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05화
제 362 장 검기무쌍(劍氣無雙) (1)
소리도 없었다.
제법 높은 천장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음에도 그가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에 어떠한 음향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난데없이 아래로 뛰어 내려온 그에게 향해 있었다.
제일 먼저 사람들의 눈을 끈 것은 새하얀 백의였다. 이어 길게 늘어뜨린 치렁한 흑발과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고색창연한 장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
차갑게 정제된 그 눈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얼음물 속에 빠진 것처럼 섬뜩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듯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어야 했다. 그들 대부분이 평생을 강호의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살아온 절세의 고수들임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주위가 죽음과도 같은 정적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천장에서 내려온 백의인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정문의 옆으로 가서 우뚝 섰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던지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던 사람 같았다.
백의인을 보는 이정문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결국 다시 또 신세를 지게 되었구려.”
음성 또한 평소의 그답지 않게 온화해서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런 태도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백의인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소.”
“내가 너무 큰 짐을 지워준 게 아니오?”
“당신이 이번 일을 부탁할 때부터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각오를 했소.”
이정문은 히죽 웃었다. 이 또한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밝고 가벼운 모습이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도 조금 전보다 한층 경쾌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리 미안해 할 필요 없겠군. 사실 위 방주의 숨겨둔 수가 너무 강력한 것이어서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진 장문인이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구려.”
백의인이 나타날 때부터 흔들리는 표정이 역력했던 위태심이 이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는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당신들은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이정문은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같은 방법에 두 번씩이나 당할 것 같지는 않아서 따로 방수(幇手)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했었지. 하지만 설마 그 방수가 천산이괴일 줄은 나도 미처 예상치 못했소. 서장의 최고 고수들을 이런 식으로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당신도 참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구려.”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소리를 듣고도 위태심은 표정의 변화가 없이 무심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군.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당신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한 수를 숨겨두고 있었군. 더구나…….”
위태심의 시선이 이정문의 옆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는 백의인을 향했다. 화살처럼 날카롭고 예리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무거움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 수가 신검무적이라니, 정말 나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오.”
백의인은 다름 아닌 당금 강호의 제일고수라 불리는 신검무적 진산월이었다. 선반을 이끌고 중원에서 암약하고 있던 흑갈방과 서장의 전초 세력들을 하나씩 처단해 오던 그가 마침내 이곳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위태심은 예전에 위수의 강변에 있는 숲속에서 진산월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에 그는 자신이 창안한 십방금쇄진을 펼쳐 진산월을 제거하려 했으나, 진산월은 십방금쇄진의 중추를 이루던 고수들 대부분을 격살하고 천라지망을 뚫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의 일은 스스로의 지략과 심계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위태심에게 있어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고, 그의 마음속에 진산월에 대한 두려움과 경각심을 심어준 순간이기도 했다. 위태심은 그 후로 심기일전하여 매사에 한층 더 신중하고 치밀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사부의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하에 완벽한 계획을 세워두었건만 마지막 순간에 다시 또 진산월을 만나게 되었으니 아무리 침착하고 냉정한 위태심도 당혹감과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위태심의 얼굴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요하고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었으나, 그 시선을 받은 위태심은 거대하고 예리한 칼날 앞에 알몸으로 서 있는 듯한 섬뜩함을 느껴야 했다.
진산월은 그런 눈으로 위태심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일전에는 당신에게 단단히 신세를 졌소. 언제고 그 신세를 갚을 날을 고대해 왔는데, 오늘 마침내 보게 되었구려.”
진산월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위태심은 전신이 싸늘한 빙굴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오한을 느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진산월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 밤은 정말 지독했다. 붉은 선혈이 산하를 시뻘겋게 물들였고, 죽음의 기운이 온 천지에 가득 덮여 있었다. 서장 고수들의 계속된 공격들과 사방에서 끝없이 몰려오는 무서운 살수들의 습격은 언제까지고 이어져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당시 진산월은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고, 그러고도 끝나지 않고 다가오는 죽음의 수레바퀴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때마침 십이비성 중의 한 사람인 쌍극후 위관이 은밀히 생로(生路)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진산월은 정말 크나큰 낭패를 당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위태심이 만들었던 십방금쇄진은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진산월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당시의 일에 대한 설욕을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위태심은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압력에 대항하듯 한 차례 몸을 가볍게 떨고는 이내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언젠가는 당신을 다시 만날 것을 각오하고 있었소. 오늘이 그날일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군. 당신은 준비가 되었소?”
