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 376화


제 351 장 수구초심(2)

가렴은 예쁘장한 미소녀의 입에서 거친 음성이 흘러나오자 가뜩이나 험악한 얼굴이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겁에 질릴 만한 가렴의 기세에도 흥의 소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독설을 퍼부었다.

“가뜩이나 급해 죽겠는데,별 거지 발싸개 같은 게 끼어들고 난리네.

그 면상 가지고 남들 앞에 돌아다닐용기가 난단 말이야?”

가렴은 어처구니가 없어 한동안 멍하니 흥의 소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그의 얼굴에 붉은빛이 어른거리며 두 눈에서 살광이 번뜩였다.

“얼굴이 제법 반반해서 귀여워 해주려고 했더니 죽을 자리를 제 발로 찾는 년이로군. 내 손에 아가리를 찢기고도 입을 함부로 놀릴 수 있는지 보자.”

“너는 아가리가 찢겨도 입을 놀릴수 있단 말이냐? 입이 두 개라도 되는 모양이지?”

흥의 소녀가 끝까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가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으로 성큼 달려들었다. 그는 서슴없이 흥의 소녀의 앞가슴을 향해 오른손을 내뻗었는데,갈고리처럼 오므린 손가락이 거무튀튀하게 변해있는 것이 마치 강철로 된 쇠고랑을 보는 것 같았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솟구친 가렴이 처음부터 자신의 성명절기인 흑귀조공(黑鬼m功)을 끌어올린 것이다.

흥의 소녀는 종남파의 일대제자들중 유일한 흥일점인 서문연상이었다. 무림에서는 여인들의 급소를 공격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었는데,가렴이 대뜸 자신의 가슴을 향해 손을 써오자 서문연상은 이를 갈며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 질렀다.

“정말 후안무치한 놈이로구나. 내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네놈의 심장을 갈라서 얼마나 시커먼지 보고야 말겠다!”

그녀는 가렴의 손을 피하기는커녕오히려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며 수중의 장검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원래 맨손 고수와 싸울 때는 거리를 벌리는 것이 원칙인데, 그녀가 제 발로 거리를 좁히자 가렴은 역시 풋내기는 별수 없다고 생각하고 희희낙락하다 갑자기 안색이 변해 황급히 내뻗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파앗!

그와 함께 섬뜩한 검광다발이 그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가렴이 그녀의 검에 어른거리는 검광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손을 빼지 않았다면 폭발하듯 피어오른 그 검광에 그대로 손이 잘려지고 말았을 것이다.

자신의 양손에 수많은 피를 묻혀온가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슴 한 구석이 써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서문연상이 펼친 검광의 위력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나 이내 그의 얼굴이 진득한 살기로 물들었다. 아직 대가리에 피도안 마른 것 같은 어린 소녀에게 낭패를 당할 뻔했다는 생각에 머리끝까지 살심이 치밀어 오른 것이다.

살기가 솟구치자 그의 눈빛은 오히려 냉정해졌고,태도 또한 조금 전 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해졌다. 그것이야말로 산서성 이북 일대에서 많은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맹독호 본연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가렴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파팟!

마치 두 줄기의 흑선이 그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빠르고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그 속도는 조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서문연상은 갑자기 변한 그의 행동에 바짝 경각심이 들었다.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르고 영악한 그녀는 상대의 모습에서 그가 자신을 경시하지 않고 제대로 된 실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쳇! 약을 바짝 올리면 쉽게 흥분해서 허점을 보일 줄 알았더니 반대로 살심만 자극한 꼴이 되었구나.

이자들은 단순한 강호의 흑도무리들이 아니다. 틀림없이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명문정파의 수련을 받은 인물들이 분명하다.’

조금 전에 싸웠던 하일수도 사용하는 무공은 흑도의 거칠고 투박한 검법이었으나, 그것을 펼칠 때 가끔씩 드러나는 모습은 기본기가 탄탄하고 검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일류고수의 그것이었다.

