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88화
제 356 장 전운밀포(戰雲密布) (1)
형수의 강변은 초여름의 향취에 흠뻑 젖어 있었다.
형수의 오른편을 지나는 경항대운하(京抗大運河)에서 파생된 강은 비록 강폭이 그리 넓지 않았으나 주위 경관이 수려하고 수량이 제법 많아서 유객(遊客)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형수로 들어서기 전에 좌측으로 특이한 모양의 탑이 유난히 시선을 끄는데, 이 탑이 바로 보운탑(寶雲塔)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점차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을 무렵. 석양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보운탑이 자리한 보운사(寶雲寺)의 경내로 들어서는 한 인영이 있었다.
이마가 유난히 넓고 비쩍 마른 체구에 짙은 회의를 입은 삼십 대의 중년인이었다. 옆으로 쭉 찢어진 눈에 입술이 얄팍해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생긴 회의인은 연신 주위를 힐끔거리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두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제법 상당한 내공을 지닌 고수임이 분명해 보였다.
회의인은 주위를 스쳐 가는 향화객(香火客)들을 힐끔거리며 보운사의 후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담벼락을 돌아 후원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인적이 뚝 끊기며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작은 화원과 정원이 있는 후원의 한쪽에는 제법 울창한 죽림(竹林)이 있었는데, 회의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죽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죽림을 지나자 제법 단아한 건물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원래 보운사의 노승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나이를 먹어 거동이 불편한 노승들의 취향에 맞게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주위가 늘 고요한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나 얼마 전부터 기거하던 노승들이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회의인이 막 건물을 향해 다가서려 할 때였다.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던 한 사람이 그의 앞으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덩치가 커다란 흑의 장한이었는데, 험상궂은 얼굴에 두 눈에는 번갯불 같은 신광이 이글거리고 있어서 담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인상이었다.
흑의 장한은 회의인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를 향해 턱을 까닥거렸다.
“늦었군.”
회의인은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기치 못한 일이 있었소.”
“그게 무슨 일인가?”
회의인은 흑의 장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총순찰께선?”
“와 계시네.”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말이오.”
회의인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흑의 장한이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의 등을 쏘아보았다. 사람의 전신을 난도질할 듯한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호가호위(狐假虎威)라더니, 총순찰의 신임을 조금 얻었다고 함부로 위세를 떠는군.”
흑의 장한은 험악한 눈으로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회의인을 따라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구를 지나자 작은 대청이 나타났다. 대청은 그다지 넓지 않았으나 한때 노승들의 거처임을 나타내듯 정갈하고 단아했다.
대청 안에 몇 사람이 앉아 있다가 들어오는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장 중앙에는 비쩍 마른 체구에 유난히 하관이 긴 중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눈빛이 어찌나 차가웠던지 마치 얼음으로 된 빙인(氷人)을 보는 것 같았다.
중노인의 우측으로는 체구가 좋은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 세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좌측으로는 이십 대 후반의 청년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장내의 분위기가 경직되어서 얼핏 보기에도 그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들어온 두 사람 또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흑의 장한은 세 명의 중년인들 옆으로 갔고, 회의인은 두 청년이 있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오셨습니까?”
두 명의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인사를 하자 회의인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중앙에 앉은 중노인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그걸 조사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는지요?”
조금 전에 자신을 대할 때와는 달리 정중하게 사과부터 하는 그의 모습을 본 흑의 장한의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중노인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이 생겼으면 확인해 보는 게 당연하지. 늦은 건 신경 쓰지 말게.”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란 게 어떤 건가?”
회의인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저는 보정에서 형수로 이르는 길을 집중적으로 조사했습니다. 그 길은 검보에서 이곳으로 오는 중요한 길목이기에, 혹시라도 검보에서 팽가의 회갑연에 참석하려 한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중노인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오가 지날 무렵에 검보쌍기 중 일인인 사공언이 검보의 고수들 다섯 명과 함께 지나가는 걸 보고 그들의 뒤를 밟았습니다.”
“사공언과 동행한 자들은 누구인가?”
“오대검객 중의 은명검 방구홍과 검보칠숙 중의 비표랑객(飛豹浪客) 조형(祖螢), 서천명도(曙天明刀) 하일초(賀日草)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외 두 명은 사공언의 호위인 것 같더군요.”
“서문장천이 무리를 했군. 남의 회갑연에 자신의 왼팔과도 같은 사공언도 모자라 오검과 칠숙 중에서 세 사람이나 보내다니 말이야.”
“아무래도 이번 회갑연에서 팽가와의 공조를 확실히 하려는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래서 어떻게 했나? 단순히 그들의 뒤만 쫓다 오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원래는 그들이 팽가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바로 돌아올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팽가를 한 바퀴 둘러보는 와중에 우연히 팽가의 후미진 쪽문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자가 누군가?”
회의인의 음성이 한층 더 묵직해졌다.
“파운수 추동생이었습니다.”
중노인의 눈에서 섬전같이 예리한 빛이 번뜩였다.
“추동생이라면 성숙해의 이십팔숙 중 한 놈이 아닌가?”
“이십팔숙 중에서도 이정문의 총애가 각별해서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고 알려진 자입니다.”
“이정문의 최측근이라…….”
