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396화
제 360 장 오장풍운(吳莊風雲) (3)
오가장은 유난히 나무들이 많은 장원이었다.
제법 넓은 장원의 구석구석에 크고 작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파란 기와가 씌워진 높은 담벼락이 그 주위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본채의 뒤편에 있는 작은 월동문을 지나면 숲 사이로 오솔길이 그림같이 펼쳐지는데, 휘어져 가는 소로의 끝에 울창한 수림이 있고 그 사이로 몇 채의 전각이 살짝 숨어있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름답고 한적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장원의 모습이었다.
단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작은 수림 일대의 여기저기에 산더미 같은 장작들이 쌓여 있다는 것이었다. 장작더미 주위에는 한 무리의 장한들이 흉흉한 기세로 늘어서 있고, 기름을 가득 담은 통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 당장이라도 무언가 흉험한 일이 벌어질 듯한 분위기였다.
장한들 중 흑의를 입고 체구가 건장한 중년인이 수림 안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쯤이면 우리가 곧 불을 지를 거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으니 이상하군. 설마 스스로 타죽는 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진짜 이정문이 저 안에 있는 게 맞긴 하는 건가?”
황의를 입은 삼십 대 장한이 퉁명스런 어조로 그의 말을 받았다.
“어제저녁에 이정문이 저 안에 들어간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소. 그 후로 지금까지 다시 나온 적이 없으니 그가 저 안에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오.”
흑의 중년인은 슬쩍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무심한 음성을 내뱉었다.
“자네 코가 예민하다고 총순찰이 그렇게 극찬을 했으니 코는 믿을 만하겠지. 눈도 그렇길 바라겠네.”
황의 장한의 얼굴이 붉어지며 눈자위에 성난 기색이 떠올랐다.
금시라도 날카롭게 쏘아붙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황의 장한은 청해삼수의 우두머리인 탐랑 고력기였다. 고력기는 청해성 일대에서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실력가였고 성격 또한 결코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저 솟구치는 화를 억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비아냥거렸던 흑의 중년인은 혈전사마 노씨형제 중 맏이인 혈염호(血染虎) 노극량(路克樑)으로, 대막에서는 거의 사신과도 같은 취급을 받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혈전사마 노씨형제는 개개인의 무공도 뛰어날 뿐 아니라 그들이 합치면 서장십육사의 누구와 싸워도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거라고 평가받는 고수들이었다.
고력기의 입장에서는 명성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은 총순찰인 비일염의 보이지 않는 지원을 무기 삼아 대등하게 행세해 왔으나, 비일염이 자리에 없는 지금은 그저 참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눈치가 빠른 고력기는 노극량이 자신을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기에, 그가 어떤 시비를 걸어올지 몰라 속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력기가 혹시나 하여 슬쩍 돌아보니 노극량이 섬뜩한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험악하게 생긴 노극량이 두 눈 가득 살광을 뿌리고 있으니 담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고력기 또한 가슴 한편이 써늘해져 이내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멀리서 예리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자 고력기는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휘-이익! 휘익!
길고 짧은 두 가닥으로 된 휘파람 소리였다.
고력기는 주위를 돌아보며 손을 까닥였다.
“시작하세.”
여기저기에 방심한 듯 아무렇게나 서 있던 장한들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은 장작더미 중 적당한 나무를 하나씩 집어 들더니 헝겊을 칭칭 감은 다음 기름통에 넣었다가 빼내었다.
고력기는 재빨리 화섭자를 꺼내 나무에 불을 붙이고는 장작더미를 향해 던졌다.
이내 여기저기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젖은 장작들이 적지 않았지만 군데군데 기름을 뿌려서인지 불길은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주위를 시뻘겋게 물들이며 삽시간에 사방으로 번져갔다.
몇 채의 건물과 작은 수림으로 둘러싸인 후원 일대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생각보다 잘 타오르는군.”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지은 채 그 광경을 보고 있는 고력기의 옆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결국 저 안에 이정문이 진짜로 있는지는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불부터 지르고 말았군.”
