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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67화


제 347 장 명문제자(3)

처음으로 소지산이 반걸음 뒤로 물러 났다.

단순한 반걸음이었으나,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

소지산으로서도 송인혁의 이 일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매염일선은 그 자체로도 뛰어나지만,뒤를 이은 매염당당과 이어지는 연환식으로서 진정한 위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과연 소지산이 뒤로 물러나자 송인혁의 검이 더욱 빠르고 날카롭게 그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이 노리는 범위는 상당 부분 축소되었지만,대신에 그 움직임은 더욱 영활해져서 마치 검 끝이 갈 지자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 갈 지자의 움직임이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어서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소지산의 무심한 듯 깊게 가라앉아있는 두 눈에 한 줄기 번갯불 같은 신광이 어른거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소지산은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성큼 크게 내디디며 수중의 장검을 곧게 앞으로 뻗었다.

소지산의 일검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직 빠르고 정확하게 한 점을 노렸을 뿐이었다.

땅!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송인혁의 훤칠한 신형이 한 차례 휘청 거 렸다.

놀랍게도 소지산의 검봉은 갈 지자로 흔들리며 날카롭게 파고들던 송인혁의 검봉을 정확하게 가격했던 것이다.

그 충격의 여파가 상당했던지 송인혁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검봉이 마주친 순간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 한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공력이 나를 능가하는구나.’

송인혁의 마음속 경계심이 더욱 커졌다.

송인혁은 처음 소지산을 보는 순간부터 그가 각고의 수련을 쌓아온 놀라운 실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맑고 차갑게 정제되어 있는 눈빛과 검을 잡고 있는 자세만 보아도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과연 신검무적이 아끼는 인물답구나.’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그를 상대할자신감이 있었다. 몇 번의 검격(劍擊)을 나누면서 새삼 상대의 솜씨에 몇 번이나 놀랐지만,그래도 자신이 전력을 다하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 상대가 자신이 펼쳐낸 매염당당을 검봉으로 막아서면서부터 그러한 자신감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검봉으로 검봉을 막는다는 것은 상대의 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소지산은 검이 다가오는 그짧은 순간에 검로를 파악하고는 정확하게 검봉으로 막아내었던 것이다. 그것은 송인혁으로서도 똑같이 따라 한다고 자신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검으로 부딪혀본 결과 상대의 공력은 아무리 낮게 보아도 자신보다 반 수는 높아 보였다. 분명 비슷한 나이일 텐데 이렇게 공력의 차이가 난다는 것에 송인혁은 의아함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내공수련이라면 자신도 다른 누구보다 충실히 닦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도양양한 그를 위해 사부는 물론이고 사문에서도 몇차례나 영약을 하사하여 복용하였기에 적어도 젊은 층에서만큼은 공력으로 누군가에게 뒤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종남파의 제자가 자신보다 심후한 내공을 지니고 있으니 그가 당혹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번에 선공을 한 사람은 소지산이었다. 소지산의 검은 별다른 변화가 없이 곧장 송익현의 앞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다 송익현이 검을 들어막으려는 순간,검이 세차게 요동을 치며 새하얀 검광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그것은 마치 갑작스런 소나기로 인해 순식간에 산중(?」中)이 운무(雲露)로 뒤덮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바로 유운검법 전반부 여섯초식 중 가장 뛰어난 위력을 지닌운무중첩이 었다.

“좋은 검법이오!”

송익현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지르며 수중의 장검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조금 전의 유려하고 매끄러운 동작보다는 한결 빠르고 민첩한 모습이었다.

그에 따라 그의 검이 수십 개의 검화를 그리며 사방을 어지럽게 수 놓았다. 얼핏 보기에 무질서하고 두서없어 보이는 이 초식은 매화노방이라는 것으로,수많은 허초 속에 여러 개의 실초를 포함하고 있어서 매화검법 중에서도 절초로 꼽히고 있었다.

차차차창!