자연스레 늘어뜨린 진산월의 오른손이 금시라도 허리춤에 매어진 검으로 향할 듯하자 위태심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게도 오늘 당신을 상대할 자는 내가 아닌 듯하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위태심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진산월이 나타날 때부터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동도 않고 있던 천산이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천살 궁해의 두 눈에서는 보는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괴이한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네가 바로 신검무적이구나.”
궁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조금 전과는 달리 뜨거운 열기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 또한 위태심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서도 은연중에 그들 두 사람에게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기에 그를 향한 시선에 한 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종남의 진산월이라 하오.”
궁해는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진산월의 전신을 예의 번쩍이는 눈으로 찬찬히 훑어보더니 이내 입가에 의미를 알기 힘든 미소를 지었다.
“과연 소문대로구나.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제라도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내 이름은 궁해라 한다. 양손 무공을 주로 사용하고 있지.”
궁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궁해는 평상시에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고,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서 지금처럼 반색을 하며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궁해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공태까지 소개해 주었다.
“이 사람은 내 아우인 공태라고 하는데, 손가락 무공이 아주 쓸만하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강호의 어린 후배에게 친절하게 자신과 일행을 소개해 주는 자상한 노강호(老江湖)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나 궁해는 자상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공태까지 소개를 마친 궁해는 이내 진산월을 향해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네 검이 지난 백 년간 중원무림에 나온 고수들 중 제일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심지어는 모용단죽보다 강하다고 하는 자들도 있더구나. 그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너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아느냐?”
진산월을 응시하는 궁해의 얼굴은 기이한 열기에 뒤덮여 있어 흡사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보는 듯했다.
“나는 지난 평생 동안 오직 양손 무공만을 익혀왔다. 그동안 쌓아온 수련의 성과 덕분인지 얼마 전에 한 가지 그럴듯한 무공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 그런데 당최 이 무공을 펼칠 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해 어렵게 만들어낸 무공을 썩히고 있었다.”
진산월은 열띤 어조로 말하는 궁해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궁해는 진산월의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는 두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어느 때보다 강한 어조로 말했다.
“너라면 내 무공을 선보일 좋은 상대가 될 것이다. 오늘 방주의 부탁으로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너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세상이 말하는 인연(因緣)이란 건가 싶다. 나는 그런 걸 믿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확실히 인연이란 게 있긴 있나 보구나.”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진산월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무공이 무엇이오?”
진산월이 자신의 무공에 관심을 가지는 듯하자 궁해의 얼굴이 더욱 밝아지며 음성이 빨라졌다.
“혈해반(血海盤)이라는 것이다. 적혈수(赤血手)와 낙암살공(落巖煞功), 환천멸겁장(環天滅劫掌)의 장점만을 취해 만든 무공이지.”
궁해는 태연히 자신의 무공 내역을 밝혔다. 그것은 일견 자신의 무공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의 표출 같기도 했고, 순수하게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려는 천진난만함의 다른 모습 같기도 했다.
기이한 것은 공태의 태도였다.
강적에게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내역을 드러내는 것은 불리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는 전혀 제지하거나 그에 대해 꺼려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 어린 눈으로 진산월과 궁해의 대화를 듣고만 있더니 궁해의 말이 끝나자 먼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궁 형, 자기 무공만 말하지 말고 내 천지망(天地網)에 대해서도 말해주시구려.”
궁해는 그를 힐끗 돌아보더니 퉁명스런 어조를 내뱉었다.
“그건 자네가 직접 말하게.”
공태는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웃었다.
“크크크. 신검무적을 궁 형 혼자 독차지 하려는 모양인데, 나도 이런 기회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걸 잘 알지 않소? 모처럼 어렵게 완성한 천지망의 진면목을 보여줄 기회를 잡았는데 궁 형 혼자 재미 보게 할 수는 없지.”
이어 그는 궁해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내 천지망은 천공조와 낙혼유수강(落魂流水剛), 극섬혈천지(極閃血穿指)를 결합하여 만든 것일세. 막상 완성해 놓고도 한 번도 제대로 펼칠 기회가 없어서 위력이 어떤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네.”
지금까지 다소 경박하게 보이던 공태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할 정도로 진지해졌다.
“자, 이제 선택하게. 자네의 그 검정중원을 상대할 무공은 궁 형의 혈해반인가, 내 천지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