“그래서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그의 뒤를 은밀히 추적했습니다. 그자는 남쪽 거리를 따라 내려가더니 오가장(吳家莊)으로 들어가더군요.”
“오가장?”
“이곳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원인데, 알아보니 전직 고관이 관직에서 은퇴한 후에 머무르던 곳이라고 합니다.”
“흠…….”
“저는 오가장 밖에서 두 시진 가까이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지요.”
“무얼 말인가?”
중노인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묻자 회의인은 슬쩍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된 것을 확인한 회의인은 이내 낮고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가장으로 들어가는 이정문입니다.”
짤막한 말이었으나, 그 순간 중노인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홱 변했다.
“이정문이 오가장에 와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가 오가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오느라 늦게 된 겁니다.”
중노인이 허공을 응시하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정문……!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한동안 전신으로 진득한 살기를 뿜어내던 중노인이 회의인을 돌아보며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역시 내 눈은 잘못되지 않았군. 탐랑(貪狼)의 코는 예민해서 어떠한 상대도 놓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번에 제대로 솜씨를 보였군그래.”
중노인의 칭찬에 회의인의 얼굴에 한 줄기 만족한 웃음이 떠올랐다.
회의인은 탐랑 고력기(庫力基)라는 자로, 서장의 최고수들인 십이기나 십육사에 속해있지는 않았지만 명석한 두뇌와 빠른 신법으로 청해성 일대에서는 나름대로 적지 않은 명성을 날리는 인물이었다.
고력기의 옆에 있는 청년들은 그의 의제들로, 흑호(黑虎) 장홍패(藏紅牌)와 백표(白豹) 탑소극(搭少極)이라는 자들이었다. 이들 두 명과 고력기를 합해 청해삼수(靑海三獸)라 칭했다.
그들과 마주 보고 앉아있는 흑의 장한과 세 명의 중년인들은 노(路)씨 성을 가진 친형제들로, 사람들은 그들을 혈전사마라 불렀다. 혈전사마 노씨형제는 대막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서장 십육사에 속할 정도로 대막에서는 거의 제왕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명성이나 나이로 보아 혈전사마는 청해삼수보다 몇 단계 윗길의 고수들이었다. 그럼에도 청해삼수의 우두머리인 고력기는 그들에게 제대로 된 선배대접을 해주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항렬로 취급을 했다.
노씨형제는 그것이 총순찰인 무영천자 비일염이 자신들을 경계해 그들을 비호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노씨형제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그들이 비록 일대일로는 비일염의 적수가 되지 않지만, 네 사람이 합치면 충분히 그를 감당하고도 남았기에 그의 밑에서 일개 순찰로 머무르는 현실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런 데다 설상가상으로 눈에 차지도 않던 청해삼수가 비일염을 등에 업고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으니, 대막 최고의 실력자로 군림해 오던 그들로서는 그야말로 가슴이 터져나갈 것처럼 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방주인 위태심의 신신당부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순찰 자리를 뿌리치고 대막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중노인은 서장십육사 중의 일인인 무영천자 비일염이었다. 십육사 중의 최고수인 서천노사가 거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는 그가 십육사 중의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같은 십육사의 고수들을 자신의 아래로 보고 은근히 경시하거나 소홀히 대하고는 했는데, 혈전사마에게는 유독 그런 경향이 심했다.
그것은 네 명이나 되는 그들이 자칫 인원수를 믿고 자신의 권위에 대항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의 일환이기도 했으나, 그 때문에 흑응방 순찰들 사이의 분위기가 상당히 경색된 것은 분명한 그의 실책이었다.
하나 지금은 비일염은 물론이고 노씨형제들조차 두 눈에 살기를 번득이며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고 있었다.
이정문은 서장의 고수들에게는 철천지원수나 마찬가지였다.
서장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던 서장제일지자 천애치수 단목초가 그의 계략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서장의 일반인들은 단목초를 향해 직접 살수를 쓴 감종간을 ‘천하의 배역자(背逆者)’라고 욕했지만, 서장의 고수들은 감종간보다는 그를 배후에서 조종한 이정문을 진정한 원흉으로 보았다. 감종간이 비록 스승을 살해한 패륜을 저질렀지만, 이정문의 계략에 빠져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장의 고수들 중에는 이번 중원과의 일전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정문만큼은 반드시 제거하려고 마음먹은 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나 이정문은 꼬리를 감춘 신룡(神龍)처럼 행적을 알기 어렵고 일정한 거처가 없어서 그동안 서장의 누구도 그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토록 찾기 어렵던 이정문의 행방이 바로 지척에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냉정하고 차가운 성정으로 유명한 비일염조차 순간적으로 숨이 거칠어질 정도였다.
하나 비일염은 이내 평상시의 신색을 회복하고는 고력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본 방의 주축들이 모두 집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정문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은 실로 커다란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네. 속히 방주께 알려 이번 기회에 기필코 그놈의 머리통을 목에서 떼어내고야 말겠네.”
그의 입에서 흉악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나오는데도 누구도 눈을 찌푸리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서장 무림인들의 이정문에 대한 원한은 크고 깊었다.
고력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방주께서 근처에 와 계십니까?”
“물론이네.”
“어디에 계십니까?”
“가깝다면 아주 가깝고, 멀다면 아주 먼 곳에 계시네.”
비일염의 뜻 모를 말에 고력기가 알 듯 말 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