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75화
제 351 장 수구초심
종남산은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원래 이맘때의 종남산은 신록이 우거지고 녹음이 짙어져서 한낮의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숲과 계곡을 찾아 모여드는 시기였다.
하나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유람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시퍼런흉기를 든 무림인들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의 병기에는 시뻘건 핏물이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빨리 찾아라! 늦어도 반 시진 내에는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쳇! 누가 모르나? 이놈들이 쥐새끼처럼 계속 암도로만 숨어서 도망치니까 쫓기가 제법 까다롭단말이야.”
그들은 누군가를 찾는 듯 산의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녔다. 그들의 몸놀림은 하나같이 비호처럼 빠르고 민첩했고,얼굴에는 하나같이 진한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 있어 그야말로 흉신악살들을 보는 듯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수림이 짙게 우거진 숲 속을 뒤적거리다가 투덜거렸다.
“제길.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려도 유분수지,애송이 몇 놈 찾으려고 이게 무슨 짓이야?”
멀지 않은 곳에서 비슷한 행동을하고 있던 무림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당당한 종남파의 제자들이 싸우기 는커녕 허수아비 같은 놈들을 내세우고 자신들은 암도로 도망칠 줄 누가 알았나?”
“이놈들은 명문정파의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사태가 불리한 걸 알아차리자마자 맞서 싸울 생각은 않고 도망칠 궁리부터 하다니.”
바로 그때였다.
삐익!
어디선가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들려오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무리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저쪽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 퍼져있던 대여섯 명의 인영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재빠른 신법만 보아도 하나같이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벌떼같이 몰려가는 곳은 제법 커다란 봉우리 부근이었다. 몇개의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 밑에 유난히 수림이 짙게 우거진 숲이 자리하고 있었는데,벌써 그숲 앞에서는 검광과 도기가 난무하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창!
아직 이십이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과 소녀가 두 명의 장한들과 거친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소년은 깔끔한 용모에 단정한 인상이었는데, 짙은 청삼을 입고 있어서 인지 하얀 얼굴이 유난히 두드러져보였다.
짙은 흥의를 입은 소녀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아리따운 용모를 하고 있었는데,살짝 찡그려진 짙은 눈썹아래 자리한 두 눈에서 연신 날카로운 안광이 번뜩이는 것이 제법 만만 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을 상대로 병기를 휘두르는 자들은 각기 삼사십 대로 보이는 무림인들이었다. 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거치도(銀齒刀)룰,다른 한 사람은 검신이 유난히 가늘고 끝이 날카로운 협봉검(敎錄劍)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휘두르는 솜씨가 어찌나 뛰어나던지 보는 이의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두 소년 소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들에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소년 소녀는 모두 검을 사용하고 있었는데,상대의 현란한 공격에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모습이 강호의 이름난검객들을 보는 듯했다. 그들과 싸우고 있는 무림인들도 그들이 나이답지 않게 검술이 뛰어난 것에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은 각기 마령도 곽추와 삭풍표검(湖風m劍) 하일수(夏一秀)라는 자들로,산서성 태원 일대에서 적지 않은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고수들이었다. 처음 그들은 두 소년 소녀의 어린 얼굴과 호리호리한 체형만 보고 어렵지 않게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막상 싸옴이 시작되자 예상보다 날카로운 그들의 검에 놀라는 한편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과연 종남파의 제자들답구나.’
‘어린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이라면 정말 앞날이 기대되는 인재들인데……. 아쉽구나,아쉬워!’
그들은 무공에 평생을 바친 무인들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인재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제거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 임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완수해야 하며,더구나 상대는 화산파의 숙적인 종남파의 제자들이었다.
만약 이 소년 소녀들이 지금과 같은 기세로 계속 성장해 나간다면 머지 않아 화산파의 앞길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이 될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 교환되더니 이내 그들의 공세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사나워졌다.
파파파팍!
숲 앞의 작은 공터가 온통 세찬도기와 검풍의 소용돌이에 휩싸여버렸다.
두 소년 소녀는 이를 악물고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시간이 흐룰수록 조금씩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호각소리를 듣고 몰려든 인영들이 하나둘씩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흥의 소녀를 향해 협봉검을 매섭게 찔러가고 있던 하일수가 그들의 등장을 알아차렸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 숲 뒤쪽에 암도가 있네. 그곳에 몇 놈이 숨어 있을 걸세.”
새롭게 나타난 무림인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네 명은 재빨리 숲속으로 들어가고 한 명만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청삼 소년과 홍의 소녀는 필사적으로 그들이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그들 개개인의 무공이 뛰어나서 한 사람도 제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눈을 판 대가로 청삼 소년의 왼쪽 팔이 도기에 스쳐 피범벅이 되었다.
상당히 고통스러울 텐데도 청삼 소년은 신음 한 마디 토하지 않고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더욱 매섭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곽추가 돌연 거치도를 멈추고 뒤로 훌쩍 물러서더니 껄껄웃었다.
“하하. 정말 대단한 소형제로군. 자네 이름은 뭔가?”
청삼 소년은 자신의 제지를 뚫고 숲 속으로 사라진 자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으면서도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방화라 하오.”
곽추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방 소협이었군. 내 이름은 곽추일세. 들어본 적이 있는가?”
