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61화
제 345 장 벽력선봉(1)
응계성은 아까부터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무언가에 단단히 심사가 틀어진 사람처럼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화산파 쪽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당장 이라도 주먹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달려들 것만 같아 종남파 고수들은 절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화월루로 들어설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막상 화산파 고수들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마음속의 격동을 참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결국 소지산이 그에게 다가가서 살짝 그의 소매를 잡았다.
“긴장이 되는 거냐?”
응계성은 여전히 화산파 쪽을 노려보면서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놈이 보이지 않는다.”
“누구?”
“두기춘. 그 씹어 먹을 놈은 의당올 줄 알았는데,저들 속에 없구나.
그놈과 마주하게 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려 왔는데……
응계성의 음성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아쉬움과 분노의 빛이 담겨 있었다.
그 말에 소지산도 퍼뜩 고개를 돌려 화산파 진영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들 사이에 두기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외모가 뛰어난 그이기에 어느 곳에서든 쉽게 눈에 들어왔으나, 열 명이 넘는 화산파 고수들 속에는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두기춘과 비슷한 나이의 젊은 제자들도 몇 명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제외된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소지산은 두기춘이 신산 곡수의 신임을 받아 서안에서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의아함과 동시에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응계성이 힐끔 그를 돌아보더니 냉소를 날렸다.
“흥,일이 있기는. 화산파 놈들에게 버림받은 게 틀림없어. 아니면 어디에서 여자라도 만나고 있겠지.”
그의 머릿속에는 일전에 잠깐 보았던 두기춘과 묘령의 여인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응계성은 소지산보다 항렬이 낮았으나, 나이가 같아서 서로 간에 말을 트고 지냈다. 물론 문규를 엄격하게 따지는 전풍개 앞에서는 조심을 하는 편이었으나,지금은 두기춘에게 설욕할 수 없다는 분기에 차있어서 무심코 평상시의 습관대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차 싶어서 돌아보니 과연 전풍개가 쌍심지를 켜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당장 불호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나,나중에 한 소리 할 것이 분명했다.
때마침 검단현과 회담을 나누었던 노해광이 돌아왔다.
“세칙을 정했습니다.”
노해광은 전풍개를 향해 머리를 숙인 후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양쪽에서 다섯 명씩 나와서 비무를 벌이기로 했습니다.”
전풍개의 입꼬리에 냉랭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흥,우리가 나온 인원 그대로 정했군.”
“사숙 말씀대로 본 파에서 몇 명이 나오든 그 숫자대로 하자고 했을 겁니다. 어차피 그들로서는 본 파에서 내세울 만한 고수가 자신들에 비해적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그 이점을 놓치기 싫었겠지요.”
전풍개의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의 속셈을 알면서도 선뜻 승낙을 했단 말이냐?”
“대신에 방식은 제가 정한 대로 따르기로 했습니다.”
“무슨 식이냐?”
“승자가 계속 싸우는 연승식(連勝式)으로 했습니다.”
전풍개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너는 연승식이 본 파에 유리하다고 보느냐?”
“저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전풍개는 무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하나 얼굴 표정은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풍개는 화산파와의 일전이 만만 치 않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 출전할 다섯 명 중자신을 제외하고는 소지산만이 믿을 만할 뿐,나머지 세 사람의 실력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노해광이라면 기병의 묘를 살려 승산을 높일 줄 알았건만,고수가 많을수록 유리한 연승식을 선택했다니 그로서는 도무지 노해광의 심산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풍개는 노해광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펴보았으나,이 능구렁이 같은 사질 녀석은 자신의 의도대로 되고 있다는 듯 입가에 엷은 미소만 떨뿐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이 녀석에게도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를 믿어보는 수밖에.’
전풍개의 그런 심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노해광은 천연덕스럽게 다른 세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모두 들었겠지? 비무는 오 대 오,승자가 계속 싸우는 연승식이다.”
소지산과 응계성은 물론이고 하동원의 얼굴에도 서서히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노해광은 응계성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일전에 말한 대로 네가 선봉(先錄)이다. 준비는 되어 있겠지?”
응계성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짤막한 대답이었으나,그 속에 깃들어 있는 비장한 각오를 누구라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노해광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살아서 돌아와라.”
승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한 말이었으나,그래서 오히려 다른 어떤 격려의 말보다 더욱 무겁게 들렸다.
소지산은 앞으로 걸어나가려는 응계성을 불렀다.
“계성.”
응계성이 돌아보자 소지산은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응계성이 받아보니 아무런 장식도 없는 밋밋한 머리끈이었다. 다만 박음질이 정성스럽게 되어 있고, 한쪽에〈응(魔)〉이라는 작은 글씨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어 만들 때 적지 않은 정성을 쏟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매가 준 것이다.”
응계성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그에게 내밀었다.
“이런 건 필요 없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낯간지럽게 무슨머리띠냐?”
“네가 직접 돌려줘라. 그리고 이곳은 분명히 전쟁터다. 초가보와 싸울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응계성은 묵묵히 소지산을 바라보았다.
소지산은 예전에 비해 의복이 정갈해졌고 몸에서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하나 머리카락은 여전히 반쯤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그의 두 눈은 수정처럼 맑고 차가웠다. 그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응계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직 우리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
응계성은 들고 있던 머리띠를 이마에 질끈 동여떴다.
