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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93화


제 358 장 절세홍안(絶世紅顔) (2)

임영옥이 방을 떠날 때까지 궁장 여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때때로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짐작하기 힘든 여러 가지 감정들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군.”

문득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앞에 어느 사이엔가 한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방금 전에 임영옥이 있던 자리를 차지한 그 노인은 새하얀 백발에 주름살이 가득했으나, 눈빛만큼은 젊은이의 그것처럼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노인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났음에도 궁장 여인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인을 슬쩍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는 평상시의 그녀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영롱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백발 노인은 빙긋 웃었다.

“이미 다 결정해 놓고 내 의견은 왜 묻는 거요?”

“내가 제대로 결정한 건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래요.”

그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 말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행동과 말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런 의중을 절대로 밖으로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라도 오직 단 한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었다.

백발 노인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자신이 없다는 거요? 당신답지 않은 일이로군.”

“예전에는 분명한 자신이 있었어요. 그가 어떤 마음을 먹든 그를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오?”

언뜻 궁장 여인의 코끝이 쫑긋거려졌고, 아랫입술이 살짝 깨물어졌다. 그녀는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나, 백발 노인은 그녀의 그런 표정이 무언가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거나 성에 차지 않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쉽게 알아보았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속마음을 짐작하는 일이 쉽지 않아졌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몇 년간 그가 겪은 일들이 범상치 않기에 생긴 것인 줄 알았는데, 최근의 만남에서 더 이상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 나도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려지더군.”

“우리가 너무 신중했던 걸까요?”

백발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지. 예전의 그는 단지 가능성뿐이었소. 당신도 알다시피 그 한 가지만 보고 그에게 일을 맡기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하지 않았소?”

“사안의 중대성만큼이나 시간적인 여유도 중요했는데, 너무 차일피일 미룬 게 아닌가 싶어요. 그 때문에 지금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볼 여지조차 없어지고 말았죠.”

“어차피 이번 일은 뒤가 없는 것이오. 이번 한 번으로 그자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두 번의 기회는 없다는 걸 당신도 알지 않소?”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요.”

“이번에 봉황금시가 그자의 손에 넘어가면서 그자는 삼 초의 검법을 모두 갖게 되었소. 시간이 흐를수록 그자를 상대로 승기를 잡기란 점점 더 어려워질 거요.”

궁장 여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들이 봉황금시를 그토록 쉽게 포기해 버릴 줄은 미처 몰랐어요. 그들이 그걸 가지고 있는 한 그자와의 충돌이 계속될 것이고, 그의 실력으로 보아 그자가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면 빼앗길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별다른 곡절 없이 봉황금시가 그자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으니…….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전신의 맥이 모두 풀릴 지경이었어요.”

“대신에 그들은 칠음진기를 얻었지.”

궁장 여인의 두 눈에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광망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강일비, 그 녀석이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강일비가 알고 있는 것은 칠음진기의 반쪽 구결뿐이에요.”

“그리고 강일비는 주저하지 않고 그걸 가지고 그자에게로 달려갔소.”

궁장 여인의 시선이 슬쩍 백발 노인에게로 향했다.

“강일비에게 다른 속셈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나요?”

“그의 속마음을 누가 알겠소? 한 가지 분명한 건 강일비에게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거요. 그게 무엇이든 그자에게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이유 말이오.”

궁장 여인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다시 입가에 한 줄기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심혼을 얼려버릴 듯한 차갑고 냉엄한 미소였다.

“강일비의 속셈이 무엇이었든 그는 반드시 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

백발 노인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거야 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운명이겠지. 그보다 정녕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할 작정이오?”

“그럴 생각이에요.”

백발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들이 다시 만나는 걸 당신이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원래는 그럴 마음이었어요. 솔직히 조금 전에 그 아이가 만나러 오기 전만 해도 더 이상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 정리하려 했어요. 하지만 막상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더군요. 최악의 경우라도 이번 일에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을 거예요.”

“최악의 경우란 그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는 걸 뜻하오?”

궁장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로 최악이라고 할 수는 없죠.”

“갑자기 불안해지는군. 당신이 예상하는 최악의 경우란 어떤 걸 말하는 거요?”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종남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리고는 두 번 다시 강호에 나오지 않는 거죠.”

백발 노인의 주름진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게 가능하리라 보오?”

처음으로 궁장 여인의 그린 듯 고운 봉목에 한 줄기 어두운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들의 성정으로 보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에요. 그리고 그럴 경우, 마땅히 그를 제어할 다른 방법이 없어요.”

백발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그는 일문(一門)의 장문인으로서 문파를 부흥시킬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소. 그의 성격상 일신의 안위를 위해 그 책임을 저버리지는 못할 거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을 볼수록 어쩌면 그들 사이가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각별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느 정도로 말이오?”

