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70화
제 349 장 적수일만(1)
단우진의 검은 정말 무서웠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검법은 현천검결이었다. 원래 현천검결은 십이초로 된 검법으로,날카롭고 위력이 강맹하기는 하나 정교함은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나단우진의 손에서 펼쳐지는 현천검결은 보는 이를 섬뜩게 할 정도로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오하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어,천하의 어떤 검법에도 뒤지지 않아 보였다.
심지어 현천검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조차도 지금 단우진 이 펼치는 것이 진짜 현천검결인지 의심할 정도로 전혀 다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파파파팍!
대청 안이 온통 그가 뿌리는 검영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 검영의 회오리 속에 있는 소지 산의 신형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금시라도 검영에 산산조각 날 것처럼 위태로운 듯 했지만,소지산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검영의 일부분이 조금씩 깨어져나가고 있었다. 소지산의 손에 들린 검은 별다른 변화가 없이 허공의 한 부분을 찔러대고 있었는데,그때마다 그에게 다가오던 검영들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장난스러운 동작 같아도 소지산의 일검일검에는 상대의 검이 움직이는 주요한 경로를 막아서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금시라도 그를 천참만륙 내버릴 듯한 기세로 다가들던 단우진의 검이 마지막 순간에 그의 몸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
특별한 검법을 펼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절세의 보법을 사용하는 것 같지도 않음에도 거의 제자리에 서서 단우진의 가공할 현천검결을 유효적절하게 막아서는 그 광경은 보는 이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소지산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전풍개조차도 눈을 부릅뜬 채 경악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런 검지부동의 자세는 상대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검기의 흐름을 소상하게 파악하지 않고서는 펼치기 힘든 것인데……. 언제저 녀석의 무공이 저런 경지에 이르러 있었단 말인가?’
소지산이 종남파를 떠나 서안으로 온 것은 불과 칠팔 일 전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그의 무공이 갑자기 높아졌을 리는 없으니 그 전에 이미그와 비슷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전풍개는 그 사실을 전혀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저 녀석의 검을 본 것도 제법 오래전의 일이었군.’
그제야 전풍개는 자신이 은연중에 소지산을 자신의 아래로 보고 그의 실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않았다는것을 깨달았다. 초가보와 싸울 때의 일만 생각하고 그의 무공 수준을 낮추어 평가해 왔던 것이다.
초가보와의 싸움 이후 소지산은 정말 피나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장문인인 진산월이 몇몇 제자들을 데리고 제이차 강호행을 떠난 뒤로는 짤짤이 문파의 일을 봐야 하는 바쁜와중에도 그 외의 나머지 시간을 모두 무공을 수련하는데 할애했다.
연인인 방취아를 만나는 시간조차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방취아 또한 응계성에게 줄 신법을 만든답시고 하루 종일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아서 남들이 보기에는 서로 일부러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 소지산의 무공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전풍개는 소지산의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마음 든든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지산의 실력이 자신에 버금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상상으로라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보여지고 있는 소지산의 실력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아니,자신이라고 해도 저토록 삼엄한 검기의 한가운데에서 저렇게 침착하고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나무가 되고 검은 가지가 되어 자신에게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흔들림 없이 맞서간다는 검지부동은 상대의 검을 보는 안목과 자신의 검을 마음 먹은 대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절대로 도달할수 없는 경지였다. 또한 검과 몸이 하나가 되는 신검합일(불셨1]습一)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 중 하나이기도 했다. 검지부동이 검신동체(劍身同體)가 되고, 그것이 발전하여 결국 신검합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소지산이 검지부동의 경지에 오른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야 전풍개는 이번 비무의 결과에 어느 정도의 기대를 갖게 되었다.
단우진 또한 소지산이 특별한 초식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현천검결을 파해해 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오히려 직접 검을 맞대고 그와 겨루고 있기에 그의 실력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젊은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검에 대한 오의가 뛰어날 뿐 아니라 내공 또한 내 아래가 아니군.’
단우진은 그에 대한 평가를 자신과 동급으로 상승시켰다. 그러자 그의 검 또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스스스슷!
마치 사방으로 모래를 뿌리는 듯한 기이한 음향과 함께 그의 검에서 시퍼런 검기가 줄기줄기 홀러나왔다.
난폭할 정도로 거칠고 과격하게 움직이던 검로가 유연하게 변하며 자연스레 속도도 늦추어졌다.
조금 전만 해도 새하얀 검영으로 뒤덮여 있던 장내의 분위기 또한 일변했다. 검영은 보이지 않고 지금은 푸르스름한 기운만이 흐릿한 빛을 뿌리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 보이는 검법이었는데,어찌 된 일인지 지금까지 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던 소지 산이 처음으로 뒤로 훌쩍 물러나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소지산의 몸이 맹렬히 앞으로 질주하며 그의 검에서 빛살같은 검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왔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금시라도 상대를 난도질할 듯 매섭게 몰아붙이던 단우진의 검은 푸르스름한 검광만을 남긴 채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반대로 거대한 고목 나무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최소한의 반응만으로 대응하던 소지산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질풍 같은 기세로 새하얀 검광을 뿌려대고 있는 것이다.
전혀 달라진 두 사람의 모습이었으나, 한 가지만은 이 자리의 누구라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대결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면서도 흉험해졌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단 한 순간 만에 승부가 결정되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만큼 두 사람이 펼치는 검법의 기세는 놀라웠고,변화는 현오막측했다.
단우진이 펼치고 있는 것은 바로 창궁십 팔검 이 었다.
