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65화
제 347 장 명문제자(1)
정해는 재빨리 창문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펄럭이고 있던 푸른색 깃발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안색이 변해 황급히 반대쪽을 보니 매화문양이 수놓아진 하얀색 깃발 또한 같은 모양으로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그것을 본 정해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오른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 번째는 무승부로구나. 이것으로 일승일무. 예상보다 좋은 출발이다.’
그가 있는 곳은 회람연이 벌어지고 있는 화월루의 맞은편인 산해루의 삼 층이었다. 이곳은 원래 노해광이 집무를 보던 곳이라 외인은 출입하기 힘들었지만,오늘은 특별히 노해광의 허락을 받은 정해가 차지하고 있었다.
정해는 이곳에서 회람연의 결과를 지켜보는 한편,서안에 배치된 노해광의 수하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오늘의 회람연을 위해서 노해광은 자신이 부릴 수 있는 대부분의 수하들을 동원했을 뿐 아니라 종남파에서 내려온 혈화창 우문화룡과 수신대원들까지 모두 끌어 모아 정해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장안부의 동지인 강염을 소개시켜주어최악의 경우에는 관원들까지 동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었다.
오늘 하루뿐이지만 정해는 실질적으로 서안의 치안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막중한 권한과 무거운 책임을 떠안게 된 정해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강염에게는 어제 미리 찾아가서 협조를 부탁했고,노해광의 수하들과 우문화룡을 비롯한 수신대의 인원들은 각자의 무공 수준을 고려하여 위험 요소가 있을 만한 곳에 분산 배치했다.
노해광이 걱정하는 것은 주위의 신경이 온통 회람연에 집중된 사이에 검단현이 무언가 다른 수작을 부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대결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검단현이 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수하들을 총동원했을 뿐 아니라,자신과 친분이 있는 자들에게 모두 연통을 돌려 협조를 구한 것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판단한 노해광이 마지막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강염이 었다.
물론 강염에게는 서안에 뜻하지 않는 혈겁이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에 서만 협조를 구할 생각이지만,일단 만약의 사태가 벌어져도 관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해는 왠지 모를 든든함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무림인들이 알게 되면 무림의 일에 관부를 끌어들였다고 질책을 할지 몰라도 정해는 오늘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러한 질책쯤은 기꺼이 감수할각오였다.
그의 그런 노심초사가 작용했는지,회람연이 벌어진 지 제법 시간이 흘렸음에도 아직까지 서안에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일도 발생하지 않았고,회람연의 경과도 좋아서 이대로만 일이 계속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듯했다. 하나 정해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네.
들어온 사람은 지일환이었다.
정해는 다급한 표정의 지일환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일환은 장안부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만일 강염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제일 먼저 그에게 연락하여 관부를 동원할 계획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일환은 장안부의 정세를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지일환이 급하게 달려왔다는 것은 장안부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일환의 다음 말은 정해의 안색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갑자기 구역 순찰이 취소되었네.
순찰을 나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관원들뿐 아니라 외부에 나가 있던 관원들까지 모두 지부로 돌아오고있네.”
구역을 순찰한다고 했지만,그 관원들의 이동 경로는 정해가 지정한 몇 군데의 요지였다. 정해가 사전에 일을 방비하는 것이 좋다고 어렵사리 강염을 설득하여 오늘 아침부터 관원들로 하여금 순찰을 돌게 했던 것이다.
그 순찰이 취소되었다는 것은 장안부에 무언가 변고가 생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해는 흔들리려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강염 대인은 만나보셨습니까?”
지일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장안부 바깥의 경비도 갑자기 삼엄해져서 감히 안을 기웃거릴 엄두도 낼 수가 없었네. 아무래도 자네에게 먼저 알려야 할 것 같아 무작정 뛰어온 것일세.”
“잘하셨습니다.”
정해는 그를 다독거리고는 이내 그와 함께 집무실을 벗어났다.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가서 강염을 만나는것이 사태를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일환의 말대로 장안부는 오전에 정해가 다녀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비가 강화되어 있었다. 평상시에는 두 명의 관원들만이 지키고 있던 정문에 여덟 명의 관원들이 살벌한 눈빛을 번뜩이며 철통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해는 이곳까지 오는 도중 순찰을 돌던 관원들이 모두 철수한 것을 직접 확인하였기에 절로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문으로 다가가 강염을 만날것을 청하려 했다.
하나 강염을 만나기는커녕 입구로 들어가는 것마저 거부당했다.
“불가 (不可).”
아침나절만 해도 그를 순순히 들여보내 주었던 관원이 자신의 앞을 막아서자 정해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이 찡그려졌다.
“왜 안된다는 것이오? 이유라도 알려주시오.”
“지부대인의 명이오.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소.”
장안부 최고 관리의 명이라는 말에 정해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럼 강 대인께 말씀이라도 전해주시오.”
“그것도 불가. 당분간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 내외간에 어떠한 소식도 흘러나가지 못하라는 지부대인의 엄명이시오.”
결국 정해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 민감한 시기에 지부대인이 갑작스런 명을 내려 장안부의 출입을 통제하고 외부로 나가는 순찰까지 취소하다니 이게 과연 우연한 일일까?’
그의 예감은 그렇지 않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것이 만약 누군가가 장안지부를 충동질하여 계획한 일이라면?’
