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62화
제 345 장 벽력선봉(2)
북문도는 비록 응계성을 경시하기는 했어도 화산파가 내세우는 기재답게 마음 한구석에는 일말의 경계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응계성의 신형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출검을 했다. 그것은 오랫동안의 체계적인 수련으로 습득된 무의식적인 반응이 었다.
파팟!
섬광이 번뜩이며 세찬 검기가 장내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삼기라도 한 듯 뒤이어 검광과 검기가 난무하는 치열한 격전이 시작되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시작된 싸움에 장내의 사람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명문정파 사이의 결전이란 의당인사말이 오가고 서로 간에 정중한 예의를 차린 다음 예전(禮典.) 초식을 교환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 통례인데,지금은 마치 시정잡배들처럼 별다른 기색도 없이 대뜸 격돌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처음부터 어찌나 매서운 공격을 주고받던지 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섬뜩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명문정파 제자들 간의 격전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흉험하고 살기에 가득 찬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된 데는 물론 응계성의 갑작스런 선공이 발단이 되기도 했지만,북문도의 절박한 심정도 한몫을 했다.
북문도는 지금이 자신의 명성을 되찾고 검단현을 비롯한 화산파 수뇌들의 눈에 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임을 절감하고 있기에 일단 손을 쓰자마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을 선보였던 것이다.
‘단숨에 이자를 쓰러뜨리고 다음 상대마저 꺾는다.’
최소한 두 사람의 종남파 고수들을 물리치는 것이 북문도의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급적 진력의 소모를 줄여야 했기에 빠른 시간 내에 승부를 낼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상대는 스스로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절름발이가 아닌가?
북문도가 펼치는 것은 혈매화검법으로,매화검법의 변형중 일종이었다. 매화검법이 비록 화산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검법으로 변화무쌍하고 현오막측한 면이 있지 만,그에 비해 사람을 살상하는 살기가 부족한 단점이 있었다.
화산파의 선대 중에 누군가가 그러한 점을 보완하고자 매화검법에 살초들을 섞기 시작했는데,그에 동조하는 고수들의 손길이 더해진 끝에 어느 순간부터 매화검법 특유의 현오함은 약해졌지만 살상력만큼은 더욱 뛰어난 전혀 다른 검법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순수한 매화검법과 구별하기 위해 앞에 ‘혈(교)’ 자를 붙이게 된 것이다.
화산파의 정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혈매화검법이 명문정파의 무공다운 격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으나,상당수의 제자들은 혈매화검법 특유의 강력함에 매료되어 매화검법보다 더욱 중시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북문도 또한 혈매화검법의 그런 강하고 살기 어린 위력에 흠뻑 빠진 인물이었다.
그의 생각에 결국 무공이란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더욱 빠르고 쉽게 상대를 제거할 수 있는 혈매화검법이 격조와 화려함에 치중되어 실속이 별로 없는 매화검법보다 더욱 뛰어난 수 단이 아니겠는가?
북문도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화산파의 제자들이 적지 않았고,북문도는 그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기재였다. 따라서 그의 혈매화검법의 진경은 거의 구성을 넘어서서 화경에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손에 들린 장검에서 뿜어 나오는 초식들은 하나같이 상대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버릴 것 같은 날카롭고 예리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맞서서 응계성도 사력을 다해 자신이 가진 절기들을 펼쳐 맞서고 있으나,누가 보기에도 열세가 확연했다.
북문도는 금시라도 응계성을 쓰러뜨려야 직성이 풀리는지 연거푸 무시무시한 살초들을 펼쳐 그를 압박해 들어갔다.
지금 빙글빙글 회전하며 응계성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드는 검초는 혈매화검법 중의 혈염일선(교聲一旋)이라는 것인데,매화검법의 매화토염에서 화려한 변화들을 제거하고 오직 상대의 목에 구멍을 낼 목적으로 날카로움과 속도를 중시한 초식이었다. 흡사 사파의 무공을 보는 듯한 그 악독한 수법에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숨을 들이 삼키는 소리가 거푸 흘러나올 정도였다.
전풍개는 처음 싸움이 벌어질 때부터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장내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응계성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것을 보면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이 혈염일선을 보고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화산파도 많이 변했군. 일대제자가 저런 검법을 익히는 걸 허용하다니.”
그의 입에서 홀러나오는 나직한 중얼거림은 그만큼 그가 느끼고 있는 놀라움과 당혹감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풍개는 그동안 적지 않은 고수들의 비무를 보아왔다.
