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78화
제 352 장 수구초심(1)
소지산은 천성이 차분하고 침착하여 평상시에는 좀처럼 흥분하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하나 지금의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초조함과 다급함이 얼굴 전체에서 묻어나오고 있었다.
초가보와의 싸움 이후,종남파 본산이 습격을 받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었다.
숙적이었던 초가보를 무너뜨리고 욱일승천의 기세로 강호 무림에 명성을 쌓고 있는 종남파의 본산을 감히 다른 문파나 세력이 넘볼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은연중에 가슴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뿐만이 아닌 모든 종남파고수들의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화산파와 서안에서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일 때에도 본산의 안위에 대해서는 누구도 크게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해광이 지원을 요청했을 때 선뜻 절반에 가까운 인원을 서안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화산파와의 회람연을 위해서 문파의 가장 큰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소지산과 전풍개가 종남산을 내려올때도 설마 본산에 위험이 닥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종남파의 본산이 공격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자 모두의 마음속에는 미칠 듯한 초조감과 불안함이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종남파 본산에는 방취아 외에 몇 명의 제자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 중 그나마 제대로 된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방화와 서문연상뿐이었고,나머지는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열 살 남짓 되는 어린 소년들이었다.
그들 외에 몇 명의 빈객들과 수신대원들이 있지만,제갈외 외에는 무공에 특출 난 인물이 없었다. 빈객으로 머물러 있는 송천기와 추성은 무공의 고수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열다섯 명이나 되는 수신대원들도 나름대로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강호의 일류고수들에게는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다.
그야말로 방취아와 제갈외를 제외하고는 자기 한 몸 지키기에도 급급한 면면들이었던 것이다.
종남파의 본산을 습격할 정도의 무리들이라면 그러한 종남파의 현재상황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노해광의 짐작대로 그들이 검단현의 지시를 받은 자들이라면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 듯이 말을 몰아가는 종남파고수들의 얼굴에 불안함과 초조함이 가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소지산의 마음은 다른 누구보다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연인인 방취아에 대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호행을 떠나면서 장문사형은 문파의 안위를 그에게 부탁했다. 그것은 문파에 대한 모든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뜻이었다.
만에 하나 이번 일로 문파에 돌이 킬 수 없는 불행이 닥친다면 그것은 오릇이 그의 잘못이며, 다른 무엇으로도 그 과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겨우 싹트기 시작한 종남파의 미래가 더러운 무리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하자 소지산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자책감을 견딜 수 없었다.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사매는 누구보다도 시세파악에 능하며,제갈 대협 또한 강호경험이 풍부한 분이시니 최악의 상황은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소지산은 마음속을 가득 메우는 불안감을 억지로 억누르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 했다.
마침내 멀리 종남산의 산자락이 보이자,소지산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말 위를 벗어나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는 것은 말보다 사람의 다리가 더욱 빠르고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출발했던 전풍개와 하동원도 말을 버리고 저만큼 앞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소지산은 정해를 비롯한 무공이 떨어지는 고수들이 뒤로 처지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전력을 기울여신법을 펼친 끝에 곧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붙은 사람은 수신대의 대주인 우문화룡과 흑선방의 최고살수인 십절수 강표같이 신법이 뛰어난 두세 명뿐이었다.
한 줄기 바람이 일렁이며 하동원이 그의 옆으로 바짝 붙어서 다가왔다.
소지산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걱정스런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슴의 부상이 심각해 보이는데,괜찮은 거냐?”
소지산은 굳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견딜 만합니다.”
하동원은 무거운 눈으로 소지산의 가슴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검기에 당한 것이라 심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줬을 텐데……. 저상태로 무리를 한다면 심각한 내상으로 번질 게 뻔하다. 그렇다고 지금같이 긴박한 상황에서 무작정 안정을 취하라고 할 수도 없
고…….,
소지산의 가슴에는 원 모양의 상처가 나 있었는데,그곳으로 아직도 핏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혈을 했음에도 검기에 당한 상처라서 완벽하게 피가 몇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나 문제는 단순히 외형적인 것이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와는 달리 소지산의 가슴 속은 검기의 침투로 심맥이 적지 않게 손상되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계속 내공을 소모하고 격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심맥의 손상이 극심해져서 종내에는 끊어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조용한 곳에서 운기조식하며 손상된심맥을 치료해야 하는데,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거친 종남산을 전력을 다해 뛰어오르느라 내공의 소모가 막심했고,체력 또한 급격히 고갈되어가고 있었다.
하동원은 그런 상태를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막거나 제지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답답해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시 가파른 산등성이 하나를 넘자 시야가 탁 트이며 제법 넓은 분지가 나왔다. 그리고 분지 아래 자리한 종남파의 본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산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나군데군데 부서진 건물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곳이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시력을 돋우어 보면 종남파 본산의 곳곳에 피범벅이 된 시신들이 널려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본 종남파 고수들의 마음이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력을 다해 본산을 향해몸을 날렸다.