“그 어떤 대단한 것도 세월의 힘을 이길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들은 사 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헤어져 있었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적어도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이 그동안의 세월로 어느 정도는 무뎌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왜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하려는 거요?”

“그녀의 몸 상태를 확인했기 때문이죠.”

백발 노인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더군.”

“그 정도가 아니에요. 그녀는 이미 심지가 다 닳은 호롱불 같은 신세가 되었어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시 되돌릴 수 없을 거예요.”

“칠음진기를 완성해도 말이오?”

“그래요. 체내의 진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태음신맥의 음기가 그 자리를 대신한 이상, 대라신선이 와도 그녀를 살려놓을 수는 없어요.”

백발 노인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 안타까운 일이로군. 보기 드문 재녀(才女)였는데 말이오.”

“어쨌든 그녀가 그런 몸이 되었으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아요.”

백발 노인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왜 그런 상황을 최악으로 상정했는지 알겠군. 내가 본 그의 성정이라면 확실히 더 이상의 강호행을 포기하고 그녀와 함께 문파로 돌아가 칩거해 버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거요. 물론 처음에는 그녀의 몸을 고치려 노력하겠지만, 백약이 무효함을 알게 된 순간 그가 그런 선택을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소.”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데 더 비중을 두고 있어요.”

“왜 그렇소?”

“그녀는 스스로의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종남파의 제자들을 지키려 했어요. 그건 그만큼 그녀에게 문파의 부흥이 절실했기 때문이에요. 그런 그녀의 마지막 소망을 그가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그녀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영활하게 빛나고 있었고, 음성에는 단호하리만치 분명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절대로 문파의 부흥을 염원하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요. 그녀의 심지가 다 닳아지고 숨결이 가늘어질수록 그는 그녀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더욱 전력을 기울일 거예요. 그녀가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갈수록 그의 선택은 분명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그녀의 숨이 끊어진다면?”

“그때는 그녀의 시신을 가슴에 묻고 오히려 더욱 맹렬히 정진하겠지요.”

백발 노인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이제야 당신이 왜 최악의 경우라도 일이 뜻대로 진행될 거라고 말했는지 이해하겠소. 그가 그녀와 함께 종남산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머지않아 그녀가 죽게 된다면, 반드시 강호로 다시 뛰쳐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로군. 그녀의 숙원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말이오.”

“내가 아는 그라면 반드시 그럴 거예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고.”

“그래요.”

“그녀가 그를 설득할 수 있으면 제일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 그녀의 죽음으로 그를 움직이게 할 수 있으니 당신은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로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먼저 그를 찾아간다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더군요.”

백발 노인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당신다운 말이오.”

“어때요? 이제 내게 확신을 줄 수 있겠어요?”

“내 생각을 묻는 거라면, 당신의 의견이 지극히 타당하다고 답해주고 싶소.”

“그 정도 말로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소.”

“그게 무언가요?”

“그로 하여금 합류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면 되는 거요.”

“그러니까 그 방법이 무언지 말해 보세요.”

백발 노인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에게 줄 수 있는 보수 하나를 거시오. 이를테면 그는 너무도 간절히 원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다지 필요가 없는 것이면 좋지 않겠소?”

백발 노인의 음성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궁장 여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당신이 말하는 건 설마…….”

“칠음진기의 후반부 요결이면 어떻소?”

궁장 여인의 시선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빛을 띤 채 백발 노인의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하나 백발 노인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입가에 슬쩍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어차피 당신에게는 이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공요결 아니오? 하지만 그에게는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너무도 절실한 것일 거요.”

“…….”

“당신 입으로 말했다시피 어차피 그 요결을 얻어 보았자 그녀의 생명을 구할 수는 없소. 하지만 그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 요결을 얻으려 할 거요. 이 정도라면 이번 일에 확신을 가져도 되지 않겠소?”

궁장 여인은 침묵을 지킨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백발 노인도 더 이상은 입을 열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한동안 미동도 않은 채 골몰해 있던 궁장 여인은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흠. 나로서는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에요.”

백발 노인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궁장 여인은 그런 그의 모습이 얄미운지 슬쩍 그를 노려보고는 이내 특유의 깔끔하고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약간의 껄끄러움 정도는 감수해야겠지요.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백발 노인은 그녀가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다는 듯 다시 빙긋 미소 지었다.

“현명한 판단이오.”

용건이 끝났다는 듯 백발 노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떠한 기척도 없었는데 그의 몸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움직임이었다.

궁장 여인은 그때까지도 처음의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천상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녀였으나, 문득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음성 속에는 뼛골이 시릴 듯 서늘한 차가움이 감돌고 있었다.

“당신은 작은 변수라도 만들어 나를 골탕먹이려 하겠지만, 일단 그가 내 품속에 들어오면 어떠한 변수도 소용없게 될 거예요. 나는 결코 내 품에 들어온 남자를 놓쳐본 적이 없으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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