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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 394화


제 359 장 오장풍운(吳莊風雲) (1)

오윤(吳允)은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오늘은 정말 만만치 않은 하루가 되겠구나.’

음산한 날이었다. 새벽부터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해가 뜨기도 전에 세찬 비가 내리면서 어두운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빗줄기는 묘시(卯時)가 지나면서 가늘어졌지만, 짙은 먹구름이 낮게 드리운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해서 금시라도 다시 한바탕 세찬 폭우를 쏟아부을 것만 같았다. 해가 떴음에도 주위는 여전히 어두워서 촛불이라도 켜지 않으면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

오윤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한동안 침상 위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휘이이잉…….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마치 귀곡성(鬼哭聲)처럼 들렸다. 그것은 오늘 하루가 얼마나 험난할지를 미리 예고해 주는 전주곡 같았다.

오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지만 오윤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옷을 차려입고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축축한 공기가 피부에 닿자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나왔다. 그 서늘한 공기가 마치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누군가의 눈빛 같았던 것이다.

오윤은 성큼 대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청 한쪽에서 서성이고 있던 한 사람이 그를 보고는 재빠르게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일어나셨습니까?”

오윤은 그를 일별하고는 이내 대청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의자에 가서 앉았다.

“자네도 일찍 나왔군. 이리로 와서 앉게.”

그 사람은 오윤의 앞으로 와서 공손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제법 수려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잘 손질된 머리는 깔끔하게 빗어 뒤로 넘겼고, 의복 또한 정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오윤은 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것을 보고는 가는 한숨을 내뱉었다.

“자네도 어느덧 나이를 먹었군. 자네가 나를 처음 만난 것이 몇 년이나 되었지?”

“십오 년쯤 되었을 겁니다.”

“처음 자네를 보았을 때가 자네가 막 서른에 접어들었을 때였으니, 이제 자네도 어느덧 사십 대 중반이 되었군. 벌써 세월이 그렇게나 많이 흘렀군그래.”

“장주께선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오윤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내일모레면 육순을 바라보는 나에게 정정하다니. 아부도 지나치면 농(弄)이 된다네.”

“그렇지 않습니다. 제 눈에는 지금의 장주께서 처음 뵌 그 날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풍채가 당당하시고 기력이 넘쳐 보이십니다.”

“이 사람, 나이를 먹더니 입만 번지르르해졌군.”

잠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조용히 미소 지었다.

오윤이 형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남쪽 구릉 위에 오가장을 지은 것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듬해의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의 위세가 대단해서 형수는 물론이고 인근의 고관대작들이 하루가 멀다 하게 오가장을 들락거리며 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었다. 하나 세월이 점차 흐르면서 오가장을 찾는 고관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몇 년 전부터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는 조용하고 한적한 장원이 되고 말았다.

눈앞에 앉은 사람은 손옥석(孫玉石)이란 인물로, 오래전 오윤이 산서성 태원(太原)의 관리로 있을 때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사이였다.

당시 손옥석은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움에 처해 있었는데, 오윤은 명쾌한 판결로 그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기고 진범을 찾아내고 그를 풀어 주었다고 한다. 그때의 도움을 잊지 못한 손옥석은 오윤이 관리를 그만두고 이곳에 오가장을 짓게 되자 손발을 걷어붙이고 그의 정착을 도와주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두 사람은 친혈육보다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휘이이이…

때마침 세찬 바람이 대청 밖을 스치고 지나가는지 창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날씨부터 참으로 험악하군. 오늘은 여러모로 몸조심을 해야 할 듯싶네.”

“예,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이겠…….”

막 대답을 하던 손옥석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바람 사이로 희미하게 누군가의 고함 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오윤은 이내 손옥석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오늘 일진은 참으로 사나울 듯하네. 왠지 몹시 긴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손옥석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가보고 오겠습니다.”

그는 오윤의 대답도 듣지 않고 이내 신형을 날려 대청을 빠져나갔다.

오윤은 막 대청을 벗어나는 손옥석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차차창!

