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84화
제 353 장 신공비사(神功秘史) (1)
모용단죽은 진산월에게서 시선을 돌려 허공을 응시한 채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 단점 때문인지 아니면 미완(未完)의 무공이기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분이 그 무공을 종남파에 전할 의향이 없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일세.”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나 그의 머릿속은 그 자신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양신공에 단점이 있는지, 그것이 미완의 무공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태을검선의 무공이 이미 오래전부터 강호상에 나와 있었으며, 그 무공을 익힌 자들에 의해 강호무림이 백 년 동안이나 좌지우지되어 왔다는 것이었다. 종남파가 구대문파에서 쫓겨나고 본산마저 빼앗긴 채 오욕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도 태을검선의 무공을 얻은 자들은 보이지 않는 흑막 속에 모습을 감춘 채 천하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유진을 얻기 위해 종남파의 문인들이 그동안 흘려 왔던 그 많은 땀과 눈물을 생각해 본다면 실로 억장이 무너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중에는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장문인의 지위까지 내던진 채 평생을 헌신해 왔던 외로운 나그네도 있었고, 문파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어린 사제들만을 남겨둔 채 한겨울의 혹한을 뚫고 눈 덮인 설산을 헤매야 했던 젊은 장문인도 있었다. 그들의 고난과 역경을 벗어나기 위한 그 모든 노력과 희생이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허망한 몸부림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허탈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그 허탈함과 공허함 속에 짙은 분노와 울분이 배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태을검선이 무슨 이유로 천양신공을 종남파에 전하지 못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유진을 얻은 자들의 행태는 종남파로서는 쉽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산월의 표정이 워낙 무겁게 가라앉아 있자 모용단죽 또한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로서는 서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천양신공에 대한 소유권이 어디에 있느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세.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가 버렸으니 말일세.”
모용단죽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무려 백 년이 훨씬 넘은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었고, 이제 와서 그 일에 대해 왈가왈부해 보았자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뿐이다.
그 일의 가장 큰 책임은 처음 태을선거를 발견한 사람일 테지만, 이미 흙 속으로 돌아간 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의 후손인 조익현에게 지난 일에 대해 따진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백 년이란 너무도 긴 세월이었다. 태을검선의 시기까지 계산하면 이백 년이 훌쩍 넘는 장구한 세월이었다. 선대 고수가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이백 년이나 지난 무공에 대한 책임소재를 이제 와서 따진다는 것은 모용단죽의 말마따나 무의미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
“중요한 건 천양신공에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는 것일세. 그 때문에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지. 그 여파는 자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걸세.”
모용단죽은 또다시 천양신공의 단점을 거론했다. 이쯤 되니 진산월도 모용단죽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단점이 무엇입니까?”
진산월이 자신의 말에 관심을 보이자 모용단죽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막상 그 단점에 대한 말을 하려니 지난 세월의 고초가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천양신공은 천하에서 가장 양강(陽剛)한 무공일세.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래서 천양신공에 입문하고 일정한 경지에 다다르면 그때부터 한 가지 부작용이 생겨난다네. 바로 너무 강한 신공의 위력 때문에 체내의 양기가 고갈되어 버린다는 것이지.”
“……!”
“삼성(三成)을 넘어서면서부터 양기의 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오성(五城)을 넘게 되면 남자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되네. 설사 양강의 영약을 먹더라도 모두 천양신공의 기운으로 빨려 들어가 몸속에 양기가 남아나지 않게 되는 것일세.”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양신공은 천하제일고수인 모용단죽의 상징과도 같은 최고의 신공절학이었다.
모용단죽이 구궁보를 세운 이후 얼마나 많은 강호의 고수들이 그 신공의 한 자락이라도 얻기 위해 구궁보 주위를 기웃거렸던가?
자신조차도 임영옥이 모용공자를 통해 구궁보의 절학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일말의 부러움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 절세의 신공인 천양신공에 이러한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제야 진산월은 모용단죽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씁쓸하고 착잡한 빛이 이해되었다. 아울러 그가 왜 정혼녀였던 천수관음과 맺어지지 못하고 구궁보에 홀로 칩거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모용단죽은 평생 어떤 여인과도 혼인을 하지 않았고, 사소한 염문이 난 적도 없었다. 기품 있는 용모에 천하제일고수라는 명성 때문에 많은 여인들의 구애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강호무림에는 모용단죽에 대한 크고 작은 온갖 소문들이 퍼져 있었지만, 진상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모용단죽은 천양신공을 익힌 부작용으로 여인을 안을 수 없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천양신공을 얻기 전에 그 점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까?”
진산월은 석동이 그러한 단점도 알려주지 않고 천양신공을 전했는지 의문을 표했다.