노극량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왠지 듣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을 받게 했다. 그것은 마치 사나운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하여 혈염호라는 별호가 어떻게 붙여진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력기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위에서 지시하신 일이오. 준비하고 있다가 신호를 보내면 화공을 펼치라고 말이오.”
“글쎄. 내가 직접 받은 명령이 아니라서 말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정문이 후원에 있는 게 확실해진 다음에 일을 벌이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내 말을 뭐로 듣는 거요? 아까도 말했지 않소? 이정문이 어제 후원으로 들어가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노극량의 얼굴에 예의 무시무시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가 말하면 나는 무조건 믿어야 하는 건가? 자네가 그렇게 나에게 중요한 사람일 줄은 미처 몰랐는걸.”
고력기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 나에게 시비를 거는 거요?”
노극량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내가 일부러 시비를 걸 만큼 자네가 대단한 인물이란 말인가? 이것 참,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가 너무 심하군.”
이제는 노극량의 의도가 무엇인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고력기 또한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무작정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기서 더 물러서게 된다면 청해삼수는 영원히 혈전사마의 눈치나 보며 숨을 죽이고 사는 비천한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고력기의 뒤편으로 청해삼수의 다른 두 사람인 장홍패와 탑소극이 나란히 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결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더 이상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나름의 각오가 엿보이는 모습들이었다.
고력기도 마음을 굳혔는지 조금 전과는 달리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혈전사마가 비록 대막에서 행세깨나 한다고 하지만, 우리도 청해성에서는 제왕처럼 지내던 사람들이오. 누가 누구를 과대평가한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사(大事)를 앞두고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흐흐. 청해 일대에 쓰레기 같은 세 마리 짐승들이 있어 사람들이 피해 다닌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있지. 그 짐승들이 총순찰에게 꼬리를 쳐서 귀여움 받고 있다고 나한테 눈까지 부릅뜨고 덤벼들 줄은 몰랐는걸.”
고력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극량!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이번 일을 망친다면 총순찰께서 너희 형제를 가만히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그놈의 총순찰이란 말에 귀에 딱지가 앉겠군. 비일염이라 해도 우리 형제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방주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비일염을 우리 머리 위에 올리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노극량이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는지 고력기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이놈이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고력기는 화가 나기도 하고 마음 한편으로는 두려운 생각도 들어서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로서는 노극량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그 충돌의 여파로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 염려스러웠다.
자칫하면 낭패는 낭패대로 당하고 일은 일대로 망쳐서 비일염의 신임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력기는 한 번만 더 달래보자는 마음에서 평상시와는 달리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서로 다툰다면 일이 엉망으로 꼬일지 모르오. 정말 이대로 일을 망쳐버릴 셈이오?”
금시라도 달려들 듯 전신으로 살기를 내뿜던 노극량이 의외로 순순히 기세를 거두었다.
“다투긴 누가 다툰다고 그러나? 난 그저 자네가 분수를 알고 행동하기를 바랐을 뿐이네.”
노극량이 한 발 뒤로 물러나자 고력기는 내심 다행이다 싶어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노 대협에게 무례를 저지른 점이 없지 않아 있던 것 같소. 앞으로는 처신에 좀 더 신중을 기하도록 하겠소.”
“그렇게 해주면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지.”
금시라도 터질 듯했던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공기가 가라앉을 듯하자 잔뜩 긴장해 있던 주위의 장한들도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바로 그 순간, 노극량의 오른손이 고력기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푹!
“어어?”
고력기는 노극량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해 등 뒤로 삐져나올 때까지도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나 이내 그의 입에서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고력기의 뒤에 서 있던 장홍패와 탑소극이 갑작스런 비명에 놀라 눈을 크게 뜨는 순간, 고력기의 몸을 뚫고 나온 노극량의 오른손에서 날카로운 지풍이 발출되었다.
파팟!
“커억!”
장홍패가 미간이 뚫린 채로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그제야 사정을 알아차린 탑소극이 노호성을 내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노극량! 네놈이 감히……!”