명문정파 사이의 비무는 강호에서 벌어지는 여타의 격전과는 분위기부터 많이 달랐다. 정사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무리들처럼 치열하지도 않았고,문파의 사활을 걸었던 초가보와의 혈전처럼 살벌하지도 않았다. 문파의 위신과 체통을 생각해서 가급적이면 화려한 무공을 펼치면서도 상대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살수는 자제하는 편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무공을 익혔는지를 상대와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의 성격이 강했고,승패에 너무 연연하는것을 수치스러워했다.
물론 이번에 벌어지는 화산파와의 회람연처럼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도 있었지만,그런 싸움에서조차 상대의 피를 보기 위해 잔인한 살수를 쓰는 것은 가급적 금기시 되어 왔다.
그런데 지금 응계성과 북문도는 처음 싸움이 시작될 때부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상대의 목숨을 노렸을 뿐 아니라 사파의 무리들이 펼치는 것보다 더욱 흉험하고 살벌한 수법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그가 생각하는 화산파와의 회람연이 아니었다.
그들의 싸움을 보면서 전풍개는 자신이 이번 싸움의 의미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던지,아니면 그만큼강호의 조류에 뒤떨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스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너무 이들의 이기고자 하는 열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나?’
자신이라면 아무리 승리를 위해서라고 해도 공개적인 비무장소에서 같은 명문정파의 고수를 향해 서슴없이 목덜미를 찔러가는 저런 초식을 펼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살벌한 초식을 상대하는 응계성의 반응 또한 전풍개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의당 옆으로 몸을 피하거나 뒤로 물러서며 검으로 목덜미를 찔러오는 상대의 검을 쳐낼 줄 알았는데,응계성은 오히려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상대의 미간을 향해 검을 내찔렀던 것이다.
네가 내 목을 찌른다면 나는 너의 이마를 꿰뚫어 버리겠다라는 의도가 그대로 엿보이는 그야말로 너 죽고나 죽자는 식의 험악하고 무서운 대응이 었다.
그것을 본 전풍개의 얼굴이 더할수 없이 무거워졌다. 상대의 검이 자신의 목을 찔러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검으로 상대의 이마를 찔러가는 응계성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을 목격한 것이다.
그때 응계성의 얼굴에는 예의 독특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고,두 눈은 햇불처럼 강렬한 신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남들은 보기만 해도 무섭다고 하는 미소였건만,전풍개에게는 그 미소가 다른 어떤 표정보다 더욱 비장하고 슬퍼 보였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야 말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의미가 담긴 미소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불타오르는 두 눈에는 한 점의 두려음이나 망설임도 담겨져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일신의 안위나 죽고 사는 문제는 진즉에 초월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도 승리가 절실했던 거냐?
네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야 할 정도로?’
그때서야 비로소 전풍개는 일전에 노해광이 했던 말의 의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의 승패는 자신감이 아니라 절박감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까지 본 파의 제자들처럼 절박하게 살아온 자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전풍개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하고야 말았다.
‘변한 것은 나였고,승리에 대한 간절함이 부족한 것도 나였구나. 이놈들은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초가보와 싸울 때처럼 지금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맹렬하게 싸워오고 있었구나.’
전풍개는 자신이 화산파와 싸움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을 너무 의식하여 초심을 저버린 것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종남파를 일으켜 세우고야 말겠다는 당초의 결심이 어느새 흐려져 있었던 것이다. 오직 화산파와 경쟁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들보다 위신을 더 세울수 있을지를 신경 쓰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만 있으면 문파는 얼마든지 재건할 수 있다.
문득 전풍개의 뇌리에 초가보와의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본산을 떠나기 전에 장문인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문파의 안위보다 생존을 먼저 생각해야 했을 정도로 절박한 순간에 제자들을 두고 떠나야 했던 장문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초가보의 습격으로 문파를 버리고 서로 뿔뿔이 헤어져 외진 곳을 떠돌아다니면서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제자들은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의 처절함과 절실함을 어찌 자신이 잊었단 말인가?
불과 일 년도 지나지 않은 얼마전의 일이었는데 말이다.
자신이 초가보와의 싸옴 이후 종남파의 본산에 앉아 부상을 회복하고 있을 때,노해광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여전히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 중 누구 하나 자신에게 하소연하거나 힘들다고 어려움을 내보인 사람이 없었다.
전풍개의 시선이 문득 옆에 있는 노해광을 향했다.