자신들이 장안부의 이인자인 강염에게 접촉하는 것처럼 다른 누군가가 강염의 상관인 지부대인을 통해 무언가를 획책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해는 진즉에 이런 가능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강염의 협조를 구한 것만으로 만족한 자신의 처지에 자책했으나,그것은 그의 능력으로는 불가항력에 가까운 일이었다. 노해광조차도 장안지부와 직접적인 접점이 없어 강염을 통해 일을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누굴까? 과연 누가 장안지부를 움직여 일을 벌이려 하는 것일까?’
배후인물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안부의 주인인 지부와 안면을 통할 정도로 서안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은 많지 않았다. 종남파가 세력을 잃은 사이 오랫동안 섬서성의 주인으로 행세해온 화산파라면 장안부의 지부대인과 어떤 식으로든 적지 않은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었을 것이다.
‘역시 화산파인가? 그렇다면 이런일을 한 의도는 무엇일까?’
정해의 머리가 어느 때보다 빠르게 굴러갔다.
노해광과 정해가 강염을 통해 얻으려고 했던 것은 최악의 상황에 대한 마지막 안전판이었다. 화산파는 이안전판을 제거해 버린 셈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노릴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숙의 예측대로 장안의 이목이 회람연에 집중된 사이에 화산파에서 혈겁이라도 일으키려 하는 것일까?
아무리 검단현이 강경한 인물이라고 해도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을까?
아니,가능성 여부는 젖혀두자. 나는 최악의 일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정해는 검단현이 무언가 커다란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두는 것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가만히 있다가 일을 당하는 것보다 백 배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검단현이 일을 벌인다면 목표는 어디일까? 그가 노릴 수 있는 곳을 정해야 한다.’
정해의 뇌리에 몇 군데가 두서없이 떠올랐다. 모두 노해광에게 중요한 곳이었고,그중 하나라도 잃게 되면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하나 왠지 정해는 자신이 무언가 놓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들은 모두 중요한 요처들이다. 하나 과연 검단현이 그곳들만으로 만족할까? 지부대인까지 동원하여 일을 벌일 정도라면 그로서도 최후의 상황까지 각오할 정도로 단단한 결심을 한 것일 텐데,과연 그정도를 노리고 일을 저지른 것일까?
보다 더 큰 목표가 있지 않을까?
그곳을 알아야 한다.’
정해의 커다란 눈이 쉴 새 없이 깜박거리며 여러 가지 빛깔의 안광이 어른거렸다. 그것은 무척이나 특이하고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그의 외호에 ‘궤령’이라는 단어가 들어간것도 바로 그의 이런 모습 때문일것이다.
‘방보당? 방보당이 비록 사숙과 본파의 자금을 담당하는 곳이기는 하나,방보당을 치기 위해 굳이 지부대인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소탐대실이다. 산해루? 산해루는 화월루의 지척에 있으니 그곳에서 소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있다. 그렇다면 혹시 손가장? 하나손가장은 이미 우리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에 있으니,손가장을 없애보았자 본 파에 큰 타격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인가? 정해야, 생각해라. 생각
해…….,
그때 정해의 뇌리에 1느 -? 한 가지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검단현이라면 관원들이 잔뜩 깔려 있는 장안에서 굳이 관원들을 철수시킨 다음 일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어떤 일을 벌이든 관원들을 이용했다는 의혹을 벗어나기 힘들 텐데? 아니, 그보다 굳이 이런식으로 요란법석을 떨면서 자신이 장안에서 일을 벌이려 한다는 걸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그의 생각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그렇다면 혹시 지부대인을 사주하여 공개적으로 관원들을 불러들인것은 우리의 이목을 장안에 집중시키려는 속셈이 아닐까? 사실 그는 장안이 아닌 다른 곳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검단현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노려야 할 장안 바깥의 목표라면……
정해의 머릿속에 한 가지 무서운장면이 그려졌다. 단지 상상만으로도 정해는 손발이 떨려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몸을 떨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가 빠른 신법으로 그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여기 있었군. 한참 찾았네.”
퍼뜩 고개를 쳐든 정해는 그가 지일환의 친구인 마정기임을 알아보고 눈을 빛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누군가가 자네를 찾아왔네. 자네가 없다고 하자 서신을 주고 갔는 데,급한 일인 듯하여 자네를 찾고 있었네.”
“그가 누구입니까?”
“그가 아니라 그녀일세.”
“예?”
“젊은 여인이었네.”
정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젊은 여인이 저를 찾아왔다고요?”
“그렇다네. 자네가 없다고 하자 자네에게 꼭 전해야 한다며 편지 하나를 주고 갔네.”
마정기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내밀었다.
“받아보게.”
정해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무심결에 편지를 받아들고 펼쳐 보았다.
의외로 편지에는 여인이 아닌 남성의 힘찬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정해는 그 필체가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것을 알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안색이 크게 변했다.
편지에는 짧은 글귀 한 줄이 적혀있었다.
〈종남파 본산.〉
그 글귀를 보는 순간,정해는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검단현이 지부대인을 이용해굳이 순찰하던 관원들까지 불러들였는지,왜 회람연이 벌어진 지 한참 이나 되었음에도 장안에서 아무런이상한 기척도 일어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자신의 마음이 아까부터 그토록 불안했는지…….
아울러 눈에 익은 그 필체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아차렸다.
그것은 바로 종남파의 배반자이며 지금은 화산파의 일대제자로 들어간두기춘의 것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