그런 자세는 결코 흑도에서 굴러먹은 낭인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제대로 된 투로를 따라 공격해 들어오는 가렴의 모습만 보아도 처음과는 달리 명가에서 제대로 배운 자의 풍모가 엿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무림의 금기를 고려하지 않고 거침없이 급소를 노리고 들어온다는 점에서 명문정파의 고수보다상대하기 더욱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서문연상은 이런 상황에서 자칫 약세를 보이다가는 제대로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피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그에게 맞서 갔다.

마음이 다급해서인지 그녀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은 종남파의 무공이 아니라 본가인 검보의 신동검법(神勤劍法)이었다. 아무래도 오랜시간 동안 익혀온 검보의 검법이 아직 어설픈 종남파의 검법보다 더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신동검법은 검보의 최고 무공인 신왕검형을 익히기 전에 배우는 두 가지 무공 중 하나로, 신동검법을 완벽히 터득한 다음에 제왕팔검(帝또A劍)을 익히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신왕검형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동검법이 단순히 신왕검형의 입문무공으로 치부될 만한 별 볼 일 없는 무공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타 문파의 최고 무공에 못지 않은 놀라운 위력을 지닌 절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문연상도 절체절명의 위급한 순간에 종남파의 무공이 아닌 신동검법을 선뜻꺼내 들었던 것이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맹렬한 공방이 벌어졌다.

가렴은 끓어오르는 살심을 억누르며 흑귀조의 초식들로 서문연상의 급소 부위를 공격하고 있었다. 여인이 수치심을 느낄만한 가슴과 하복부 쪽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추잡하고 혐오스러웠으나,그위력만큼은 살벌할 정도로 무시무시해서 거무스름한 빛을 띤 손가락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그대로 갈라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상대가 서슴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위를 노리고 들어옴에도 서문연상은 흥분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신동검법의 절초들을 펼쳐 대등하게 맞서 갔다. 그 모습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여고수를 보는 것 같아서,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하일수는 자신도 모르게 몇 번이나 감탄성을 토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성정이 거칠고 급한 줄알았는데,마음의 수양이 보통이 아니로군. 확실히 명가의 제자답구나.

그런데 종남파의 무공 중 저토록 화려하고 강맹한 검법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하일수는 서문연상이 펼치는 검법이 낯설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남파의 무공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상세히 안다고 생각했었는데,지금 서문연상이 사용하는 검법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보고 있는 사이에도 두 남녀는 순식간에 삼십 초를 주고받았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그들의 격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가렴의 우세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서문연상이 명문정파의 후손이라고 해도 아직 나이가 어려서 내공이 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과 같이 살벌한 강호 고수와의 격투는 경험이 많지 않은 탓에 동작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인지 사십 초가 넘어가자 그녀의 체력과 내공이 급격히 떨어지며 승부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일수는 그녀가 앞으로 십여 초를 더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상대가 손속이 잔인하고 거칠기로 유명한 맹독호 가렴이고 그녀의 나이가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녀는 정말 대단한 선전을 벌인 셈이었다.

하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그녀는 가렴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일수로서는 모쪼록 그녀가 목숨을 잃기 전에 최악의 험한 꼴을 당하는 일이 없기만을 마음속으로 빌어줄 뿐이었다.

문득 다른 한쪽의 상황이 궁금해진 하일수는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방화와 곽추의 격전 또한 점입가경이었다. 두 사람 모두 주위에서 천둥벼락이 떨어져도 모를 정도로 싸움에 몰입해 있었다.

방화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채 수중의 장검을 맹렬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가뜩이나 새하얀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꽉다문 입술에 엷은 핏물이 번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사력을 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에 비해 곽추의 모습은 한결 안정되어 보였다. 커다란 거치도를 장난감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방화의 검을 상대하는 그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맺혀 있기는 했으나,거친숨을 몰아쉬는 방화에 비해 호흡에 변함이 없었고 표정 또한 힘들어하는 구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방화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일 때까지 곽추가 사정을 봐주고 있는 것도 같았다.

