고,천지무관 또한 같은 십대무관에 속해 있다고 해도 관중일관에 비해서는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곳이었다.
그들만 따지자면 화산파의 초청인사들이 한 수 처진다고 볼 수도 있지만,그들 외에 다른 자들이 소개되자 장내의 분위기는 전혀 달라졌다.
강북무림에서 가장 큰 표국 중 하나인 사해표국의 총국주인 사해신룡광세악의 등장도 놀라웠지만,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사람이 소개되자 좀처럼 냉정함을 잃지 않던 전풍개조차도 흠칫할 정도였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닌 만서림(萬書林)의 주인인 소요일사유장현이었던 것이다.
만서림은 엄밀히 말하면 무림세력이라기보다는 학사들의 집합체인 서 원에 가까웠다. 만서림은 특히 희귀한 고서를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어서 많은 문인들이 들어가 기를 앙망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러한 문인학사들 중에는 무공이 뛰어난 유협들도 적지 않았기에 자연히 유가의 한 방파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하나 고고한 학사들의 단체답게 좀처럼 특정 문파에 치우치거나 강호무림의 복잡한 일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뜻밖에도 오늘의 회람연에 화산파의 초청인사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전풍개도 유장현의 명성을 듣기는 했지만,실제로 실물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유장현은 외부에서 활동한 적이 드문 사람이었다.
“화산파가 소요일사까지 포섭할 줄은 몰랐구나. 소요일사가 헛된 명성을 쫓지 않는 청정한 인물이라는 소문이 잘못된 것이었단 말인가?”
전풍개가 나직한 탄식을 토해내자 노해광이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요일사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화산파에서 감히 소요일사를 겁박이라도 했단 말이냐?”
“그게 아니라,소요일사는 유화상단의 주인인 유방현의 친형입니다.
원래 유화상단을 물려받아야 했으나,워낙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소요일사가 가주의 자리를 동생에게 넘겨주고 집을 나온 것이지요.”
전풍개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호기 심이 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유화상단은 최근에 큰아들인 유현상이 죽고 몇 차례의 커다란 거래를 실패하면서 세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특히 화산파와 연합을 추진했던 일이 잘되지 않아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는 말까지 들려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무림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소요일사였지만,가문이 망하게 생긴 이상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소용일사가 이번 일에 나서는 대가로 화산파에서 유화상단을 봐주기로 했단 말이냐?”
“유방현이 며칠 동안 소요일사에게 찾아가 눈물로 사정했다고 하더군요. 소요일사가 나선 이상 화산파에서는 유화상단에 상당히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소요일사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당장 소요일사의 등장으로 종남파 쪽으로 쏠렸던 초청인사의 무게감이 거의 비등해지거나 오히려 화산파 쪽으로 기울어진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화산파에서 초청한 마지막 인물들은 짙은 회의를 입고 머리에 방갓을 쓴 세 명의 중년인들이었다. 그들은 실내에 들어와서도 계속 방갓을 쓰고 있다가 자신들을 소개할 즈음이 되어서야 방갓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들이었다. 눈빛이 맑고 차가웠으며,칼날같이 예리한 기도를 풍기고 있어서 뛰어난 실력과 함께 적지 않은 수양을 쌓은 인물들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장내의 고수들은 대부분이 서안에 서만 주로 활동했기에 그 중년인들의 얼굴을 보고도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노해광만은 섬서성 일대는 물론이고 장성이북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활동해왔기에 그들의 신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오대파의 검수들이군.”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주위가 워낙 조용했기에 그 말을 듣고 놀란 중인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오대 파.
달리 오대검문(五:臺劍門)이라 부르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산서성 오대산에 자리를 둔유명한 문파였다. 대대로 검술을 위주로 익혀왔기에 검문이라 했지만,사실은 도교의 한 가닥에서 파생된도문에 가까웠다. 그래서 무공뿐 아니라 정신적인 수양에도 상당히 신경을 써서 문무를 겸비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해 냈다.
그들은 제자들의 수준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렀는데,아직 수양이 제대로 되지 않은 어린 제자들을 검묘(劍S)라 했고,수양이 일정 수 준에 오르면 비로소 검목이라하여 오대파의 제자로 행세할 수 있게 했다.
검수는 오대파에서도 최고의 정예로, 다른 문파의 장로 신분이었다.
오대파의 검수들은 그 수가 적을 뿐 아니라,좀처럼 오대산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서 강호에는 그들의 존재만 알 뿐 정확한 인원이나 신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세 명의 중년인 중 사각턱을 가진 중앙의 중년인이 노해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슬 시퍼런 안광이 화살처럼 노해광에게 날아와 꽂혔다.
“그렇소,철면호. 우리는 오대산에서 왔소.”
노해광은 외부 출입을 잘 하지 않던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으나,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태연히 물었다.
“오대파 검수들의 고고함은 익히 들었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세분의 높은 이름을 알 수 있겠소?”
오대산에서 고고하게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느냐는 뜻이 담긴 물음이었다.
사각턱 중년인은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빈도는 청풍자라고 하고,옆의 두 사람은 내 사제들인 청송자 (靑松구)와 청수자라 하오.”
