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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77화


제 351 장 고인회래 (3)

가렴은 자신의 눈앞에 희끗한 인영이 스치는 순간,서문연상을 향해뻗은 손을 재빨리 거두어들이며 자신의 앞가슴을 보호했다. 그것은 풍부한 강호 경험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파팡!

북을 두드리는 듯한 음향과 함께 가렴의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주춤물러났다. 가슴 앞을 막아선 손이 부러질 듯한 통증에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면서도 가렴은 필사적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칙칙한 회의를 입은 사람이 그와 서문연상의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유난히 깡마른 몸매의 남자였다.

가면을 씌운 듯 표정이 없는 얼굴때문에 정확한 나이를 알기 어려웠으나 서른이 넘지 않은 것은 분명해보였다.

회의인의 물처럼 투명한 시선과 마주친 가렴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온몸의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싸늘하고 예리한 기운은 그가 어릴 적 몸담았던 화산파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서나 간신히 느낄수 있었던 것이었다.

‘검도의 고수로구나!’

한쪽에 서 있던 하일수도 회의인의 출현에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회의인이 지척에 접근하여 가렴의 앞을 막아설 때까지 전혀 그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회의인은 가렴과 하일수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멍하니 서 있는 서문연상을 바라보았다.

“종남파의 제자인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듯 한 무심한 음성에 서문연상은 찬 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들어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회의인은 그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슬쩍 한쪽에서 싸우고 있는 방화와 곽추를 돌아보더니 예의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너희 둘뿐인가?”

서문연상은 움찔하여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하나 회의인이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하에 입을 열었다.

뒤편의 동굴 너머에 몇 사람이 더있어요.”

회의인의 시선이 그녀의 뒤편에 펼쳐진 짙은 수림을 향했다.

서문연상은 재빨리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자들 중 대여섯 명이 조금 전에 그쪽으로 갔어요.”

발을 델 수도 없을 만큼 지친 그녀로서는 난데없이 나타난 회의인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는 심정이었다.

과연 표정이 없던 회의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엶은 표정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 하나 그것은 이내 빠르게 사라지고 다시 예의 무심한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방취아도 그쪽에 있나?”

서문연상은 회의인이 사고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하자 표정이 조금 더밝아졌다. 그가 혹시 종남파와 상당한 친분이 있는 자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든 것이다.

“사고께선 저자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느라 다른 방향으로 가셨어요. 그런데……

그녀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회의 인이 돌연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들을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멀지 않은 숲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맡겨 두게.”

나타난 사람은 짙은 흑의를 입은 서른 전후의 장한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회의인의 신형이 번쩍이더니 어느새 동굴이 있는 수림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기경할 신법에 서문연상의 입이 딱 벌어졌다. 마지막 순간에 회의인이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던지며 그 장검을 따라 신형을 날린것을 얼핏 보았던 것이다.

‘저…… 저것은 검신수형(劍身隨形) 인데……

검신수형은 검을 내던지는 힘을 이용해 몸을 날리는 신법으로,검에 대한 경지가 절정에 도달해야만 시도해 볼 수 있는 상승의 무공이었다.

그녀도 자신의 할아버지인 검왕 서 문동회가 펼치는 광경을 딱 한 번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것 같은 회의인이 대뜸 그 수법을 사용하는 걸 보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렴과 하일수 또한 회의인이 검신수형으로 날아가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하나 그들은 더 이상 그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숲 속에서 걸어 나온 흑의인이 수중의 장검을 천천히 뽑아드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그의 전신에서는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가공할 기운들이 홀러나오기 시작했다.

가렴과 하일수뿐 아니라 방화와 싸우고 있던 곽추 또한 어느새 싸움을 멈추고 바짝 긴장된 눈으로 흑의인을 웅시하고 있었다. 방화는 한쪽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아직 쓰러지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로 지친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세 사람 중 그나마 가장 성격이 침착한 하일수가 수중의 장검을 중단으로 겨누며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종남파의 제자요?”

흑의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알 수 있겠소?”

“금조명.”

낯선 이름에 하일수의 눈에 한 줄기 당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어느 파의 고인이시오?”

그의 거듭된 물음에 흑의인,금조명은 말없이 검을 살짝 흔들었다.

하일수와 다른 두 사람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무겁게 굳어졌다. 그의 모습에서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다는 무언의 신호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절대로 자신들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들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순간,금조명의 검이 섬뜩한 검광을 발하며 그들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서문연상과 방화가 앞을 지키고 있는 수림을 지나면 가파른 벼랑이 나타난다. 벼랑의 한쪽 귀퉁이에 언뜻보아서는 알아차리기 힘든 작은 균열이 나 있는데, 그 균열에 들어서서 조금 걷다 보면 제법 넓은 동혈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동혈의 길이는 십 장 정도에 불과하지만,동혈을 지나면 벼랑의 반대편 능선에 도달할 수 있기에 아주 효과적인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그 능선 너머로 조금만 더 가면 종남파의 조사전이 있는 본산 뒤편이 나오게 된다.

지금 종남파의 본산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능선의 한쪽 비탈에서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싸우고 있는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얼굴이 유난히 창백한 백의 인이었다. 그들의 싸움이 어찌나 치열했던지 비탈의 한쪽이 완전히 폐허처럼 변해 있었고,주변의 울창한 나무들이 모조리 부서진 채 파편만이 수북하게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서 십여 장 멸어진 곳에 다섯 명의 장한들이 반원형으로 우뚝 선 채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몇 사람이 똘똘 뭉쳐 있었는데, 그들의 뒤편은 유난히 경사가 가파른 비탈이어서 그들은 사실상 반원형으로 넓게 서 있는 장한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세 명은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들이었고, 다른 한명은 수염이 가득 나 있는 털북숭이 중년인이었다. 그들 네 사람은 백발노인과 백의인의 싸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하나같이 안색이 초췌하고 얼굴에 초조한 빛이 역력한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낭패스럽고 절망에 빠져 있는 듯 한 모습이었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바닥에는 두 명의 인물들이 피를 흘린 채 누워 있었다. 한 사람은 이미 숨이 끊어진 듯했고,다른 한 사람은 배가 갈라져 내장마저 얼핏 내보일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고 있어 기식이 엄엄해 보였다. 털북숭이 중년인은 그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다섯 명의 장한들에게 막혀감히 그쪽으로 다가가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과앙!

