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69화
제 348 장 창천백일(蒼天白 티)(2)
정말 화창한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에 하늘은 끝없이 청명해서 마음속까지 깨끗하게 씻어주는 듯했다.
한세일은 한참 동안이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떨구었다. 시간은 어느새 미시(未時)를 향해 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천천히 걸 음을 옮겼다.
오늘의 날씨는 너무 좋았다. 슬슬더위가 몰려오는 계절임에도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전혀 덥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공기는 맑고 깨끗했으며,하늘은 더없이 높고 푸르렸다.
누구라도 이런 날에는 마음이 넉넉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다.
“흥흥!”
한세일은 의미 모를 콧노래를 부르며 산길을 걸어갔다. 모처럼 옆구리에 매어 찬 장검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피부에 닿는 촉감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가 은둔해 있는 오운봉은 화산에서도 가장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쪽으로도 산을 내려가 기가 수월치 않았지만,대부분은 취선대(緊仙臺)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나 오늘 한세일은 일부러 금쇄관을 지나 연화봉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곳은 화산에서도 가장 험한 지형이어서 일부러 연화봉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 외에는 거의 이용하는 자가 없었다.
연화봉 아래의 적선석 을지나면 바로 가파른 벼랑이 나타나는데,이 일대는 워낙 산세가 험해서 제대로 된 길이 없다시피 한 곳 이었다. 하나 이 적선석을 내려가는 길이야말로 화산에서 서안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한세일은 표홀한 신형으로 깎아지를 듯한 벼랑을 쉽게 타 넘어 불과 일각도 되지 않아 화산을 거의 빠져나올 수 있었다.
멀리 서안으로 가는 관도가 시야에 들어올 무렵이었다. 흥얼거리며 산을 내려가던 한세일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커다란 암석군을 향했다.
짙은 송림 속에 파묻힌 둣 자리한 몇 개의 커다란 바위들은 보는 이의 가슴에 탄성이 일게 하는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나 한세일이 걸음을 멈춘 것은 그 바위들이 만들어낸 풍경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앞으로 나오는게 어떤가? 사나운 기세를 그렇게 푹푹 풍기고 있으니 모습을 숨긴 의미가 없지 않겠나?”
암석군 중 가장 커다란 바위 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흑의를 입고 검은 수염을 기른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고색창연한 보검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한세일은 흑의 중년인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언뜻 입꼬리를 말며 희미하게 웃었다. 얼음장보다 차갑고 서 늘한 웃음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군.”
흑의 중년인은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바로 나요.”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별로 변한 곳이 없군. 자네 나이도 환갑이 멀지 않았을 텐데,여전히 젊어 보이는 게 신기하군. 무슨비법이라도 있는 건가?”
언뜻 흑의 중년인의 얼굴에도 한 줄기 웃음이 떠올랐다. 한세일에 못지않은 싸늘한 웃음이었다.
“마음속에 복수심이 들끓는 자는 쉽게 늙지 않는 법이지.”
“복수심이라. 섬뜩한 말이군. 나를 향해 칼이라도 갈아왔단 말인가?”
“몇 년 전까지는 진짜로 칼을 갈았지.”
한세일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 뒤로는?”
“마음속의 칼도 너무 갈았더니 닮아서 없어지더군. 그래서 그 뒤로는 없어진 칼을 다시 만드는 데 주력했소.”
한세일의 눈에서 한 가닥 날카로운섬광이 피어올랐다.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한세일이니 흑의 중년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의 칼을 다시 만드는 데 성공했나? 아니,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군. 성공했으니 내 앞에 다시 설 수 있었던 것이겠지.”
흑의 중년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의 중년인은 오랫동안 장성 최고의 검객으로 불렸던 황성고검 나력지였다.
