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68화
제 348 장 창천백일(蒼天白 티)(1)
회람연의 비무가 절반이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종남파의 우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일대제자들 중 최고수인 송인혁마저 패하자 화산파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송인혁이 승리했다면 승패가 똑같아져서 승부의 추를 원점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남은 고수의 수가 많아져서 오히려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송인혁이 패하자 일무이패로 일방적으로 몰리는 형태가 되었고,남아있는 고수도 두 명에 불과했다.
이제는 화산파의 누구도 이번 회람연에서 승리한다고 선뜻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 의외로 검단현은 아직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있었고,승리에 대한 확신도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런 검단현조차도 소지산의 검법에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노해광이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검단현은 노해광이 순순히 연승식을 승낙한 것에 한 가닥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예상을 뛰어넘는 소지산의 검술을 보고는 그가 바로 노해광이 숨기고 있던 패였음을 알아차렸다.
송인혁을 상대로 보여준 소지산의 무공은 강호의 어느 문파에 내놓아도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받을 만한 것이었다. 비록 두 사람은 각기 매화검법과 유운검법이라는 한 가지 무공만을 사용했으나,그 실력의 차이는 어느 정도의 안목을 가진 고수라면 누구나가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했다.
신검무적의 사제인 옥면신권이 가공할 권법으로 강호의 후기지수 중제일인자 소리를 듣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또 다른 사제마저 범상치않은 실력을 보이고 있으니,끝을 알 수 없는 종남파의 저력에 대해 새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신검무적의 사제다운 실력이다. 저 정도라면 젊은 층의 고수중에는 적수가 드물 것이다.’
검단현은 다시 한 번 오늘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솟아오르는 종남파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절감했다.
‘내 결정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늘 종남파에게 더 이상의 승리는 없을 것이다.’
검단현이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곧 드러났다.
한 사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를 본 사람들의 옹성거림이 급속도로 커지더니 이내 대청 안을 뒤덮을 정도가 되었다.
“저 사람은 천절검사 단우진이 아닌가?”
“설마설마했는데,천절검사가 벌써 나오는가?”
“화산파가 완전히 배수진을 쳤군.”
“대체 천절검사가 사장이라면 오장으로는 누가 나온다는거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상상이 안 되는군.”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의 표정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수정처럼 맑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과 유난히 긴 두 팔,그리고 곧게 편 허리와 장중한 듯 표홀한 걸음걸이까지 어느 한구석 비범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턱과 뺨은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반백(半S)의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묶어 이마를 훤히 드러냈는데,그래서인지 중년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의 나이는 육십이 넘은 상태였다.
그의 신분은 화산파의 이장로였고,별호는 천절검사였다.
천절검사 단우진!
화산파의 열 명의 장로 중 첫째인십지매화검 선우정은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에 장문인인 용진 산이 자리를 비운 지금은 그가 실질 적으로 화산파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성정은 날카롭고 때로는 강직해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다소 온건한 노선의 용진산과 달리 화산파를 위해서는 강경한 수단도 불사하지 않아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만,그만큼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가 화산파 최고의 수뇌 중 하나로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그의 무공이 높은 경지에 올라있기 때문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십지매화검 선우정에 못지않은 실력자라고 믿고 있었고,특히 위력이 강맹한 현천검결과 창궁십팔검(蒼훅十A劍)을 완성하여 강검으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화산파 제일의 고수였다.
중인들은 오늘 회람연에 참석하는 인물들 중 단우진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모두들 그가 제일 마지막으로 나서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가 네 번째비무에 나서게 되자 놀라움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단우진의 뒤에 나올 인물이 누구일지 짐작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이런 연승식의 비무에서는 가장 실력이 뛰어난 고수가 제일 마지막으로 나서는 법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 화산파에서 단우진을 능가하는 실력자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 회람연을 주도한 검단현도 순수한 무공 실력으로는 단우진에 비해 약간의 손색이 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더구나 종남파에서는 여전히 소지 산이 출전할 것이 뻔했다. 단우진은 소지산의 사조인 전풍개와 비슷한 항렬이므로,배분으로 따지자면 소지산에게는 할아버지뻘이나 마찬가 지였다.
물론 화산파와 종남파의 배분은 때로는 좁혀지기도 하고 때로는 넓혀지기도 해서 일률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그래도 대체로 선대의 항렬을 서로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명문정파 사이의 비무에서는 가급적 비슷한 배분의 고수들이 겨루는 것이 통례였는데, 단우진이 나섬으로써 한 배도 아니고 두 배 항렬이 차이가 나는 고수들끼리 대결하는 쉽게 보기 힘든 광경이 벌어지게 되었다.
종남파 고수들의 표정도 그리 좋지 만은 않았다.
특히 전풍개는 단우진의 출전에 의표를 찔린 둣한 표정이었다. 연회장에서 들어설 때부터 화산파의 진영에서 단우진을 발견하고는 내심 마지막 대결에서 그가 자신의 상대로 나서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전풍개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노해광을 돌아보았다.
“단가 놈이 벌써 나서다니 이상하군. 설마 화산파에서는 단가 놈만으로 이번 대결을 모두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전풍개는 단우진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기에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적지 않았다. 차갑고 직선적인 성격에 대외적으로 강경파인 그 때문에 종남파가 겪은 고초가 상당했기에,그에 대한 전풍개의 감정은 몹시 나쁠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전풍개와 비슷한 성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기산취악으로 전풍개가 종남파를 훌쩍 떠나지 않았다면 성격이 비슷한 두 사람은 언제고 격돌하여 서안 일대에서 한바탕 풍운을 일으켰을 게 분명했다.
