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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92화


제 358 장 절세홍안(絶世紅顔)(1)

화사한 공간이었다.

임영옥은 차분한 눈으로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 비싸거나 사치스런 물품으로 장식되어 있지 않음에도 방 안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큼 화려해 보였다. 구석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탁자나 소품들은 희대의 명품처럼 느껴졌고, 벽에 걸린 장식이나 그림도 하나같이 명인(名人)의 손길이 닿은 듯이 보였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방의 중앙에 천장부터 바닥까지 발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무겁지도 탁하지도 않은 신비로운 광택이 감돌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수한 재질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 발 때문인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오묘하고 기이한 분위기가 방 안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단순히 화려하다거나 고아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독특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부럽다거나 동경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단순히 방 안에 앉아 있을 뿐인데도 편안함보다는 무언지 모를 묘한 설렘과 무거운 중압감이 함께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임영옥은 그런 분위기가 아마도 방 주인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여자의 방은 때로는 방 주인의 성품을 대변해 주기도 하는 법이다.

주인 없는 방에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가 들어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임영옥의 심정은 의외로 담담하기만 했다. 그녀도 자신의 마음이 이토록 고요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처음 그녀가 이 방의 주인을 만나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수많은 고민과 나름의 비장한 각오가 필요했는데, 막상 방 안으로 들어온 지금은 그런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 여겨졌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임영옥은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그런 마음을 묵묵히 관조했다.

그러던 한순간,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며 서늘한 공기와 함께 한 가닥 그윽한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발 안쪽에 한 명의 여인이 그린 듯한 자태로 앉아 있었다.

신비로운 빛을 뿌리는 발 때문에 그녀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희미하게 드러난 잔영으로 궁장을 입은 여인이라는 것만 간신히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발 사이로 한없이 영롱하면서도 차갑게 정제된 듯한 두 개의 눈이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 담긴 빛은 심연처럼 고요했으나,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공연히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임영옥은 자신의 모든 것이 그 시선 아래에서 샅샅이 분해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이한 감각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자신의 몸이 한 줌의 먼지로 화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가만히 있으면 거대한 무언가에 끝없이 짓눌려 마침내는 존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임영옥은 그 시선에 굳이 대항하려 하지 않았다. 대항하고 싶어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대항할 능력이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무공을 잃고 체내의 기력도 거의 소진되어 있는 그녀로서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앉아 있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산산이 부숴버릴 듯한 시선이 마침내 거두어졌다. 궁장 여인은 여전히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조금 전과 같은 기이한 중압감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발 사이로 서늘하고 깨끗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몸으로 용케도 내 정심안(淨心眼)을 버텨내는구나.”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영롱한 음성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듣는 이의 심혼을 쥐어 잡는 듯한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임영옥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녀가 특별히 대답을 원해서 한 말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발 안에서 다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지?”

임영옥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를 피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구나.”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뿐입니다.”

발 안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호. 그럼 나를 만나면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다는 말이냐?”

“적어도 한 가지는 해결되겠지요.”

“그게 무엇이냐?”

임영옥은 발 안의 여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비록 그녀의 능력으로 특이한 성능이 있는 발 안을 투영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발 사이로 내비치는 투명한 시선을 바라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장문 사형을 설득하는 일입니다.”

발 안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궁장 여인의 시선은 임영옥의 얼굴에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있었으나, 임영옥의 표정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한참 후에야 다시 예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네가 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굳이 그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차피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가 나서지 않는다면 장문 사형은 결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지?”

“장문 사형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길은 절대로 걸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타의에 의해 억지로 걸었다가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흐음.”

발 안에서 의미를 알기 힘든 소리가 흘러나왔다. 탄식인지 한숨인지 아니면 감탄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 발 안의 여인이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무래도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너일 테니 말이야.”

이번에는 임영옥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발 안의 여인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시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가 왜 먼저 나서서 그 일을 하겠다고 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그가 수락하는 순간, 너는 더 이상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너는 그를 떠날 자신이 있느냐? 아니, 그건 무의미한 질문이겠군. 결심을 굳혔을 테니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이겠지. 중요한 건 네가 아니라 그의 의사다. 그가 과연 순순히 너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한순간이나마 임영옥의 낯빛이 조금 더 핼쑥해져 보이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임영옥은 한 차례 숨을 고른 다음 전혀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떠나 보내줄 겁니다.”

“어째서?”

“장문 사형으로서도 불가항력일 테니까요.”

“불가항력이라. 남녀 사이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하나뿐이지.”

임영옥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발 안의 시선이 그녀의 전신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가더니 이내 임영옥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맹랑한 아이구나.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나를 시험하려 하다니.”

갑자기 방 안에 쳐 있던 발이 소리도 없이 허공으로 말려 올라갔다.

그와 함께 발 안에 있던 여인의 모습이 비로소 임영옥의 눈앞에 드러났다.

