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74화
제 350 장 결자해지(3)
그는 주저하지 않고 검단현의 비어있는 옆구리를 향해 검을 횡으로 쓸어갔다. 채홍서천에 이은 반천홍염의 연환식은 확실히 위력적이어서 이 상태로 검초가 이어진다면 검단현은 단순히 옆구리를 베이는 정도가 아니라 몸통이 두 조각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검단현은 물러서기는커녕오히려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더욱 매섭게 검을 휘두르는 것에만 집중했다.
파파파팟!
건곤화우라는 이름 그대로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천지사방이 온통 검영에 파묻혀 버렸다.
특이하게도 건곤화우는 처음 펼쳤을 때와 중후반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초식이었다. 처음에는 온몸에 허점이 드러나는 것을 감수한 공격일변도의 초식 같았는데,검초가 전개될수록 허점들이 하나둘씩 없어지며 투로 또한 복잡하고 정교해졌다.
그 정교한 변화들은 자신의 몸에 있는 허점들을 빠른 속도로 보완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검초가 모두 펼쳐졌을 때는 어느 한 군데도 허점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수비초식이 되고 말았다.
소지산이 펼친 반천흥염은 그 초식에 막혀 맥없이 사그라졌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진정한 노림수였던 삼대살초의 두 번째 초식인 현사조별(親絲約舊)이 펼쳐졌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듯했던 검광들이 급속도로 오므라들며 새하얀 실선이 소지산의 전신을 에워싸 버렸다. 이 실선 하나하나가 검기가 압축될 대로 압축된 검사라는것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건곤화우로 약점을 드러내어 상대의 공격을 유도한 다음 퍼져나간 검기를 거두어들여 상대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이 바로 현사조별의 특징이 었다.
마치 상대를 낚시질하는 듯한 이러한 방식은 전혀 명문정파의 무공답지 않은 것이어서 화산파 내에서도 이 초식들을 굳이 조화무궁검법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했다. 결국 이러한 초식들만을 따로 모아 삼대살초로 이름 짓고 아주 위급한 순간이 아니면 펼치지 못하게 제어했던 것이다.
소지산은 상대의 검의 변화를 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채로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낙하구구검의 초식들이 줄지어연환되며 검광이 끝없이 뿜어 나왔다.
팍! 팍!
하나 그 검광들은 검사에 부딪혀맥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소지산의 검에서 발출되는 검광들이 그의 전신을 에워싼 채 다가오는 검사와 부딪혔다 깨어지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에 따라 쉬임없이 연환되던 낙하구구검의 초식들이 조금씩 끊겨질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천강은흥에서 흥예장공으로 넘어가는 초식의 연결이 잠시 흐트러지게 되었다. 그것은 거의 알아차리기도 힘들 만큼 짧은 순간의 일이었으나,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단현은 몸 전체를 던지다시 피 하며 소지산의 코앞으로 쏘아지 듯 날아갔다.
휘리리릭!
허공에 솟구쳐 오른 그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그의 손에 들린 검 또한 빠르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마치 날카로운 꼬챙이로 구덩이를 파듯 사람과 검이 함께 회전하며 날아드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괴이함과 섬뜩한 느낌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삼대살초 중의 마지막초식인 무극상전이었다.
이 초식에 당한 사람의 몸에는 검자체의 회전력 때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게 된다. 상대를 단순히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신체마저 심하게 훼손시키기 때문에 마도의 어떤 살인수법보다도 잔인하고 무서운무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단 펼치면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이 초식이 공개된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소용돌이쳐오는 압도적인 공세에 눌렸는지 끝없이 이어질 듯하던 소지산의 검이 허공에서 멈칫거리며 더 이상의 연환초식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 바람에 아주 잠깐이지만 검광에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눈앞에서 펼쳐진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전풍개의 입이 그대로 다물어져 버렸다. 언뜻 드러난 소지산의 얼굴은 전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 무심한 듯하면서도 냉정한 얼굴을 보자 전풍개는 갑자기 들끓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장문인인 진산월을 보고 느꼈던 감정과 유사한 것이었다. 아무리 세찬 폭풍우가 몰아친다 해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천년거목을 보는 심정과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멈춰진 듯했던 소지산의 검이 다시 빛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한 줄기 유성(流星)이 흐르는 것처럼 허공을 유연하게 가르고 지나가는 그의 검에서 노을을 연상케 하는 자욱한 검광이 홀러나왔다.
그 검광은 무서운 기세로 회전하며 날아드는 검단현의 검과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콰아앙!
검기와 검광이 충돌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거대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커다란 대청이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단단한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바닥이 여기저기 부서지며 뒤집혀진 땅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검기가 뒤섞인 세찬 경기가 사방을 휩쓸자 중인들은 경기를 피해 황급히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부서진 나뭇조각들과 홁먼지로 인해 대청안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끄으으……
짙은 먼지 사이로 누군가의 나직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중인들은 모두 초조한 표정으로 먼지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씩 주위가 보이기 시작하자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탄성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아아!”
그 탄성 속에는 경악과 감탄,아쉬움과 후련함 등 다양한 감정들이 송두리째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는 움푹파여 맨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검기에 갈가리 찢긴 잔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잔해의 한복판에 한 사람은 우뚝 서 있었고,한 사람은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소지산이었다. 그의 앞가슴은 둥그런 형상으로 검기에 베어져 엷은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왼팔에 매어둔붕대는 풀어헤쳐져 한쪽 팔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태산처럼 우뚝 선 채 오연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철탑을 보는 듯했다.
반면에 질펀한 피바다 속에 누운채 연신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고 있는 사람은 검단현이었다.