노해광은 그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이제 보니 오대파의 검수들 중에서도 검법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청명삼검(靑莫드劍)이셨구려. 몰라뵈어 죄송하오.”
청풍자는 그에게 답례하면서 묵직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또한 빈도는 삼 년 전에 추혼사절에게 살해당한 오기동의 못난 사부이기도 하오.”
노해광은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소? 삼가 귀 제자의 명복을 빌겠소.”
청풍자는 가만히 있는데,옆에 있던 청송자와 청수자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들은 이미 검단현에게서 자신들의 제자를 죽이고 도망쳤던 추혼사절이 노해광의 밑에서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검 한 자루만을 달랑차고 황급히 달려올 정도로 추혼사절에 대한 그들의 원한은 깊고도 깊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게 분명한 노해광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제자의 명복 운운하자 분기를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나 청풍자는 눈짓으로 사제들을 제지하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이미 추혼사절의 꼬리를 잡았으니,조만간 제자의 넋을 위로 해 줄 수 있을 거요.”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뜨끔하지 않을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이었으나,노해광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빙긋 웃기까지 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구려. 모쪼록 귀하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겠소.”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의 그 태도에 오히려 청풍자를 비롯한 청명삼검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청송자와 청수자는 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으나,청풍자는 다시 한 번 사제들을 진정시킨 후 노해광의 얼굴을 가만히 주시했다.
“과연 철면호 다운 말이오. 그런 모습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겠소.”
“제자의 복수를 하기에도 바쁘실텐데 나까지 신경을 써주다니 정말 고마운 일이오. 그런데 말이오.”
노해광의 목소리가 갑자기 은근해졌다.
“내가 듣기로 삼 년 전에 오대산인근에서 여인들을 간살하던 희대의 색마가 출현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그게 사실이오?”
그 말에 청송자와 청수자는 물론이고 이제까지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청풍자마저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노해광은 서슬 퍼렇게 굳어 있는 청풍자의 얼굴을 빤히 주시하며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희대의 색마를 잡기 위해 귀파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도무지 종적을 잡기 힘들어서 헛수고에 그치고 말았다고 하더구려. 마치 귀 파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귀 파가 경계를 하고 있는 지역만을 피해 계속 여인들을 간살하고 다녔으니 말이오. 그런데 귀하의 제자가 추혼사절에게 살해당한 후 그 색마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고 들었소. 정말 공교로운 일 아니오?”
“그건……
“물론 귀하의 제자가 그 희대의 색마라는 소리는 아니오. 다만 색마의 흔적과 귀 제자가 이동한 경로가 이상하게도 일치할 뿐 아니라,처음 색마가 등장한 시기에 오대산 인근에서 마공비급이 나타났다는 소문을들은 적이 있어서 말이오. 그 소문을 들은 오대산 근처에 있는 명문정파의 제자가 우연히 그 마공비급을 입수해서 호기심에 펼쳐 볼 수도 있는 것이고,그런 식으로 정파의 제자가 어설프게 마공을 익히려다 주화입마에 빠져 색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소. 그리고 우연히 색마가 여인을 간살하는 광경을 목격한 무림 고수 네 사람이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고 그를 살해하는 경우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청명삼검의 고아했던 얼굴이 시체의 그것처럼 핼쑥하게 변했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해광을 쏘아보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노해광의 입을 틀어막고 난도질이라도 할 것 같은 매서운 모습이었다.
노해광은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명문정파에서 문파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그 무림고수들을 제자를 살해했다는 명목으로 살인멸구하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아암,무림에서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말이오.”
청명삼검은 모두 입을 굳게 다문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시 후에야 청풍자가 무언가에 억늘린 사람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책임질 수 있소?”
노해광은 어깨를 으쪽거렸다.
“무슨 책임 말이오? 나는 그냥 무림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주절거렸을 뿐이오. 그런데 그게 귀파와 무슨 연관이라도 있단 말이 청풍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검단현이 재빨리 나서지 않았다면 청풍자로서는 앞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자,이제 양측의 초청인사가 모두 소개되었으니 오늘 일을 어떻게 진행할 건지 세칙을 정하는 게 어떻겠나?”
노해광도 오대파의 세 고수를 더이상 궁지로 몰 생각은 없는지 검단현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손님을 모셔놓고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는 건 군자가 할 일이 아니지.”
서안의 막후 실력자로 군림하면서 때로는 흑도의 거친 일까지도 손이 닿아있는 노해광이 스스로의 입으로 군자 운운하자 몇몇 사람들은 실소를 홀리기도 했으나,누구도 정면으로 그를 비웃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만큼 노해광의 서안에서의 위상이 강력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검단현도 그 점을 알아차렸는지 표정이 살짝 굳어졌으나,이내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군자라……. 좋은 말이지.
하지만 오늘은 누가 군자인지를 가리는 날이 아니지.”
“물론이지. 하지만 이왕이면 군자 답게 승리하는 게 좋지 않겠나?”
“그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두 사람 사이의 날 선 대화가 시작되자 장내의 분위기는 점차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섬서성뿐 아니라 중원무림 전체를 놓고 보아도 가장강력한 문파 중 하나인 종남파와 화산파 사이의 불꽃 튀는 대결이 이미시작되었음을 조금씩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