원래 나력지는 장성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다 척박한 장성을 떠나 중원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의 발길이 제일 먼저 닿은 곳은 장성에서 멀지 않은 서안이었는데,우연히 전풍개를 알게 되면서 그와 친분이 두터워지자 서안에 정착할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 종남파는 종남삼검이 모두 건 재했을 뿐 아니라 문하제자들 중 촉망받은 인재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그들이 잘 성장한다면 앞으로도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굳건하게 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당시 화산파의 제일 가는 고수는 장문인인 검중선 사마원의 사제인한세일이었다. 한세일은 본인의 이름보다는 정천검이라는 별호로 더욱널리 알려져 있었는데,워낙 성격이 과격하고 직선적인 데다 무공이 뛰어나서 장문인인 사마원조차도 그를 통솔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다.
한세일은 점점 몰락해가는 종남파가 뛰어난 제자들의 등장으로 다시 부활할 조짐이 보이자 사전에 그런 기미조차 없애기 위해 종남삼검을 꺾으려 했다. 그가 첫 번째 목표로 삼은 사람은 종남삼검 중에서도 가장 저돌적이고 화산파에 적대적인 전풍개였는데,마침 전풍개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집에 머물러 있던 나력지가 한세일의 앞을 막아서게 된 것이다.
한세일은 나력지의 신분을 알고도 조금도 꺼려 하지 않고 그를 향해검을 뽑아 들었다.
두 사람의 승부는 불과 오십 초만에 결판이 났다. 장성제일검과 화산파 제일검객의 대결치고는 싱거울정도로 빠른 시간에 승부가 나버린 것이다.
하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살 떨리는 아슬아슬한 한 끗 차이의 승부였다.
당시 나력지는 혈우검법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그중에서도 마지막 초식인 혈천흥은 아직 단 한 번도 상대를 살려두지 않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력지는 혈우검법으로 맞섰음에도 좀처럼 한세일에게 우세를 점하지 못하자 순간적으로 혈천흥을 펼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일었다.
혈천흥은 전문적으로 상대의 인후혈을 노리는 수법이어서 일단 펼쳐지면 반드시 숨통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반드시 죽여야 할 상대가 아니면 함부로 사용하기 망설여졌던 것이다.
아무런 원한도 없는 화산파 제일의 검객에게 혈천홍을 펼친다는 것은 화산파라는 거대한 상대를 적으로 삼을 각오를 하기 전에는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다.
하나 이내 그는 혈천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후한 공력을 지닌 한세일에게 조금씩 수세에 몰리면서 오히려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한세일의 검은 추호의 사정을 보지 않는 냉정하고 무자비한 것이어서 나력지는 몇 차례나 죽음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마침내 나력지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혈천흥을 사용했으나,그 결과는 신통치 않아서 겨우 한세일의 어깨에 작은 상처를 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대신 한세일의 검은 한 치의 사정도 보지 않고 나력지의 가슴을 관통했다. 한세일의 검이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파고들려는 마지막 순간에 사력을 다해 몸을 비튼 덕분에 오른쪽 가슴을 꿰뚫리고 만 것이다.
뒤늦게 찾아온 전풍개가 아니었다면 나력지는 그곳에서 숨이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나력지는 서안을 떠나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장성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채 패인을 분석했던 나력지는 이내 자신의 검이 한 가지 방식만을 고집하는 단조로운 것이라최후의 순간에 한세일에게 공격방향을 읽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혈천홍은 비록 빠르고 날카로웠지만 공격 방향은 오직 상대의 인후혈뿐이어서 발출하는 것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한세일 정도의 고수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혈천홍을 사용하기 전에 몇 차례나망설였던 것도 큰 원인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막상 혈천홍이 펼쳐 지자마자 한세일이 쉽게 그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의 심적인 동요와 혈천홍이 가진 한계가 패인임을 알게 된 나력지는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 오랫동안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그가 마음속의 칼을 없앴다는 것은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심검(心劍)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뜻이고,새로운 칼을 얻었다는 것은 심검이 거의 완벽한 상태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혈천홍 또한 단조로운 한 가지 검로가 아니라 열 군데의 각기 다른 방향을 노리는 무서운 초식으로 발전되었다. 나력지는 그 초식에 십마혈류라는 이름을 붙였다.