노극량은 오른손에 꿰뚫린 채 늘어져 있는 고력기의 시신을 그에게 던졌다. 탑소극이 급히 고력기의 시신을 피하는 사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노극량의 피 묻은 오른손이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실로 너무도 빠르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탑소극이 무언가 시뻘건 것이 눈앞을 어른거린다고 느낀 순간에 그의 목덜미는 노극량의 손아귀에 그대로 잡혀지고 말았다.
“끄으……!”
탑소극은 발버둥을 치며 사력을 다해 노극량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그의 목을 움켜쥔 노극량의 손은 마치 강철기둥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노극량은 선혈이 가득 묻은 오른손으로 탑소극의 목을 움켜쥔 채 자신의 코앞으로 끌어당겼다. 살광이 이글거리는 노극량의 핏발 선 눈동자를 보자 탑소극은 목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전신이 빙굴로 빠진 듯한 오싹함을 느끼고 몸을 떨어야 했다.
노극량은 혈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탑소극을 쏘아본 채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왜 네놈들이 한낱 짐승에 불과한지 알겠지? 나에게 네놈들은 하루살이보다 못한 비루한 존재들일 뿐이다!”
노극량의 오른손이 바짝 움켜쥐었다.
뿌드득!
뼈가 부러지는 음향과 함께 탑소극은 제대로 된 신음도 내지르지 못하고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다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노극량은 탑소극의 시신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무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내에는 한바탕 혈극(血劇)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극량이 고력기를 쓰러뜨린 그 순간에 장한들 중 세 사람이 옆에 있던 다른 장한들을 향해서 무자비한 살수를 펼쳤던 것이다.
그들 세 사람은 다름 아닌 혈전사마 노씨형제들이었다. 노씨형제의 무공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것이어서 장내의 누구도 그들 손에서 이 초 이상 버틴 사람이 없었다.
“크아악!”
순식간에 남아있던 모든 장한들이 그들의 손에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싸늘한 시신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장한이 숨을 거두자 세 명의 노씨형제들은 모두 노극량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노극량은 그들을 향해 짤막한 음성을 내뱉었다.
“확인해라.”
노씨형제는 사방으로 흩어져 바닥에 쓰러진 장한들의 시신을 하나하나 직접 뒤적거리며 숨이 붙어 있는지 살펴보았다.
“살아있는 자는 없습니다.”
둘째인 혈선붕(血旋鵬) 노극진(路克塵)의 말에 노극량은 천천히 한 곳으로 걸음을 옮겨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진 채 두 눈을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고력기의 처참한 시신을 내려다본 노극량은 이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이놈은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왜 죽는지 이유도 모르고 죽었군. 쓰레기에 어울리는 죽음이야.”
노극진은 화광이 충천하고 있는 후원 쪽을 슬쩍 쳐다보더니 조심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불길이 무척 거셉니다. 이정문이 과연 살아나올 수 있을까요?”
후원을 둘러싼 불길은 점점 더 커져서 지금은 후원 전체가 불길에 완전히 휩싸인 듯이 보였다. 울창한 수림은 물론이고 수림 사이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던 전각들도 모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그 무시무시한 화염 속에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뚱이가 버텨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극량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솟구쳐 오르는 불길을 쳐다보고 있다가 조금 전과는 다른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런 정도로 이정문을 잡을 수 있다면 그의 목은 진즉에 벌판을 구르고 있을 것이다. 고력기가 큰소리를 쳤지만 이정문이 실제로 저 안에 있는지도 의문이다.”
“고력기가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보기는 제대로 봤겠지. 그리고 저 안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것도 사실일 게다. 아무리 변변찮은 놈이라도 그런 걸 착각할 리는 없겠지. 하지만 그놈이 본 자가 진짜 이정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노극량은 기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불타오르는 후원을 응시하더니 이윽고 몸을 돌렸다.
“어차피 우리는 당주의 지시만 따르면 된다. 이정문이 제아무리 뛰어난 자라고 해도 당주의 손아귀를 벗어나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