제일 먼저 시선을 잡아끈 것은 하얀색 꽃문양이 가득 수놓아진 화려한 궁장이었다. 사람의 주먹만 한 크기의 꽃문양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궁장 전체에 걸쳐 새겨져 있기에 얼핏 보기에는 마치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새하얀 꽃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임영옥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여러 겹의 꽃잎이 섬세하게 새겨진 하얀색 꽃문양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에 붓으로 그린 듯한 눈썹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아래 자리한 두 개의 눈은 투명할 정도로 맑은 빛을 뜬 채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뚝한 코와 선명하리만치 붉은 입술은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턱선은 정교할 정도로 섬세한 곡선을 그리며 목으로 이어져 내리고 있었다.

흔히 미인(美人)를 표현하는 여러 가지 수사들이 있었지만, 지금 임영옥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떠한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것이구나라는 생각뿐이었다.

임영옥은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이럴진대, 하물며 남자라면 어떠하겠는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자 궁장 여인의 입가에 한 줄기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의미를 알기 힘든 묘한 미소였다.

“어떠냐? 내 얼굴을 본 소감이?”

임영옥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이제껏 만난 여인 중 가장 아름답습니다.”

극찬을 들었음에도 궁장 여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너도 입에 발린 소리를 할 줄 아는구나. 내가 왜 너에게 직접 얼굴을 보여줄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이제 너와의 일을 매듭지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무거운 의미를 지닌 말이었으나, 임영옥은 처음과 똑같이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다.

“일종의 작별 인사 같은 것이란 말씀이군요.”

궁장 여인의 시선이 임영옥의 얼굴에 못 박히듯 고정되었다.

“그렇다.”

임영옥이 별다른 대꾸 없이 묵묵히 앉아 있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두렵지 않느냐?”

“두렵습니다.”

“무엇이 두려운 것이냐?”

“일이 어긋나서 계획한 모든 것이 깨어질 것이 두렵습니다.”

궁장 여인의 눈에 한 줄기 냉엄한 빛이 번뜩였다.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무서운 눈빛이었다.

“내가 일을 그르칠 것이란 말이냐?”

“제가 없이 일을 진행하면 그렇게 될 겁니다.”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자신감이 아닙니다. 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을 말이냐?”

임영옥의 입에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 없이는 장문 사형이 절대로 설득되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궁장 여인은 임영옥의 혈색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갑자기 냉랭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그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구나. 남녀 사이의 일이라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강호의 일이라면 다르다. 불가항력이란 힘이 부족한 자가 내뱉는 변명일 뿐이지.”

“선배님은 장문 사형을 강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시는군요.”

궁장 여인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자신이 아니다. 이건 확신이지. 그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거절할 리가 없다.”

임영옥은 궁장 여인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무얼 망설이십니까?”

궁장 여인의 그린 듯 고운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망설이다니?”

“후환을 남기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시는 분이 제게 손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지금도 망설이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저 없이도 장문 사형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면 아마 저를 만나지 않았을 겁니다. 저와의 만남을 승낙한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겠지요.”

“…….”

“그럼에도 선뜻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또한 저를 만난 장문 사형이 더욱더 흔들릴 것이 걱정되기 때문일 겁니다.”

궁장 여인의 눈빛에 예의 서릿발 같은 안광이 피어올랐다. 임영옥은 전신이 날카로운 칼날에 짓이겨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으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처음의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가뜩이나 파리한 안색이 더욱더 핏기를 잃고 창백하게 변하는 것 외에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조금의 변함도 없었다.

궁장 여인의 속눈썹이 천천히 깜박거린 후에야 비로소 그녀의 몸을 무겁게 위협하던 무시무시한 기운이 사라졌다.

궁장 여인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임영옥 또한 침묵을 지키자 장내는 기이한 정적에 휩싸여 버렸다.

서로 마주 앉은 두 여인은 모두 천하의 절색이었으나 그 외의 모든 것은 판이하게 달랐다. 성격은 물론, 신분과 나이 등 어떤 면에서도 유사점을 찾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서로 마주 본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똑같은 한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온 환경과 주위의 여건이 완전히 다름에도 오직 하나의 동질성 때문에 그녀들은 비슷한 존재처럼 보이는 것이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궁장 여인이었다.

“당돌한 아이구나. 내 인내심을 위협할 만큼. 보기보다 순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감히 내 마음을 흔들 정도로 강단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슬쩍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일 장이나 떨어져 있던 임영옥의 몸이 주르르 달려왔다. 궁장 여인은 임영옥의 맥문을 잡아 보고는 다시 그녀의 단전 부위에 손을 대었다.

궁장 여인의 손이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만지는 동안 임영옥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이내 궁장 여인은 다시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임영옥의 몸은 마치 무형의 손에 이끌린 것처럼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임영옥은 살짝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고는 담담한 눈으로 궁장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제 안심이 되십니까?”

궁장 여인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가 다시 펴졌다.

“이번에는 네 말이 맞았다고 해두지.”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궁장 여인은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안이 아니다. 네가 나에게 하는 부탁이지.”

임영옥은 한 치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을 바꾸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궁장 여인은 잠시 임영옥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어 가는 자의 마지막 부탁이라면 한 번쯤 들어줄 만하겠지.”

임영옥은 한동안 궁장 여인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목을 타고 흐르는 몸을 감싼 궁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 궁장 사이사이에 수놓아진 눈부시도록 새하얀 모란꽃을 묵묵히 응시하던 임영옥은 이윽고 궁장 여인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어느 때보다 절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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