십마혈류를 창안하고 심검을 완성한 나력지는 실로 이십 년이 훨씬지난 오랜 세월 만에 과거의 설욕을 위해서 다시 한세일의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세일 또한 그동안 적지 않은 굴곡을 거쳐 왔다.
나력지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 종남삼검을 하나씩 꺾으려 했지만,그때마침 공교롭게도 한세일의 제자가 소림사의 고수와 시비가 붙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한세일은 소림사 나한당의 당주인 굉수와 격돌하게 되었으며,뜻하지 않은 패배를 당하고 오운봉 아래에 칩거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실로 종남파에는 천운이라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그로부터 얼마 후에 종남파는 소림사에서 형산파에 굴욕을 당하고 구대문파에서 쫓겨나고 말았으니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세상의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세일은 굉수에게 패한 후 스스로의 별호를 한천검으로 바꾸고 오운봉 아래를 내려오지 않았으나,단하루도 손에서 검을 놓은 적이 없었다.
언제고 다시 굉수와 재대결을 하여 그를 꺾을 생각에 수련을 거듭했으나,몇 년 전 굉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동안 의욕을 잃고 잠시 방황하기도 했었다. 하나 종남파가 다시 부활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무뎌진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었다.
특히 종남삼검의 한 사람인 전풍개가 아직까지 살아남아 종남파 최고의 어른으로 불리며 종남파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알게 되자 예전에 이루지 못했던 일을 다시 마무리 지을 생각에 검날을 더욱 예리하게 갈아오고 있었다.
그러다 제자인 검단현에게서 종남파와의 회람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세일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나력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은 모처럼 일이 있어 하산하는 중이었는데,하필이면 이십 년동안이나 소식이 없던 자네가 지금이 시간에 내 앞에 나타난 것이 너무 공교롭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점에 대해 내게 할 말이 없는가?”
나력지는 선뜻 시인을 했다.
“원래 당신을 찾기 위해 화산을 뒤져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누군가가 나에게 이곳에 가보라고 하더구려. 오늘 이곳에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이오.”
“허,그런가? 내가 내려오지 않거나 다른 방향으로 갔다면 어쩌려고했나?”
“그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소.”
“누군가, 그 대단한 친구가?”
“노해광이란 자요.”
한세일은 가만히 그 이름을 뇌까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본 적이 있군. 요즘 제자 녀석의 골머리를 제법 앓게 하는 자라고 하던데. 과연 한 가닥 재주가 있는 모양이군.”
나력지는 팔을 자연스레 늘어뜨린 채 자신이 차고 있는 고검의 손잡이를 잡아갔다.
“어차피 그가 아니었어도 우리는 조만간 만나게 되었을 거요. 오히려이런 자리에서 만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소?”
한세일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번에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겠군.”
한세일은 넌지시 과거에 전풍개의 도움으로 나력지가 목숨의 구원을 받은 일을 비꼬았으나,나력지는 조금도 표정의 변화가 없이 무심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확실히 과거의 은원을 마무리 짓기에는 좋은 날이오.”
소리도 없이 날카로운 검이 뽑혀나와 주위에 시퍼런 검광을 뿌렸다.
한세일은 검을 뽑아든 채 점점 맹렬한 기세를 일으키고 있는 나력지를 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서 조금씩 서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는데,아무리생각해도 목표로 했던 시간까지 서 안에 도착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제자 녀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군. 그 녀석이 라면 내가 없어도 잘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한세일은 옷자락을 올려 묶고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차가운 검신에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자 새하얀 검광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흐릿한 검광의 잔영을 보며 한세일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렇군. 죽기에는 좋은 날이야. 자네는 정말 좋은 날을 골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