“초가보와의 싸움은 정말 무서웠지. 지금도 가끔 악몽을 꿀 정도로.
그런 싸움에서 우리는 살아남았다.”
진짜 싸움이 어떤 것인지 화산파의 샌님들에게 보여주지.”
응계성은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응계성의 등을 바라보는 소지산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으나,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깊어진 그의 눈빛에 한 줄기 수심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동원이 그에게 슬쩍 다가가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걱정 마라. 손가장의 소벽력이라고 하면 요즘 장안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
결코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지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의 마음속에는 아무도 듣지 못할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녀석이 당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사숙. 이기기 위해서 무슨짓을 할지 모른다는 게 걱정스러운 겁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 정도는 기꺼이 내던질 놈이니말입니다.’
화산파에서는 이미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응계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입술이 여인의 그것처럼 붉은 미남자였다. 다만 얼굴 전체에 냉기가 흐르고 있고,눈빛이 얼음장처럼 냉랭해서 전체적으로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라는 것이 유일한 홈이었다.
미남자는 절룩거리며 다가오는 응계성을 보고는 입가에 살짝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인지,아니면 이런 중요한 자리에 절름발이를 내보내는 종남파의 처사에 대한 조롱인지 알기 어려운 묘한 미소였다.
응계성도 그 미소를 보았다. 오히려 계속 그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터라 다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그 미소를 보았고,미소 속에 담긴뜻도 쉽게 짐작해 냈다.
응계성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미남자의 미소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미남자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분명 자신이 짓고 있던 것과 똑같은 미소였으나,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또한 가슴 한구석이 써늘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자가 바로 요즘 장안에서 사람들의 입에 제법 많이 오르내린다는 소벽력이로군. 화날 때 마다 웃는다고 했던가?’
오늘 출전할 가능성이 있는 종남파의 고수들에 대해서는 이미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하나 소벽력은 그 순위에서 가장 뒤에 있던 인물이었다. 손속이 매섭고 성격이 불같아서 장안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고는 있으나,한쪽 다리가 불구라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화산파의 고수들에게는 눈 밖의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불구인 무림고수가 없는 것은 아니나,그 수는 아주 적었다. 게다가 다리가 불구인 고수는 더더욱 없었다. 팔이나 다른 신체 부위와는 달리 다리는 무공을 펼치는 데 가장중요한 부위였기 때문이다.
물론 매신 종리궁도라는 한쪽 다리가 불구임에도 강호에서 열 손가락안에 드는 신법의 대가가 있기는 했으나,그러한 존재는 종리궁도 한 사람뿐이었다. 종리궁도는 태어날때부터 불구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법 하나에만 매진해온 사람이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것도 신법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종리궁도의 신법은 물론 가공스러울 정도로 뛰어났으나,막상 싸움을 벌이게 된다면 상황은 조금 달랐다.
누구도 그를 천하에서 열 손가락안에 드는 고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절정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종리궁도를 보고 놀라워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이 다리가 불구인 고수에 대한 무림인들의 시각이었다.
소벽력 응계성은 멀쩡한 몸으로 태어나 불구가 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그동안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도 실전에 있어서만큼은 일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물며 화산파의 일대제자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신의 상대는 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미남자뿐 아니라 화산파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 대다수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래서 응계성이 종남파의 선봉으로 앞에 나왔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의혹과 불신 어린 표정으로 옹성거리고 있었다.
종남파와 화산파 사이의 이번 회람연은 무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그 막중한 비중을 알 정도로 중대한 일이었다. 양 파의 명운(命運)이 걸리다시피 한 중요한 일전에서 선봉으로 나선 인물이 한쪽 다리가 불구인 응계성이었으니, 화산파진영에서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반면 종남파를 지지하는 인물들은 영문을 몰라 당혹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주위의 소란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응계성은 미남자의 이 장 앞에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둣,미남자가 즉시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반갑소. 나는 화산파의 이십칠대제자인 매절 북문도라 하오.”
북문도는 화산파의 일대제자들 중 에서도 가장 유명한 매화사절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물론 화산파에는 화산독응이라 불리는 유장령이라는 걸 출한 인재가 있지만,유장령은 화산파의 장문인을 따라 무당파의 집회에 참석하느라 이곳에 올 수가 없었다.
북문도는 매화사절 중에서도 매향송인혁과 함께 첫째 둘째를 다투는 최고의 기재였기에,회람연의 선봉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얼마 전에 방보당을 공격하러 갔다가 검마의 아들인 금조명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해 의기소침해 있던 그를 검단현이 선봉에 세운 것은 그에게 당시의 상처를 잊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북문도 또한 이번에 실추되었던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마지막 기회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검단현은 결코 두 번씩이나 아량을 베풀인물이 아니었다. 어쩌면 북문도의 실패가 신산 곡수의 지시로 일어난일이었기에 검단현이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번 대결에 나서는 북문도의 마음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상대가 한쪽 다리를 절고 있는 응계성임을 알게 되자 마음속의 긴장감이 자신도 모르게 느슨해졌다.
응계성은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씹어뱉듯이 말했다.
“종남파 이십일대 응계성.”
북문도는 그의 정체를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제 보니 그 이름도 찬란한 신검무적의 사제이며 웃을 때마다 벼락이 친다는……
하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응계성의 신형은 어느새 그를 향해돌진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