검광과 검화가 거푸 충돌하며 요란한 마찰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들이 격렬한 공방을 벌이자 장내의 분위기는 급격히 달아올랐다.

격조 있고 우아한 대결도 좋지만,역시 무림인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격렬함과 긴장감이 반드시 필요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들의 비무를 품격이 있다며 칭찬하던 중 인들이 지금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정신없이 눈앞의 격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맹렬하게 검법을 전개하는 두 사람이 조금 전의 부드럽고 기품 넘치는 대결을 하던 자들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둘 중 누구 하나 부상을 당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두 사람의 실력이 뛰어나기도 했지 만,서로 간에 상대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은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었이토록 치열한 공방을 벌이면서도 아직 누구도 눈에 거슬릴 만한 거친살수를 쓰지 않는 것만 보아도 두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들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켜보는 중인들은 무인들의 결투다운 치열함은 느낄지언정 첫 번째 비무 때와 같은 살벌하고 가슴 섬뜩한 느낌은 받지 않았다.

오직 눈앞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검법의 향연에 몰입하고 있을 뿐이었다.

송인혁의 매화검법은 확실히 대단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매화검법의 최고수라는 해정설이 보았어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게 분명했다. 비록 해정설 본인의 검과 같은 화려함은 부족할지언정 검법 자체의 위력은 결코 못하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송인혁의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인혁이 조금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몸이 느려진 것은 아니었으나,얼굴이 온통땀으로 범벅이 된 채 이를 악물고 있는 모습은 그가 지금 자신의 모든것을 끌어올려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소지산은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무심한 듯한 눈빛과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담담한 표정도 그대로였고, 깊고 안정적인 호흡 또한 마찬가지여서 가끔씩 가쁜 호흡을 내쉬는 송인혁과 확연히 비교가 되었다.

소지산 또한 유운검법만으로 송인혁을 상대하고 있었다. 유운검법은 진산월이 주로 사용하면서 당금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검법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서안에서 진산월이 유운검법을 펼쳐 절정고수들을 연파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직접 보았기에,다른 어떤 검법보다도 서안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소지산의 유운검법은 진산월이 보여준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은 없는 것 같았으나,대신에 정교하고 현란한 움직임은 그에 못지않았다. 특히 검로가 반듯하면서도 변화는 오히려 많아 보여서 진산월과는 다른 소지산만의 독특한 점이 엿보였다.

같은 검법임에도 이토록 달라 보이는 것은 아마도 검을 펼치는 두 사람의 성정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성정뿐 아니라 검을 펼칠 당시의 심리 상태 또한 두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당시 진산월은 사제인 응계성의 행방을 알기 위해 마음이 초조해 있었으며, 그를 숨기고 있는 무리들에 대한 분노로 살심이 크게 동해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손속에 일말의 자비도 두지 않았으며,그동안 쌓인울분과 원한이 칼끝에 담겨 있어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드는 살벌한 광경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소지산은 송인혁과 전통적인 방식의 비무를 벌이고 있으며,그에게 어떠한 개인적인 감정이나 원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그들의 대결은 치열함은 있을 지언정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리고야 말겠다는 살벌함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소지산은 이번 일전에서 당장의 승리보다는 자신의 검술을 점검하는 것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다분히 다음 비무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으며,그것은 그만큼 그가 송인혁과의 대결에 나름대로의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송인혁도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소지산이 자신과의 대결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유운검법의 위력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강력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유운검법의 흐름이 끊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매화검법 또한 유유하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검법으로 유명했으나,유운검법의 도도한 흐름과는 약간의 손색이 있었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 흐름을 막거나 끊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때문에 송인혁은 소지산의 검을 상대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질식할듯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 소지산의 검이 미묘하게 느려지면서 그러한 답답함이 해소되고는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송인혁도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워낙 상대의 검이 뿌리는 기세가 날카로워서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바짝 긴장해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런 일이 두세 번 반복되자 소지산이 일부러검을 늦추어 자신의 숨통을 트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 것은 그직후에 벌어진 한 차례 격돌에서였다. 그때 송인혁은 자신의 의심도 확인하고 약간은 기울어진 듯한 승부의 추를 되돌리기 위해 매화검법중의 세 절초를 연거푸 펼쳐내고 있었다.