그러다 소지산의 귀에 나직한 파열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희미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힘들었으나,그것은 분명 검과 장력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제일 앞에서 달려가고 있던 전풍개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얼굴에 순간적으로 망설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다 소지산을 향해 턱짓을 했다.
“저쪽은 네가 가보도록 해라. 본산은 우리가 가보마.”
“알겠습니다.”
소지산은 황급히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뒤를 우문화룡이 뒤따랐다.
전풍개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하동원 외에 강표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강표는 온몸이 땀으로 흠렉 젖은 채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무공은 그들 중 가장 뒤떨어졌으나,신법이 뛰어나서 용케도 처지지 않고 여기까지 따라붙었던 것이다.
“너는 나와 함께 가자.”
“예,대협.”
강표는 지친 표정이 역력함에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전풍개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소지산과 우문화룡은 섬전 같은 속도로 몇 개의 얕은 능선과 구릉을 넘어갔다. 갈수록 들려오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소지산은 이미 자신들이 가고 있는 최종 목표가 어디인지를 짐작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본산 주변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은밀히 이동할 수 있는 암동이 몇 군데 있었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그중에서도 본산 뒤편의 조사전과 연결된 암동의 출구가 분명했다.
그 암동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방취아와 서문연상, 그리고 방화뿐이었다. 아직 어린 제자들은 물론 이고 제갈외조차도 그 암동의 존재여부를 모르고 있었다.
그 암동 근처에서 싸움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 겠는가?
소지산은 눈앞에 보이는 암석군들을 뛰어넘어 앞으로 달려갔다.
눈앞이 탁 트이면 울창한 수림 앞의 공터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세 명의 어린이와 털북숭이 장한 앞을 막아서서 세 명의 무림인들과 싸음을 벌이고 있었는데,몸의 여기저기에 선혈이 낭자한 것이 금시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다른 한쪽에서는 검을 든 청년과 맨손의 중년인이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싸음이 어찌나 격렬하던지 주위 일대가 완전히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백발 노인을 공격하는 무림인들과 일행인 듯한 두 명의 장한들이 조금떨어진 곳에서 그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는데,워낙 눈앞의 싸움이 치열하고 살벌해서 그쪽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미처 소지산과 우문화룡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지산은 장내를 일견하는 것만으로도 사태를 파악하고는 주저하지 않고 백발 노인을 공격하는 세 명의 무림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뒤늦게 그의 출현을 알아차린 두명의 무림인들이 황급히 그를 막으려 했으나,우문화룡이 적절한 시기에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너희들은 내 몫이다!”
우문화룡의 등 뒤에 꽂혀 있던 혈화창이 어느새 뽑혀 나와 수십 개의 창영을 만들어냈다.
“고수구나!”
두 명의 무림인들 중 한 명이 경악성을 토해내며 신형을 비틀어 창영을 피했고, 다른 한 명은 수중의 장검으로 창을 막으려 했다.
차차창!
창과 검이 몇 차례나 격돌하며 격렬한 마찰음을 토해냈다. 검을 든무림인이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그의 오른쪽 소맷자 락이 찢어져 팔뚝까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우문화룡의 창이 다시 그를 향해날아들려 할 때,물러났던 다른 무림인이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검을 든 무림인 또한 재빨리 가세하여 우문화룡을 협공하기 시작했다.
우문화룡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자신의 친동생 같았던 수신대원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에 극도의 불안감과 초조함을 느끼고 있기에 마음속에 분노와 살심이 어느 때 보다 강렬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맹렬하게 창을 휘둘렀다.
소지산은 단숨에 십여 장을 날아백발 노인을 공격하는 세 명의 무림인들에게 달려들었다.
백발 노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제갈외 였다.
제갈외는 가뜩이나 장병기와의 싸움에서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데다세 명의 합공을 막느라 온몸의 진력이 바닥나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나타난 누군가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서 세 명의 무림인들에게 매서운 반격을 가하자 간신히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다 이내 씹어뱉는 듯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죽일 놈……. 뭐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냐?”
불안에 떨면서 세 명의 어린이 앞을 지키고 서 있던 털북숭이 장한,장승표 또한 뒤늦게 소지산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울음 섞인 고함을 내질렀다.
“소 노제! 왜 이제 왔나?”
소지산은 그 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세 명의 무림인들을 향해 미친 듯한 검격을 날릴 뿐이었다.
세 명의 무림인들은 삭주삼살(湖州H熱)이란 자들로,관외(關外)일대에서 악명이 자자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반쯤은 놀리는 심정으로 느긋하게 제갈외를 상대하고 있었는 데,갑자기 한 인영이 그들 사이에 뛰어들어 폭죽 같은 검광을 뿌려대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시…… 신검무적이 나타난 건가?’
자신들이 너무 여유를 부리다 호랑이를 만났다는 생각에 황급히 검광을 피하며 뒤로 물러서던 그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자가 무림에 알려진 신검무적의 용모와는 전혀 다른 젊은 청년임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두려움이 걷어지며 마음속의 살심이 들끓어 올랐다.
‘신검무적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이내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