검단현의 모공이란 모공에서는 모두 피가 홀러내리고 있었고,입고 있던 의복 또한 대부분이 걸레 조각처럼 잘려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입과 코는 물론이고 귀와 눈에서마저 피를 홀리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유혈 낭자해서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연신 꿈틀거리며 필사적으로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바둥거리고 있었다.
“크으으!”
보다 못한 화산파의 제자들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왔으나,그의 상처가 너무 심해서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자칫 잘못건드렸다가는 금시라도 숨이 끊어질것 같았던 것이다.
무극상전은 그 가공할 위력만큼이나 반동 또한 큰 초식이었다.
무섭게 선회하는 회전력으로 상대의 몸을 꿰뚫어버리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지만,더 큰 힘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자신의 힘까지 같이 더해져서 지금처럼 시전자를 처참한 몰골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한세일이 검단현에게 마지막 초식만큼은 생사의 위기가 아니면 펼치지 못하도록 신신당부했던 것도 무극상전의 위력이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할 만큼 잔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만에 하나 더 강한 상대를 만나면 그 반탄력으로 인해 오히려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상대를 죽이 든지 아니면 자신이 죽게 되는 필생필사(必生必死)의 수법인 것이다.
검단현은 자신을 부축하려는 화산파 제자의 손길을 뿌리치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소지산을 올려 보았다.
“너…… 너 일부러 빈틈을 보인 거로구나……
소지산은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을 내려 검단현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그는 낙하구구검의 마지막세 초식을 한순간에 거의 동시에 펼쳐냈다. 홍예장공부터 자하천래에 이르는 후반의 세 초식은 그 자체만으로 연환할 수 있으며,또한 하나의 초식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 위력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가공스러웠지만,반면에 임독양맥을 타통 하거나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펼칠 엄두도 낼 수 없는 상승의 수법이었다.
소지산이 천강은홍을 펼치다가 연환식을 잠깐 멈춘 것은 검단현의 최후의 공세를 유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결국 무섭게 선회해 들어오는 무극상전을 연환삼절초로 받아쳤던 것이다.
검단현은 눈과 입으로 피를 철철홀리면서도 소지산을 올려보고 있다가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 바람에 그의 입 밖으로 시커먼핏물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흐흐……!”
화산파의 제자들이 깜짝 놀라 그를 안으려 했으나 검단현은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어 그를 제지하며 소지산을 노려보았다.
“네가 이겼다……. 오늘의 싸음은 종남파가 이겼다……. 하지만 진정한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지산은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태에서도 아직까지 승부 운운하는 검단현의 얼굴을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 그가 채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대청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곳은 종남파와 화산파가 회람연을 여는 장소이기에 회람연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바깥에서 누구도 출입할 수 없게 호위무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들을 뚫고 안으로 난입했단 말인가?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버릇없는 인물에게로 쏠렸다.
그를 본 노해광이 흠칫 놀라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들어온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에게 오는 노해광을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사숙. 본산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영문 모를 말이었으나,그 말을 듣는 순간 노해광의 안색은 핼쑥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철면호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뛰어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정해였다. 그가 소리친 음성을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노해광은 단번에 그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노해광의 사나운 시선이 검단현에게로 향했다.
검단현은 여전히 자신이 홀린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으면서도 노해광과 시선이 마주치자 괴이한 웃음을 홀렸다.
“흐흐!”
그것은 악의와 독기로 점철되어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무서운 웃음이었다.
한순간 노해광의 두 눈에 진득한 살기가 어렸으나,이내 그는 살기를 억누르며 전풍개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본산에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전풍개 또한 평생을 강호의 도산검림 속에서 살아온 사람답게 이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고는 딱딱하게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먼저 몸을 날렸다.
“그럼 무얼 망설이는 거냐?”
사태가 급박함을 눈치챈 하동원이 아무 말도 없이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소지산이 어느새 다가와 정해에게 무언가를 묻고는 차갑게 굳은 눈으로 노해광을 쳐다보았다.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그에게서 모처럼 보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
결기 어린 그의 음성에 노해광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노해광의 시선이 둥그런 모양으로 파여 있는 소지산의 가슴을 빠르게 훌었다.
“움직일 수 있겠느냐?”
소지산은 가슴의 상처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자기가 묶은 매듭은 자기가 풀어야 하는 법이다. 오늘 일의 대가는 반드시 그에게서 직접 받아내고야 말 것이다.”
“저는 사숙을 믿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소지산은 검단현을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정해와 함께 몸을 날려 대청 밖으로 사라졌다.
노해광은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소곤거리고 있는 중인들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이내 시선을 한 사람에게 고정시켰다.
“오늘 회람연의 승부가 결정된 것같소. 유 대협의 생각은 어떠시오?”
그에게 지목된 소요일사 유장현은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의 회람연은 종남파가 승리했음을 인정하겠소.”
노해광의 시선이 차례로 옆으로 향하자 화산파의 초청으로 참석한 인사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노해광에게 좋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는 오대파의 청명삼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의 빛을 밝혔다. 오히려 그들은 종남파의 저력에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노해광은 본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른 누구보다 초조한 심정이었으나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럼 오늘의 회람연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소. 본 파에 일이 생겨 귀빈들을 접대하지 못하는 걸 송구스럽게 생각하오. 해량해 주시기 바라오.”
이어 그의 시선은 아직도 주위의 도움을 거절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검단현에게로 향했다.
검단현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조금 전과 같은 악기는 보이지 않았다.
노해광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가만 히 바라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네가 무슨 수작을 부렸든 그걸로 본 파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네.
다만 그 수작의 결과에 대해서는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할 걸세.”
검단현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점차로 사라질 때 노해광의 신형은 어느새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검단현의 두눈은 끝없는 심연에 잠기듯 점차 어둡게 가라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