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372화


제 350 장 결자해지(1)

노해광이 재빨리 그에게 다가왔다.

“팔은 괜찮은 거냐?”

소지산은 특유의 무덤덤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견딜 만합니다.”

어느새 왔는지 전풍개가 불쑥 손을 내밀어 그의 왼팔을 붙잡았다. 소지 산의 눈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찌푸려졌다가 다시 펴졌다.

전풍개는 소지산의 왼팔을 살펴보고는 퉁명스런 음성을 내뱉었다.

“다행히 신경을 다치지는 않았지 만,검날이 상당히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무리하다가는 자칫 팔을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부상 당한 부위는 왼쪽 팔뚝이었다. 한 램만 더 내려갔으면 예전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던 팔꿈치 부위를 다시 다쳤을 것이고,그랬다면 영원히 왼팔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사실은 상대의 결정적인 일검을 왼쪽팔뚝으로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그곳이 그나마 가장 덜 위험한 부위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전풍개가 상처를 살피느라 베어진 부분이 갈라져서 깊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통증이 무척 심할 텐데도 소지산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아직은 검을 더 휘두를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전풍개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두 명이나 꺾어놓고도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냐? 화산파에서 누가 나오든 남아있는 놈은 우리에게 맡기 도록 해라.”

문득 소지산은 전풍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항상 예의와 공손함을 잃지 않았던 소지산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숙조님.”

소지산이 묵직한 음성으로 자신을 부르자 전풍개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노해광까지 흠칫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는 소지산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맑고 정명했으나,그 안에는 평상시와는 다른 강인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본 파의 최우선 과제는 생존이었습니다. 강호에서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저희들에게는 지상명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이제 우리는 군림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승리하는 것만이 아니라,상대를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풍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본 파가 화산파에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그들로 하여금 두 번다시 도발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억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화산파뿐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본 파를 적대시하려 한다면 몇 번이고 심사숙고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항상 자신을 낮추어 왔던 소지산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하고 신념에 찬 음성이었다.

“그래서 이번 비무는 제가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그게 저의 의지입니다.”

“너의 의지라고?”

소지산은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풍개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복잡한 눈으로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창 뻗어 나가는 제자의 기세를 꺾을 수야 없지. 정녕 네 의지가 그러하다면 네 뜻대로 해보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소지산은 다시 한 번 그를 향해예를 표하고는 붕대로 왼쪽 팔뚝의 상처를 동여댔다. 붕대가 단단히 매어진 것을 확인한 소지산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두 눈에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는 검단현의 모습이 들어왔다.

전풍개와 노해광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고 소지산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자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더욱 크게 일어났다. 왼팔에 적지 않은 부상을 입고 있음에도 여전히 소지산이 다섯 번째 비무에 나선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들의 놀람에 찬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회람연의 결과는 이미 절반 이상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비무는 일방적인 종남파의 우세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네 번의 비무 중 종남파는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삼승일무(드勝一無)를 거두었다. 그에 비해 우세하리라 예상했던 화산파는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하고 막판으로 몰리고 말았다.

더구나 현재 화산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천절검사 단우진의 패배는 다른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상대가 종남파의 이십 대젊은 고수라는 점에서 그것은 가히 강호무림 전체를 경동시킬만한 놀라운 일이었다.

화산파 진영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침울했고,기세가 꺾어져 패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검단현의 안색은 보는 사람이 민망할 만큼 처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검단현은 눈앞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우진은 그의 사부인 한세일을 제외하고는 화산파의 누구도 쉽게 상대하지 못할 뛰어난 검객이었다. 그가 펼치는 창궁십팔검은 보는 이를 놀라게 할 만한 절세의 절학이었고,내공 또한 심후해서 화산파의 이장로라는 이름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이 기도 했다.

그런 단우진이 패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검단현을 지지해 온 많은 것들이 송두리째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시가 훨씬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부인 한세일이 아직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세일의 등장이야말로 이번 회람연에서 종남파를 꺾을 회심의 비책이었다. 단우진과 한세일이라면 종남파에서 누가 나온다 할지라도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검단현의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그랬기에 앞선 세 사람의 비무자를 자신의 뜻에 맞는 인물들로 꾸밀 수 있었으며,그들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났음에도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단우진은 뜻밖의 패배를 당해 버렸고,사부인 한세일은 약속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한세일의 평소 성정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단현의 마음속에 짙은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혹시 사부의 신상에 무슨 변고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하나 한세일은 화산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칩거해 있었을 뿐 아니라,화산을 떠나 이곳까지 오는 길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최대한 은밀한 경로로 이동하기로 했기에 남들의 눈에 쉽게 뜨일 리가 없었다.