노해광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장내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번지르르했고,태도에도 여유가 넘쳐흐르고 있었지 만,지금 전장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는 비장함과 뜨거운 열기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느 때는 약삭빨라 보이고,어느때는 정파 제자답지 않은 비정한 손속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도 있었지만, 전풍개는 노해광이야말로 종남파의 부흥을 위해서 다른 누구보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온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안의 막후 실력자라는 번드르르한 이름에 취해 있을 법도 하건만,그는 초가보와의 싸움 이후 여전히 가장 앞에서 살 떨리는 무서운 싸움을 벌여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전풍개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전풍개는 문득 이 재주 많고 뻔뻔하면서도 능글맞은 사질이 정말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향해 수고했다는 격려의 말이라도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하나 대신에 그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일은 이번 싸음이 끝난 후에 할 일이다. 그리고 칭찬이나 격려의 말 같은 건 모두 쓸모없는 일에 불과할 뿐이다. 진정한 칭찬은 종남파를 완벽하게 부흥시켜 반석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전풍개는 격전장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어느새 치열했던 싸움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응계성이 목을 찔러오는 공격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이마를 노리고 검을 날려오자 북문도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아무리 북문도가 이번 싸음에 필승의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뒷골목 흑도들이나 사용하는 이런 식의 대웅을 예상하지는 못했었다. 이대로 계속 검을 내뻗는다면 상대의 목을 찌를 수 있을지언정 자신의 이마는 그대로 두 쪽으로 갈라져 버릴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북문도는 검을 거두며 옆으로 몸을 비틀어 상대의 일검을 피하려 했다.
그 순간,응계성의 신형이 어느새바짝 그의 품으로 안겨들다시피 했다. 응계성이 한쪽 다리가 불구인점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신묘한 몸놀림이었다. 이것이 바로 방취아가 그를 위해 만들어준 금계탁속 중의 치계회포였다. 어린 닭이 엄마 닭의 품속으로 안기듯이 상대의 품 안으로 뛰어들어 공격에 유리한 자세를 선점하는 묘용을 지닌 초식이었다.
북문도의 대응은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응계성의 접근을 허용했음에도 북문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옆으로 반쯤 돌려 섰던 몸을 그대로 회전시켜 한 바퀴빠르게 돌았다. 그 바람에 북문도의 품에 뛰어들었던 응계성의 몸이 반대로 북문도의 왼쪽으로 서게 되면서 오히려 몸의 절반이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북문도는 자신의 앞에 그대로 드러난 응계성의 왼쪽 몸을 향해 주저하지 않고 장검을 내찔렀다. 너무 가까운 거리였기에 휘두르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취해진 임기응변의 조치였으나,그만큼 빠르고 순간적으로 이어진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설사 응계성이 아닌 신법의 절정고 수라 해도 완벽히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푹!
북문도의 장검은 응계성의 왼쪽 옆구리를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하나 응계성은 쓰러지기는커녕 오히려 왼쪽 팔을 바짝 오므려 북문도의 장검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오른쪽 발로 왼쪽 발의 발등을 밟으며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금계탁속 중의 노계서망(老鷄西望)으로,얼핏 보기에는 느린 듯해도 사실은 금계탁속 중의 다른 어떤 초식보다 빠르고 영활한 동작이었다.
북문도는 수중의 장검이 여전히 응계성의 몸에 꽂혀 있는 상태였기에 순간적으로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계속 검을 꽂은 채로 있어야 하는지,아니면 일단 검을 놓고 상대의 접근을 피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화산파에서의 오랜 수련이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수중의 검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몸에 배어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망설이게 했던 것이다. 그의 망설임은 아주 짧았으나,응계성의 반쯤 회전하는 몸이 그의 코앞으로 다가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북문도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검을 놓고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회전해 들어오는 응계성의 몸이 훨씬빨랐다. 응계성은 왼쪽 팔로 여전히 북문도의 장검을 껴안고 오른손으로 북문도의 어깻죽지를 잡았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이마로 북문도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빠악!
주위 사람들은 모두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굉음을 들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마와 이마가 부딪히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난 것이다.
똑같은 이마끼리 부딪쳤음에도 북문도는 머리통이 부서지는 듯한 엄청난 충격과 통증에 입을 딱 벌렸다. 상대의 머리가 부딪쳐 오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명령진기를 끌어올려 머리를 보호했음에도 말로 형용키 어려운 충격을 느꼈던 것이다.