하일수가 보기에 방화도 길어야 일이십 초를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쯤이면 굳이 곽추가 손을 쓰지 않더라도 방화는 진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서있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하일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곽 형도 저런 어린 인재의 피를 자신의 손에 묻히는 것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군. 하지만 때로는 어쩔수 없을 줄 알면서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이지.’

문득 하일수의 뇌리에 처음 종남파를 공격해 들어갔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갑작스런 습격에 종남파의 고수들은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이내 상황을 판단하고는 몇개의 무리로 나뉘어졌다. 종남파를 호위하고 있던 일단의 무리들이 자신들의 앞길을 막는 사이 그들은 암도를 통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때 잠깐 보았던 종남파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총기가 엿보이는 소년소녀들이었다. 신검무적의 사매라는 여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으며,그중 몇 명은 이제 겨우 열 살남짓 되는 꼬맹이들이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그런 어린 아이들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겨우 이정도 인원들만으로 천하를 경동시키고 있는 종남파의 저력을 엿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평소 마음이 맞았던 곽추와 뒤로 한 발짝 물러난 것도 그런 어린 인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뒤에 물러서 있던 덕분에 그들 중 일부의 행적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으니,그들로서는 큰 공을 세우고도 입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음흉한 속셈을 품고 자신의 앞을 막아선 가렴의 행동이 오히려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적어도 앞길이 구만리 같은 미소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베어 넘기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찌익!

“아앗!”

하일수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옷자락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소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하일수가 번쩍 고개를 돌려 보니 가렴과 팽팽히 맞서고 있던 서문연상이 가녀린 몸을 휘청거리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녀의 옆구리 부위는 옷자락이 길게 찢어져 새하얀 살결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 부위의 피부가 검게 변색되어 있는 것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가렴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리고 서 있는 서문연상을 향해 음산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 제법 재롱을 떨 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만,나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이제 곧 네 년의 야들야들한 살을 이 손으로 직접 어루만져주마.”

가렴이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손바닥과 맞닿은 채 꼼지락거리는 열 개의 거무튀튀한 손가락은 그자체로 살아있는 끔찍한 생명체 같았다.

그것을 본 서문연상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가렴의 손가락에 스친 옆구리가 마치 칼에라도 베인듯 화끈거리며 아찔한 통증이 밀려들었으나,그보다는 징그러운 웃음을 지은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가렴이 더욱 신경 쓰였다.

이미 그녀의 내공은 바닥을 드러낸상태였고,체력 또한 거의 떨어져서서 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으나 더 이상 가렴의 저 검은 손가락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사매!”

한쪽에서 곽추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던 방화가 뒤늦게 그녀의 위기를 알았는지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오히려 곽추에게 제지당해 크나큰위기에 빠져 버렸다.

팟!

곽추의 거치도가 그의 왼팔을 스치고 지나가며 핏물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하마터면 왼팔이 그대로 잘려져 나갈 뻔한 방화의 안색이 시커떻게 변했다. 방화는 통증을 억누르고 다시 곽추를 상대했으나,이미완전히 패색이 짙어져서 당장 거치도에 두 조각 나도 이상하지 않은 위급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사력을 다해 곽추의 칼에 맞서고 있던 방화로서는 한눈을 판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서문연상은 속으로 애가 바짝 타들어갔으나 지금으로서는 방화를 도울방법이 없었다.

“흐흐. 이제 후회가 되느냐? 하지만 너무 늦었다.”

가렴은 악독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양손을 내뻗었다. 그녀는 거대한 두 개의 손이 자신을 향해다가오는 것을 뻔히 보고서도 더 이상 피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그녀의 두 눈에 암담한 빛이 감도는 순간이었다.

휘익!

돌연 하나의 그림자가 쓴살같이 장내로 뛰어들었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