파파파팟!

주위가 매화 문양의 검영에 휩싸이 자 금시라도 어디선가 진한 매화향이 화악 풍겨 나올 것만 같았다. 이삼 초의 연환식은 송인혁으로서도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린 최선의 공격이었다.

매향사일과 매영만리(梅影萬里)에 이은 매개천하의 연환삼절초는 매화검법의 정수를 담은 것이어서 넓은 대청 안이 온통매화꽃으로 뒤덮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켜보던 중인들은 물론이고 화산파의 고수들까지 송인혁이 펼치는 매화삼절초의 가공할 모습에 눈을 크게 뜬 채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지산의 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 검화 속을 유연하게 헤집고 들어왔다. 무수한 검화 속을 파고드는 한 줄기 검광은 마치 격랑속을 헤엄치는 한 마리 잉어를 보는것 같았다. 무엇으로도 그 잉어의 유영을 멈춰 세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송인혁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하며 계속 검초를 이어나갔다.

그 한 줄기 검광은 순식간에 매향사일과 매영만리의 검초를 뚫고 송인혁의 앞가슴을 향해 파고들었다.

언뜻 송인혁은 그 검광 속에 희미한 검영 하나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지금까지 그토록 무서운 기세로 다가들던 검광이 실은 허초이고,그뒤에 진검(眞食lj)이 숨어져 있다는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운검법 중의 절초인 추운축전임은 몰랐지만,그 숨겨진 검영이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 자신의 가슴이 피로 물들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미 매개천하의 검초가 절반 이상펼쳐졌음에도 여전히 그 진검은 검광 속에 숨겨져 발출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매개천하의 변화가 모두 끝나자 드디어 진검이 움직였다.

팟!

그 진검은 아슬아슬하게 송인혁의 어깨와 목덜미 사이 공간을 찌르고 지나갔다.

송인혁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운 좋게도 그 무시무시한 일초가 자신의 몸을 비켜간 것이다.

하나 다음 순간,그의 안색은 어느때보다 헬쑥하게 굳어졌다.

그 검광이 마지막 순간에 빗나간것은 과연 자신의 운이 좋았기 때문일까?

‘운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이자의 검은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있지 않았다.’

그제야 송인혁은 지금까지 상대가 자신을 봐주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순간,송인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하마터면 치밀어 오르는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 노성을 내지를 뻔했다.

하나 이내 분노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심한 자괴감과 패배감이 가슴한구석으로 몰려들었다.

‘더 이상의 승부는 무의미하다.’

송인혁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의 일전은 화산파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싸움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무인으로 서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송인혁은 돌연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검화를 뿌리며 맹렬하게 공격하던 송인혁이 갑자기 검을 거두고 물러나자 중인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나 몇몇 사람들은 이미사태를 파악한 듯 표정이 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송인혁은 소지산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이 비무는 내가 패했소. 송 모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이만 물러나고자 하오.”

소지산은 묵묵히 그를 보고 있다가 자신도 천천히 검을 거두어들였다.

“좋은 승부였소.”

담담한 그의 말에 송인혁은 가슴이 쓰라렸으나 끝까지 의연한 모습을 유지했다.

“소 대협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송인혁이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고 물러나자 한동안 주위에 웅성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하나 누구도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자세한 내막을 몰랐던 사람들도 화산파 측의 침울한 분위기를 보고는 뒤늦게 사정을 깨달은 듯한 모습이었다.

하나 그들 중 누구도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찌 되었건이번 싸움은 오늘 벌어진 비무 중에서 가장 볼 만한 대결이었고,두 사람 모두 명문정파의 제자들다운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모처럼 보는 정말 멋진 대결이었다며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승패를 떠나서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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