원래 창궁십팔검은 화산파의 많은 검법 중에서도 익히기가 까다롭고 특징이 애매해서 그다지 인기 있는 검법은 아니었다. 매화검법처럼 현묘하지도 않았고,현천검결처럼 강맹하지도 않았으며, 양의무극검법처럼 복잡하고 연환하는 맛도 없었다.
그렇다고 조화무궁검법(造化無窮劍法)처럼 지고의 경지를 엿볼수 있는 무공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검로의 변화가 워낙 복잡할 뿐 아니라,최소한 검기를 자유자재로 뽑아내지 못하면 검초를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공력의 소모가 막심해서 화산파에서도 이 창궁십팔검에 매진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단우진은 그런 극소수의 인물들 중 에서도 유일하게 창궁십팔검을 십이 성 연마한 사람이었다.
지금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창궁십팔검은 그동안 알려진 세간의 평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더할 수 없이 현묘했고,부드러운 가운데 무시무시한 살수를 품고 있었으며,도도한 강물처럼 끝없이 이어져 상대로 하여금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에 맞서는 소지산의 검법 또한 범상치 않아 보였다.
마치 섬전을 방불케 하듯 빠르고 날카로우면서도 눈이 어지러울 만큼현란하기까지 했다. 더구나 검초의 흐름이 갈수록 거세어져서 이대로 가다가는 누구라도 그 거센 흐름에 휩쓸려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종남파의 검법에 대해 나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몇몇 고수들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 소지산이 펼치는 검법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던 것이다.
‘천하삼십육검이나 유운검법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다고 성라검법이나 월녀검법도 아닌 것 같고…….
신검무적의 검법은 짐작이라도 갔는 데,저건 도무지 모르겠구나.’
그들이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지산이 펼치고 있는 검법은 장장이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실전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종남오선이 건재했던 시절에 삼락검은 종남파를 대표하는 검법이었다. 각기 강력함과 빠름,변화무쌍함에서 당시 무림의 어떤 검법에도 뒤지지 않는 위력을 지닌 삼락검은 종남오선과 함께 종남파의 이름을 구대문파의 가장 앞줄로 이끌어준 상징과도 같았다.
하나 종남오선이 모습을 감춘 후삼락검 또한 하나둘씩 사라져 종내에는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종남파의 실질적인 몰락이 시작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삼락검 중 하나인 낙하구구검이 실로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고 드디어 강호무림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소지산이 낙하구구검을 처음으로 펼친 것은 초가보와의 싸움 때였다.
하나 당시 그의 검을 목격했던 자들은 모두 검하고혼이 되고 말았으니,실제로 낙하구구검이 처음으로 강호인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낙하구구검은 혈선 정립병이 남겨놓은 구종비기 중에서도 태진강기와 함께 가장 중요한 무공이었다. 떨어지는 무지개를 아홉으로 베고, 그것을 다시 아홉 등분하는 식으로 끝없이 변화를 일으키는 이 검법은 그변화무쌍함만큼이나 위력 또한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과거 정립병이 이낙하구구검을 펼치면 상대는 눈앞이 어지러워 제대로 방비도 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당시 정립병을 혈선보다는 염라검객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더 많았다. 일단 검을 펼치면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리고야 마는 이 낙하구구검은 특히 연환할수록 더욱위력이 강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그만큼 익히는 것도 까다로워서 소지산조차도 아홉 초식을 모두 연환하기 시작한 것은 천지유불란을 복용하여 임독양맥이 타통된 후부터였다. 낙하구구검의 후반 삼절초는 최소한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그동안은 아무리노력해도 내공의 부족 때문에 후반절초들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 노해광이 자신과 방취아에게 천지유불란을 가져왔을 때 소지산은 고마움을 느꼈을지언정, 이것으로 자신의 인생이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었다. 하나 천지 유불란 한 방울을 복용한 순간,그는 그동안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내공의 부족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같이 천지유불란을 복용한 방취아가 어느 정도의 내공이 늘어난 것에 비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성과였다.
노해광은 그것을 두고 ‘한 방울의 물로도 잔은 넘친다’고 했다. 소지 산의 내공이 이미 그의 그릇을 가득채우고 있었기에 천지유불란의 약효가 그 이상의 효과를 내었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모두 그동안 네가 얼마나충실히 내공을 쌓아왔는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좀 더 네자신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노해광은 그렇게 말하며 소지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때 노해광의 얼굴에 가득 떠올라 있는 환한 미소는 소지산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임독양맥이 타통된 후 소지산은 샘물처럼 솟구쳐 오르는 내공을 가다듬는 와중에도 낙하구구검의 연마에 전력을 기울였다.
낙하구구검을 처음으로 연환하게 된 것은 임독양맥을 뚫은 지 이틀후의 일이었다.
그동안 초식의 변화와 세세한 흐름까지 수백 번을 연마했었지만,항상마지막 순간에 내력이 끊겨 좌절했던 소지산은 도도한 내공의 흐름이 끝까지 이어져 낙하구구검의 마지막초식인 자하천래가 완벽히 펼쳐지던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도저히 깰 수 없는 거대한 벽과도 같았던 자하천래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하늘을 뒤덮는 가공할 광경을 연출하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첫 번째 초식인 채홍서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뒤이어 반천흥염(盤天紅染)과 경흥섬전이 전개되면서 끝없는 순환을 계속했다.
소지산은 그날 밤이 새도록 낙하구구검을 수없이 연환했고,그로부터 삼 일 후에야 비로소 연공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제 화산파와의 회람연에서 낙하구구검의 진정한 위력을 초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