귀청을 찢을 듯한 요란한 마찰음이 들려온 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오윤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세찬 바람 소리를 뚫고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간간이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과 고함 소리가 뒤섞이니 장내의 공기마저 무섭게 뒤흔들리는 듯했다.

오윤은 참지 못하고 그 자리를 서성거렸다. 그때 갑자기 대청의 문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폭발하듯 부서지고 말았다.

콰앙!

산산조각 난 파편들과 휘몰아쳐 오는 세찬 경풍이 삽시간에 대청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윤이 흠칫 놀라 바라보니 제법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던 문이 통째로 사라져 밖의 광경이 훤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밝아오는 여명 사이로 강풍에 뒤섞인 비바람이 사방을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비바람을 맞으며 두 사람이 대청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우측의 인물은 비쩍 마른 체구에 유난히 긴 하관을 지닌 중노인이었고, 좌측의 인물은 인자한 표정의 노승이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다시 세 명의 죽립인이 들어와서 그들 뒤에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우뚝 멈춰 섰다.

오윤은 앞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좌측의 노승에게 시선이 닿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귀하는 혹시 보운사의 주지인 명정 대사 아니시오?”

노승은 온화한 웃음을 머금으며 합장을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시주.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대사께서 어찌 기별도 없이 본 장을 찾아오시었소?”

그의 물음 속에는 의아함과 함께 준엄한 추궁의 빛이 담겨 있었다.

명정 대사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정말 인자하고 부드러운 미소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사나운 맹수를 연상케 했다.

“오 시주께서 귀빈을 모시고 있다고 해서 존안이라도 뵐 수 있을까 하여 염치 불고하고 방문했습니다. 그분을 뵐 생각에 마음이 급해서 이른 아침에 허겁지겁 달려왔으니, 다소의 결례가 있었더라도 오 시주께서 널리 해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윤으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본 장에서 귀빈을 모시고 있다니……. 대체 그 귀빈이 누구란 말이오?”

명정 대사는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오 시주께서는 귀빈을 모시고 계시면서도 정작 그 귀빈이 누구인지 모른단 말씀이십니까? 허,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로군요.”

자신을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명정 대사의 말에 오윤의 얼굴이 냉엄하게 굳어졌다.

“내가 대사에게 놀림을 받을 정도로 처신을 잘못했다고는 생각지 않소. 할 말이 있으면 속 시원히 하도록 하시오.”

마치 명판관으로 태원 일대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던 예전의 그를 보는 듯한 위엄 어린 모습이었다.

명정 대사 또한 그 모습이 다소 의외였던지 입가에 드리웠던 미소를 지우며 정색을 했다.

“빈승이 쓸데없는 말로 오 시주의 심기를 어지럽힌 모양이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때 옆에서 지금까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우측의 중노인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시답잖은 말들은 이제 그만 하는 게 어떻소? 이런 농담이나 주고받으려고 아침부터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나온 것이 아니니 말이오.”

명정 대사가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자네는 다 좋은데 너무 성급한 게 탈일세. 사람이란 모름지기 운치를 알아야 하거늘…….”

중노인의 눈꼬리가 세차게 꿈틀거렸다.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농담이나 지껄이는 게 운치란 말이오?”

“어허! 우중한담(雨中閑談)은 예로부터 명망 있는 인사들의 덕목이었다는 걸 모르는 겐가?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주고받는 걸 쓸모없다고 하다니, 아무래도 자네는 좀 더 수양을 쌓는 게 좋을 것 같네.”

중노인은 순간적으로 울컥하여 한 마디 내뱉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명정 대사의 두 눈에 괴이한 기운이 이글거리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중노인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명정 대사가 다시 오윤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는 그의 눈에 떠올라 있던 괴이한 기운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제 일행의 말에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오윤은 두 사람의 수작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그냥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명정 대사는 다시 오윤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 시주께서 모시고 있는 귀빈을 뵙도록 해주시지요. 오 시주께도 나쁜 일만은 아닐 겁니다.”

오윤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헛! 지금 대사께서 나를 위협하려는 거요?”