벼락이 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와 박살 난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백발 노인이 몸을 휘청거리며 연신뒷걸음질 치다가 간신히 걸음을 멈추었다. 하나 이내 참지 못하고 시커먼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다.

“우욱!”

반면 노인과 싸우던 백의인은 한 차례 신형이 휘청거리는 것만으로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는 음산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제갈 노인! 예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확실히 한물간것이 분명하구려. 그 정도 솜씨로는 내 손을 감당할 수 없소.”

백발 노인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사나운 눈으로 백의인을 노려보았다.

“죽일 놈! 네놈의 사부도 감히 노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거늘,한 수 득수했다고 하늘 높은 줄모르고 건방을 떨고 있구나.”

백의인의 유난히 새하얀 얼굴에 차갑고 서늘한 미소가 내걸렸다.

“흐흐. 그거야 사부가 제갈 노인의 의술을 존중해서 양보한 것이겠지만, 나한테는 그런 의술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소. 사부와의 안면을 생각해서 제갈 노인이 이대로 물러난다면 더 이상 손을 쓰지는 않겠소. 어떻소? 물러나시겠소,아니면 끝장을 보시겠소?”

비아냥거리는 듯한 백의인의 물음에 백발 노인의 눈썹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건방진 놈! 어디 내 손에 잘근잘근 다져진 다음에도 그따위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

백발 노인이 버럭 노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백의인은 입꼬리를 말며 웃었다.

“글쎄 제갈 노인의 실력으로는 안된다니까.”

그는 피하지 않고 양손을 들어 백발 노인의 공세에 맞섰다. 잠시 두사람 사이에 맹렬한 공방이 오고 갔다. 그들의 손이 어찌나 빨랐던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무언가 희끗한 것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하나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백발노인이 신음을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으음!”

백발 노인의 왼쪽 어깨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톱니바퀴가 훑고 지나간 듯 짙은 고랑이 패어 있는 왼쪽 어깨는 시뻘건피로 물들어 있었다.

백의인은 천천히 백발 노인에게 다가가며 빙글거리고 웃었다.

“제갈 노인의 수는 모두 파악되었소. 마지막 기회요. 순순히 물러나겠소? 아니면 내 손에 그 늙고 쭈글쭈글한 목덜미를 잡아 뜯기겠소?”

그는 보란 듯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오른손가락 끝에 핏방울이 고여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 피는 다름 아닌 백발 노인의 것이었다.

백발 노인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찢어 죽일 놈……!”

기분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백의인의 얄미운 얼굴을 짓이기고 싶었으나,이미 그동안의 격전으로 체력이 고갈 난 그로서는 도저히 백의인의 다음 공격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났다가는 자신만을 믿고 있는 종남파의 어린 제자들은 산중의 고혼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들 하나하나가 모두 보기 드문 인재들임을 생각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발 노인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세 명의 어린 소년들은 비통함과 초조함으로 하나같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나 그들 중 누구도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중에는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장한들을 노려보는 소년도 있었다.

백발 노인은 세 명의 소년들과 그들을 안다시피 하고 있는 털북숭이 중년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이만하면 살 만큼 산 것이다. 저 어린 것들과 함께 인생의 마지막을 맞을 수 있다는 것도 어찌보면 복이라고 할 수 있겠지. 저 술고래 녀석이 저승길 동무가 된다는건 못마땅한 일이지만 말이지.’

백의인은 백발 노인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것만 보아도 그의 마음을 짐작하겠는지 두 눈이 진득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굳이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는 거로군.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겠소. 기꺼이 저승으로 모셔다드리지.”

그의 오른손에서 탈명조의 공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백발 노인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왼쪽 어깨의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백의인이 갈고리처럼 변한 손으로 백발 노인의 목덜미를 향해 움직여갈 때였다.

파악!

능선 위에서 갑자기 하나의 섬광이 그를 향해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백발 노인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던 백의인은 허깨비 같은 동작으로 몸을 회전시켜 그 섬광을 피했다.

파앗!

바닥에 선명한 줄이 그어지며 그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갈라졌다.

‘이 검기는?’

백의인의 눈빛이 무시무시하게 번뜩이더니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섬광이 날아온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금조명! 네놈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몸은 먹이를 본 매처럼 무서운 속도로 한 곳으로 날아갔다.

파파파팍!

탈명조와 시퍼런 검기가 서로 엇갈리더니 백의인이 황급히 몸을 멈춰세웠다. 그는 자신의 옆구리가 살짝찢어진 것을 보고는 살광을 번뜩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을 든 회의인이 섬뜩한 눈빛을 발하며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백의인이 그의 얼굴을 보고는 의아한 둣 물었다.

“네놈은 금조명이 아니구나. 네놈은 누구인데 검마의 염왕기를 쓰는 거냐?”

회의인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며 수 중의 장검을 곧추세웠다.

백의인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말 안 해도 알겠다. 검마의 또 다른 아들 중 하나겠지. 네놈을 죽이고 금조명의 목을 따서 그 피로 배를 불리겠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백의인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회의인은 백의인의 손이 지척에 도달한 순간에야 비로소 수 중의 검을 세차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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