설사 그의 행적을 누군가가 발견했다 할지라도 한세일의 걸음을 막을 만한 사람은 서안 일대에는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검단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검단현의 뇌리에 얼마전에 보았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산해루의 삼 층에서 불쑥 나타나자신의 계획을 산산이 깨어지게 한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검단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불길한 생각이 섬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황성고검은 사부와 오랜 원한 관계에 있는 자다. 그가 이십여 년 만에 불쑥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 과연 순수한 우연이었을까? 그리고 그자리에 나타났다면 다른 어느 곳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불현듯 떠오른 몇 가지 생각에 검단현의 얼굴이 헬쑥하게 굳어졌다.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노해광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노해광은 살짝웃어 보였다. 의미를 알기 힘든 미소였으나,그 웃음을 보는 순간 검단현은 한세일이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진정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저자로구나! 저자가 황성고검으로 하여금 사부의 발길을 막아서게 한것이 틀림없다!’

검단현은 뒤늦게나마 진실을 알아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우진은 신검무적의 사제인 소지 산에게 패했으며, 화산파는 벼랑 끝으로 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화산파에서 단우진보다 뛰어난 고수는 세 명뿐인데,장문인인 용진산은 무당산에서 돌아오는 길이었고,수석장로인 선우정은 자신의 거처에 칩거한 채 이번 회람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유일한 희망인 한세일은 상대의 술책에 발이 묶여 참석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검단현은 앞선 세 번의 비무가 너무나 아쉬웠다. 강경일변도인 단우진과 자신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거처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선우정도 원망스러웠고,노해광의 술책을 미리 예비하지 않은 자신의 소홀함에도 심한 자책감이 들었다.

검단현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에도 소지 산은 여전히 대청의 중앙에 우뚝 선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장내의 시선도 하나둘씩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누군가는 나서서 회람연의 마지막을 장식해야 했다.

검단현은 화산파 진영을 돌아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몇몇 사람은 고개를 돌렸고,몇몇 사람은 추궁하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그를 위로하거나 격려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검단현은 심한 외로움과 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평생을 화산파의 제자로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검단현은 갑자기 피식 미소를 흘렸다. 독기와 악기가 뒤섞인 섬뜩한 미소였다.

‘아직 승부는 끝난 게 아니다. 나에게는 아직 남겨둔 수가 있다.’

회람연에서 승리한다 한들,본산을 잃어버린 종남파가 과연 강호의 대문파로 우뚝 설 수 있을까?

자신의 본거지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오명을 과연 씻어낼 수 있을까?

설사 그럴 수 있다고 한들 그때의 종남파를 화산파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는 본 파를 위해 의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후일 판가름 날 것이다.’

검단현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주저하지 않은 걸음으로 소지산을 향해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지산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검단현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하고 담담한 시선이었으나,그 속에는 한 줄기 차가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종남파와 화산파는 오랜 숙적이었지만,그동안은 일정한 선 이상을 넘지 않아 왔다. 소소한 다틈은 있을지언정,문파의 사활까지 내걸면서 격렬하게 맞부딪힌 적은 없었다.

하나 검단현이 서안의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양 파 사이의 분쟁은 피를 부르는 혈전으로 바뀌었고,종내에는 양 파의 모든 것을 건 회람연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분쟁이 격화된최초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였든,검단현의 등장이 그 상황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였다.

종남파의 본산에 머물러 있는 소지 산도 검단현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이번사건의 가장 중추적인 인물인 검단현을 마주하게 되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를 제거하여 이번 일을 잠재워야겠다는 결연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검단현 또한 비장한 마음은 마찬가 지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이미 화산파 내에서는 강경일변도의 정책에 대한 크고 작은 불만이 팽배해 있는 상황이었다. 설사 종남파의 본산이 잿더미로 화한다 할지라도 그의 처지는 결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에게도 마지막 기회는 존재했다. 이번 회람연을 기적적인 승리로 이끈다면 아무리 그에게 불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공개적으로 그를 성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 그 일에는 말 그대로 기적이 필요했다.

아무리 검단현이 한세일의 수제자로서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종남파의 고수 세 사람을 연거푸 격파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일이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소지산만 하더라도 검단현보다 뛰어난 고수라고 평가받고 있는 단우진을 격파한 인물이 아닌가?

그럼에도 검단현으로서는 그 불가능에 승부를 걸어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것이 지금의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