노해광의 얼굴에는 별반 걱정스러운 빛이 보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닙니다. 검단현의 배후에 단우진이 있다는 것은 사숙께서도 이미 짐작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전풍개는 천연덕스러운 노해광의 반응이 못마땅한 듯 말투가 한층 거칠어 졌다.
“누가 그걸 물은 것이냐? 단우진이 벌써 나섰다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 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뜻인데, 그에 대한 복안을 가지고 있느냐는 말이다.”
“그런 건 없습니다.”
“뭐라고?”
전풍개가 쌍심지를 켜며 그를 노려보았으나, 노해광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강호인들의 대결에서 순수한 무공으로 상대를 꺾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이 무슨술수를 쓰든,무공으로 우리를 이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전풍개는 한동안 노해광을 쏘아보다가 조금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법 무인다운 말을 하는구나. 하나 그 말이 통하려면 단우진에게 쉽게 패해서는 안 된다. 소지 산이 그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으리라고 보느냐?”
처음으로 노해광의 얼굴에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두 눈만큼은 오히려 더욱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버티다니요. 저는 그가 적어도 단우진과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대결을 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전풍개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 렸다.
“그 녀석이 다른 누구보다도 무공수련에 매진해 온 것은 나도 알고 있지만,과연 단우진을 상대로 그럴수 있겠느냐?”
단우진은 전풍개도 솔직히 이긴다고 선뜻 자신할 수 없는 무서운 고수였다. 직접 검을 맞대본 적은 없었지만,지금 눈앞에서 보이는 기도 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검의 소유자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이십여 년간 전풍개는 단 한 순간도 손에서 검을 놓은 적이 없었지만,단우진 또한 그런 세월을 보내왔음이 분명했다. 평생을 화산파의 검법과 함께 살아온 절정의 검객을 과연 젊은 나이의 소지산이 감당할 수 있을까? 혹여 크나큰 부상이라도 당해 전도양양한 앞길을 망쳐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전풍개의 주름진 얼굴에는 그러한 걱정의 빛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노해광은 전풍개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낮게 가라앉으면서도 더할수 없이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는 결코호락호락하게 물러설 사람이 아닙니다. 사숙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풍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알고 있지. 그래서 더 우려되는거다. 저 녀석이라면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결코 스스로의 입으로 패배를 자인하지 않을 테니말이다.”
아주 작은 음성이었으나 전풍개를 주시하고 있던 노해광의 귀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노해광은 소지산을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는 전풍개를 향해 소리 없는 음성을 내뱉었다.
‘우리 중 누구도 패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제 입으로 패배라는 단어를 꺼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전풍개는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노해광의 의중에 전풍개까지 출전하는 경우의 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전에 이번회람연을 마무리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고,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지산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노해광은 소지산에게 그러한 힘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한 달 전,노해광은 은밀히 종남파를 찾아가 소지산과 방취아에게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천지유불란을 한 방울씩 주었다. 천지유불란은 공청석유에 버금가는 천고의 영약이어서 특히 내공증진에 커다란 효험이 있었다.
천지유불란을 복용한 두 사람의 내공은 기대대로 급격한 상승을 이루었다. 특히 천지유불란의 약효를 흡수하기 위해 보름간 폐관에 들어갔던 소지산은 임독양맥을 타통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종남파의 제자들 중 누구보다 충후한 그였기에 내공의 바탕이 가장 탄탄한 편이었으나, 그래도 임독양맥을 타통하게 될 줄은 천지유불란을 선사한 노해광조차도 기대하지 않은 일이었다.
노해광이 화산파와 정면 승부를 결심하게 된 것도 소지산의 성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난 후의 일이었다.
가뜩이나 진산월을 제외하고는 종남파에서 가장 뛰어난 검법을 지닌소지산에게 이번 일은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지산은 다시 열흘간의 연공으로 자신이 얻은 기연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고, 자연스레 검술의 경지 또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상승했다.
노해광은 남들의 눈을 피해 수시로 종남파를 찾아가 소지산의 실력을 몇 번이고 지켜보았고,마침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게 되자 비로소회람연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사정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기에 전풍개조차도 소지산의 실력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적을 속이려면 먼저 자신의 편을 속이라는 말처럼 노해광의 그런 의도는 훌륭하게 적중하여 화산파라는 거대한 적을 좁은 골목으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회람연을 하지 않고 계속적인 소모전을 벌였다면 당장은 우세할지 몰라도 문하제자의 수가 현격하게 적은 종남파가 결국에는 화산파를 당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설사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다 할지라도 그 후유증으로 인해 다시 오랜 세월 침체기를 겪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회람연은 노해광으로서도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고,정당하게 화산파를 누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제 판은 노해광이 의도한 대로 완벽하게 짜여졌다. 남은 문제는 과연 소지산이 그의 기대대로 멋지게 해치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 관해서는 노해광도 절대적인 장담은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노해광은 서로 비슷한 수준의 고수끼리의 대결이라면 결국 승부는 누가 더 승리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느냐고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 있어서 적어도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소지산을 능가하지는 못한다고 확신했다.
덤덤하고 무심한 겉모습과는 달리 누구보다도 끈질긴 투지와 강한 승부욕을 가진 사람이 바로 소지산이라는 사내였다.
‘백중(伯仲)의 승부를 벌일 수만 있다면,상대가 누구든 소지산은 절대로 승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오랫동안 소지산을 지켜본 노해광의 솔직한 평가였다.
그의 눈은 강한 기대와 염원을 담고 이제 막 싸움을 시작하는 소지산과 단우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