“위협이라니 당치 않은 말입니다. 빈승은 그저 오 시주께서 정성을 다해 가꾼 이 아름다운 정원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고자 할 뿐입니다.”

오윤은 완전히 부서져서 밖이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대청의 입구를 힐끔 쳐다보고는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미 본 장은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졌소. 여기서 무얼 더 얼마나 더럽히겠다는 거요?”

명정 대사의 온화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아직 건물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부서진 문이야 오 시주께서 정정하시다면 어렵지 않게 복원할 수 있을 겁니다.”

오윤은 한동안 날카로운 눈으로 명정 대사를 쏘아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형수 일대에서 덕망이 높기로 유명한 대사가 웃는 얼굴로 사람을 위협하는 후안무치한 사람일 줄은 미처 몰랐군. 내가 모시고 있다는 그 귀빈의 이름이나 들어봅시다. 누군지 알아야 대사에게 보여주든 말든 할 게 아니오?”

명정 대사는 입가의 미소를 그치지 않으며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이임생(李任生)이라는 사람입니다.”

“이임생? 얼마 전부터 본 장의 후원에 기거하고 있는 이문사(李文士)를 말하는 거요?”

오윤이 깜짝 놀라 되묻자 명정 대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습니다.”

“이문사는 몸이 허약하여 요양차 이곳에 머무르고 있소. 내 오랜 친우인 손 노제의 부탁으로 그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후원에 머무르며 바깥으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소. 그런데 대사가 어찌 그를 알고 있단 말이오?”

명정 대사는 줄곧 오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차분한 음성을 내뱉었다.

“사실 이임생은 그의 본명이 아닙니다.”

“본명이 아니라니?”

“그는 이정문이란 이름의 무림인입니다. 강호에서는 흔히 산수재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오윤은 흠칫 놀랐다.

“이문사가 천하제일문(天下第一文)으로 알려진 바로 그 이정문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를 오 시주에게 소개한 손옥석은 이정문의 수하인 이십팔숙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 또한 본명은 추동생으로, 파운수라는 별호로 활동하고 있는 무림인이기도 하지요.”

오윤은 거듭된 명정 대사의 폭로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손 노제도 무림인이란 말이오?”

“빈승은 평소 산수재의 명성을 흠모하여 그를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까운 오 시주의 장원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어찌 달려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 시주께서는 부디 빈승의 정성을 감안하여 그를 만나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오윤은 몇 차례나 허공을 응시하며 탄식을 하더니 조금 전보다는 한풀 꺾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대사의 말은 쉽게 믿기 어렵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대사가 나에게 거짓을 말할 리는 없다고 생각해서 믿도록 하겠소. 이문사는 후원의 별실에 머물러 있으니 그곳으로 가면 그를 볼 수 있을 거요.”

“그를 불러줄 수는 없는 일입니까?”

오윤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대청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나와 보는 사람이 없소. 이게 무얼 뜻하는 것이겠소? 이미 장원은 대사 일행이 점거했을 테고, 본 장의 식솔들은 모두 구속되거나 변을 당했을 거요. 이문사를 부르고 싶어도 불러줄 사람이 없으니 대사가 스스로 가는 수밖에 없소.”

언뜻 명정 대사의 눈가에 야릇한 광망이 번뜩였다.

“오 시주의 말씀은 일견 타당하지만 빈승으로서는 따를 수가 없군요.”

“왜 그렇소?”

“오가장의 후원에는 기이한 절진(絶陣)이 펼쳐져 있어 한 번 발을 잘못 디디면 끝없는 미로 속을 헤매다 탈진하고 만다는 말이 있더군요. 빈승은 아직 그 절진을 뚫고 들어갈 실력이 되지 못합니다.”

오윤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차갑게 굳어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소?”

“그뿐인 줄 아십니까? 오 시주께서 과거에 태원의 명판관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한편으로는 강호의 신비세력인 성숙해의 일원으로 암중에 대단한 활약을 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

“십이비성 중의 금우좌(金牛座)를 맡고 계시던가요? 별호는 아마도 금우신군(金牛神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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