이마가 깨어졌는지 뜨거운 핏물이 콧등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나 북문도가 채 정신을 가누기도 전에 응계성은 재차 머리를 들이받았다.
빡!
북문도의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북문도는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어맷죽지를 응계성의 손이 잡고 있는 데다 검을 쥔 오른손마저 응계성의 팔뚝 사이에 끼어져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응계성은 다시 허리를 뒤로 젖혔다가 있는 힘껏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동작은 얼핏 보기에는 시정잡배들이나 사용하는 박치기 같았으나,사실은 독두관이라는 절학이었다. 독두관은 순간적으로 전신의 기력을 이마에 모아 상대의 머리를 공격하는 무공으로,그 독특함 만큼이나 강호에는 널리 알려져있지 않은 기이한 수법이었다.
노해광은 우연히 서안에서 멀지 않은 함양의 괴인인 철탑신군 마해청에게 이절학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가 호천신유의 호천비록을 주고 독두관의 구결을 얻어왔던 것이다. 그독두관의 구결을 응계성이 전해 받은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응계성은 신법이 약한 신체의 특성상 접근전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독두관을 익힘으로써 결정적인 한 방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노림수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처음부터 응계성은 정상적인 대결로는 자신의 실력으로 도저히 체계적인 수련을 거친 북문도를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접근전을 유도하여 상대와의 간격을 최소화한 후 육박전을 벌일 생각이었는데,뜻밖에도 북문도의 순간적인 방심으로 독두관을 사용할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응계성은 이것이 자신이 북문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에 손을 쓰는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빠악!
다시 한 차례 응계성의 머리가 세차게 북문도의 머리에 내리꽂히듯강하게 부딪혔다.
두개골과 두개골이 마주치는 광경은 그 음향만으로도 사람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미 북문도와 응계성의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된 지 오래였고,머리를 부딪칠 때마다 북문도의 신형은 시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다시 응계성이 다섯 번째로 허리를 젖히려 할 때,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만. 이 싸움은 종남파가 승리했소.”
소리를 외친 사람은 화산파의 참관인으로 참석한 소요일사 유장현이었다. 공정하고 청정하기로 이름난 유장현이 종남파의 숭리를 선언하자,화산파 쪽에서도 별다른 반대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누가 보기에도 현재의 상황이 명백했으므로 반론을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소지산이 재빨리 응계성에게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응계성은 북문도의 어깨를 잡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계성. 이제 끝났다.”
응계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끝났다고?”
“그래. 네가 이겼다.”
응계성은 그제야 북문도의 어깨를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북문도의 신형은 허물어지듯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이미 그의 얼굴과 이마는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화산파에서 몇 사람이 황급히 달려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침통한 얼굴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소지산은 아직도 응계성의 옆구리를 관통해 있는 장검을 뽑고는 재빠른 손길로 그의 몸을 지혈했다.
응계성은 장검이 자신의 몸을 뽑혀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소지 산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이긴다고 했지?”
그의 얼굴 또한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시뻘겋게 변해 있었고,이마에 매어진 머리띠마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독두관은 비록 뛰어난 절학이었으나,응계성은 그것을 익힌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기에 그 성취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응계성 또한 북문도가 받은 충격에 못지않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혈낭자한 얼굴에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째서 서안 사람들이 그를 소벽력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소지산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이제 쉬어도 된다.”
“아니,나는 계속할 거야.”
“네가 할 일은 끝났다. 이제는 우리를 믿어라.”
“나는……
옹계성이 고개를 내저으려 할 때, 어느새 다가온 전풍개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쉬도록 해라. 너는 정말 멋지게 해냈다.”
응계성은 피 묻은 얼굴로 전풍개를 돌아보았다.
“제가 정말 쉬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여기서 네 할 일은 이제 끝났다.”
“흐흐.”
응계성의 입에서 신음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지산은 말없이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장내를 벗어났다. 채 몇 걸음걷기도 전에 응계성의 몸이 조금씩 늘어졌으나, 소지산은 내색하지 않고 그의 어깨를 안은 채 문밖으로 나갔다. 응계성은 적어도 자신의 발로 문을 벗어난 다음에야 비로소 정신을 잃고 소지산의 품에 쓰러져 버렸다.
소지산은 피 묻은 응계성의 얼굴을 소매로 문질렀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응계성의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본 소지산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렇게 웃지 않아도 된다.
본 파는 너를 억지로 웃게 할 만큼약하지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