“과문(寡聞)하여 알지 못하오.”
“산서성에서 마령도라는 별호로 활동하고 있네. 그런데 방 소협은 곽추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방화가 검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이미 서로의 목적이 분명한데,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소. 당신은 준비하시오.”
방화의 다부진 말에 곽추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사실 곽추는 엣된 얼굴의 방화가 자신의 칼을 수십 초나 받아넘기는 모습에 감탄하는 마음도 있고,자기의 막냇동생뻘도 되지 않은 그를 자신의 칼로 베어 넘기기가 왠지 그다지 내키지 않아 잠시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자기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나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검을 겨누는 방화를 보자 곽추는 자신이 너무 안일한 생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래. 강호에서 칼밥을 먹고 사는 놈이 쓸데없는 짓을 했군. 무인에게는 무인에게 어울리는 최후가 있는 법이지.”
곽추는 거치도를 힘껏 움켜잡으며 방화를 향해 손짓을 했다.
“어서 오게. 선수를 양보하겠네.”
그것이 그가 그나마 호감을 느꼈던 어린 소년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호의 였다.
방화는 주저하지 않고 그를 향해달려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쓰러뜨려야만 숲 속으로 들어간 자들을 뒤쫓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전신에서는 여느 때보다 날카로운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연 그의 검은 조금 전보다 훨씬더 매섭게 곽추를 향해 날아들었다.
허공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방화의 검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곽추가 슬쩍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가 다시 빠르게 두 걸음 전진하며 거치도를 앞으로 내뻗었다.
쾌액!
마치 거대한 뇌전이 쏘아지는 듯 시퍼런 도광이 방화의 앞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방화는 두 눈을 번뜩이며 수중의 장검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이제 막손에 익기 시작한 유운검법의 초식들을 펼쳐 곽추의 거센 도법에 정면으로 맞서나가는 그의 모습은 어린 얼굴과 호리호리한 체구답지 않게 장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금시라도 피 분수를 뿌릴 듯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두 사람과는 달리 홍의 소녀를 상대하는 하일수는 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흥의 소녀는 나이답지 않게 검을 다루는 솜씨가 아주 능숙해서 하일수도 한동안은 그녀와 팽팽한 접전을 치르고 있었다. 비록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으나,한눈에 보아도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수련을 거친 게 분명한 그녀의 검법이 예상보다 뛰어나서 하일수는 모처럼 좋은 적수를 만났다는 생각에 조금씩 손에 힘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뒤늦게 나타난 다섯 명의 고수들 중 남들을 따라 숲 속으로 가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한 사람이 어슬렁거리며 그들을 향해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하 형. 보아하니 풋내 나는 어린 것에게 과하게 손을 쓰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인더?,나에게 넘기는 게 어떻겠소?”
슬쩍 그를 힐끔거린 하일수의 눈살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맹독호 가렴이라는 자로,손속이 악랄하고 성격이 음흉하기로 이름난 인물이었다. 더구나 여색을 즐겨 해서 적지 않은 수의 여인들을 간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하일수는 비록 화산파에서 방출된후 거친 강호의 흑도를 전전하는 신세였으나,가렴 같은 자는 본능적으로 혐오하고 있었다. 더구나 가렴은 어린 소녀들을 좋아해서 끔찍한 사고를 저지른 경력도 있어서 하일수는 그런 자와 이번 일에 같은 임무를 맡게 된 것에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자들 중 한 명이 남기에 자신들을 도와주려는 줄 알았는데,지금 가렴의 모습을 보니 다른 생각이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하일수는 자신의 가슴을 날카롭게 베어오는 홍의 소녀의 검을 유연한 동작으로 피하며 가렴을 향해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당신의 손을 빌릴 단계는 아니오. 이곳은 내가 충분히 수습할수 있으니 당신은 다른 곳으로 가보도록 하시오.”
가렴의 얼굴에 징그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흐흐. 아무리 보아도 하 형은 지금 저 야들야들한 것의 몸에 검을 꽂을 생각이 없어 보이오. 그러니 나에게 넘기고 다른 상대를 찾아보는 게 어떻겠소?”
하일수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그가 채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돌연 가렴이 앞으로 성큼 다가오며 오른손을 내뻗었다.
“그럼 하 형이 승낙하는 것으로 알고 이 어린 계집은 내가 접수하도록하겠소.”
가렴의 성정이야 어떻든 그의 무공은 하일수도 감탄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장공이 하일수와 흥의 소녀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들며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하일수가 주춤물러섰을 때는 이미 가렴은 그가 있던 자리에 선 채 흥의 소녀를 향해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흐흐. 모처럼 월척을 만났군.”
홍의 소녀의 정면에 서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한 가렴의 두 눈이 번들번들하게 빛났다.
하일수는 가렴의 난입에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으나,그렇다고 그와 함께 어린 소녀에게 합공하는 것은 내키지 않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상대가 바뀌어 그래도 번듯한 용모의 하일수 대신 징그러운 눈으로 연신 자신의 위아래를 훌고 있는 흉한이 자신과 마주 서게 되자 홍의 소녀의 고운 아미가 사납게 찌푸려졌다.
“뭐 어디서 이런 호래자식 같은 게 끼어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