“천양신공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무공에 입문하기 전에 충분히 들었지만, 또한 신공을 대성하면 그러한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에 용기를 내었지. 솔직히 당시의 나로서는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신공을 익히겠느냐는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네. 설사 그 결과가 이러한 것임을 미리 알았더라도 말일세.”
“…….”
“나는 신공의 경지가 높아지면 상태가 호전될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부작용을 벗어날 수 없었네. 결국 천양신공이 팔성(八成)에 이른 즈음에야 비로소 더 나이를 먹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지. 구궁보를 세우고 후계를 키울 생각으로 본 가의 직계 중 가장 재일이 뛰어난 후손 하나를 입양한 것도 그즈음의 일일세. 그 아이가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하네.”
진산월은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단죽의 후손은 천하에서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모용봉이 모용단죽의 친손자가 아닐 거라는 의심은 그동안 적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은밀히 퍼져 있었다. 이제 모용단죽의 입으로 직접 그 소문이 사실임을 알게 된 것이다. 모용봉 또한 천양신공을 익히고 있으니, 그의 몸 상황도 모용단죽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진산월은 뜻하지 않게 두 조손의 가장 큰 비밀을 알게 된 셈이었다.
그때 문득 진산월의 뇌리에 예전에 자신을 공격했던 운자추가 떠올랐다.
운자추는 운문세가의 소가주이면서 또한 신목령의 삼호로 암약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임영옥이 태음신맥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쾌의당에 청부하여 그녀를 납치하려다 실패하고 말았는데, 어도진의 작은 객잔에서 진산월을 암습하면서 임영옥이 그나마 모용공자에게 넘어간 것이 다행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진산월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했었는데, 이제 보니 운자추는 이미 모용공자가 천양신공을 익히고 있기에 여인을 취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용봉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자 진산월의 마음은 자신도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모용봉은 비록 최고의 고수에게서 최고의 절학을 배워 강호의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태양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대신 남자로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진산월은 그를 보며 질투를 느꼈고, 경쟁심을 키워 왔으며, 운명과도 같은 거대한 그림자가 짓누르는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아직까지도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그에 대한 희미한 적의와 시기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 비밀을 알고 나니 그러한 모든 것들이 부질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진산월의 얼굴에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모용봉이 남자의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것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궁보에서 보았던 모용봉의 언행 하나하나가 전혀 다른 의미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천양신공을 얻은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이내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자칫 그의 자존심을 해치는 말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모용단죽은 확실히 비상한 사람이었다. 진산월의 얼굴 표정이 살짝 변한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알아본 것처럼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후회 같은 건 없네. 나는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고,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였네. 봉아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네. 그러니 혹시라도 그 아이를 동정하거나 하지는 말아주게.”
“동정이라니, 그럴 리 있습니까?”
“자네 표정에서 왠지 그 아이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한 말일세. 아무튼 그 부작용은 오랫동안 사부를 고민케 했지. 그러다 결국 천양신공의 너무 강한 위력이 문제의 원인이라 생각하고, 그 원인을 제거할 결심을 하게 된 걸세.”
“…….”
“지난 세월 동안 사부는 천양신공을 철저히 해부하여 몸속의 양기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효과를 제어하려 했고, 결국 천양신공이 하나의 내공심법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게 되었네. 그게 무엇인지 알겠나?”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본 파의 구양신공(九陽神功)이 아닙니까?”
모용단죽의 입에서 언뜻 고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자네도 천양신공이 혹시 구양신공과 같은 무공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군. 그러니 자연스레 그런 대답이 나왔을 게야.”
진산월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천양신공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미 오래전에 실전되었던 구양신공과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점이 엿보였던 것이다. 물론 구양신공에 체내의 양기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부작용 같은 건 없었다. 구양신공은 비록 양강의 무공이기는 하지만, 천하의 어떤 내공심법보다도 충후하고 정순해서 부작용 따위는 전혀 없는 신공절학이었다.
그 구양신공을 종남파 사상 가장 완벽하게 익힌 사람이 바로 태을검선이었다.
“구양신공은 종남파 최고의 무공인 육합귀진신공을 지탱하는 여섯 가지 기둥 중 하나일세. 다시 말해서 육합귀진신공을 얻기 위해서는 구양신공 외에도 다섯 가지의 신공을 더 익혀야만 한다는 것이지.”
모용단죽의 입에서 뜻밖의 비사(秘史)가 흘러 나왔다.
“태을검선은 다른 신공 없이 순수하게 구양신공만으로 육합귀진신공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천양신공일세. 구양신공을 보완하여 온전히 육합귀진신공을 얻기 위해 만들었기에, 구(九)에 하나(一)를 더했다는 의미에서 천(天)양신공이라 이름 붙이게 된 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