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410화
제 363 장 괴인교리(怪人狡狸) (2)
교리가 나타날 때부터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던 공태의 주름진 얼굴에 묘한 경련이 일어났다. 정확히는 검정중원을 보기 위해 궁해를 제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그때 공태의 얼굴에는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슬픔과 비통, 서운함과 납득의 여러 가지 표정이 다양하게 떠올라 있었다.
진산월은 검정중원을 보고 싶었다는 교리의 말에 담긴 의미를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걸 보지 못해 서운했겠구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대신에 또 다른 멋진 검초를 보았으니 여기까지 달려온 게 헛걸음만은 아니었소.”
교리의 눈에 한 줄기 예리한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유운검봉이라고 했던가? 그건 혹시 형산파의 육결검객을 상대할 때 사용했던 수법 아니오?”
진산월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당산에서 벌어진 형산파와의 대결에서 마지막 순간에 그가 고진의 무시무시한 검법에 맞서기 위해 펼쳤던 것은 유운삼십이봉이었다. 당시 고진의 검법은 진산월로서도 처음 겪어보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것이어서 검정중원으로 상대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하나 진산월이 선택한 것은 검정중원이 아닌 유운검법의 절초인 유운검봉이었고, 무려 서른두 개에 달하는 검봉이 하나로 합쳐져 고진의 정체 모를 검법을 격파했던 것이다.
당시 장내에 있던 많은 고수들은 그 광경에 압도되어 한동안 진산월이 사용한 검법을 놓고 여러 말들을 떠들어댔으나, 누구도 진정한 내막을 알지 못해 신검무적에 대한 신화만 더욱 커지고 말았다.
이번에 진산월이 사용한 수법은 당시에 비해 더욱 발전한 것이어서, 아예 서른두 개 검봉의 형태가 처음부터 합해진 채로 발현되었다. 검봉들이 합쳐지는 과정이 생략되어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을 뿐 아니라 그 위력 또한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진산월은 겉으로 보아서는 누구도 같은 검법이라는 것을 알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교리가 한눈에 두 검법의 연원이 같은 것임을 알아보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당산에 있었던 모양이구려.”
“동행했던 일행 덕에 전설의 악산대전을 실제로 구경할 수 있었소. 정말 눈이 호강했던 즐거운 시간이었소.”
진산월은 교리와 동행했다는 인물이 누구인지 잠깐 생각해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시와 지금의 검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한눈에 알아보아서 상당히 놀랐소. 어떻게 알아봤는지 말해줄 수 있겠소?”
진산월의 솔직한 물음에 교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운이 좋았다고 하면 안 믿을 테고……. 내 눈이 상당히 좋은 편이오.”
진산월은 교리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눈을 가진 건 무림인으로서 축복받은 일이지. 본 소감이 어떻소?”
교리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악산대전 당시에는 서른두 개의 검광이 하나로 합쳐진 것 같았소. 위력은 패도무쌍(覇道無雙)했으나, 고진이 조금만 더 싸움에 능숙했다면 검광들이 합쳐지는 순간을 노렸을 거요. 다시 말해서 당시의 검은 최고의 절학이긴 했으나, 약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소.”
진산월은 부인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런 점이 있긴 했었소.”
“그런데 오늘의 검은 그러한 약점이 완벽히 보완되어 있었소. 똑같은 검로에 똑같은 방식으로 펼쳐지지 않았다면 나도 그 검이 악산대전 당시와 같은 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요. 그만큼 오늘의 검은 완벽한 것이었소.”
“과분한 칭찬이오. 나는 아직 내 검이 완벽하다고는 생각지 않소.”
교리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물론 사람인 이상 완벽할 수는 없겠지. 내가 말한 것은 유운검봉이라는 검초로서는 완벽했다는 뜻이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유운검봉은 극(極)에 달해 있으며, 더 이상의 유운검봉은 없을 거라는 의미요.”
“더 이상의 유운검봉은 없다라…….”
진산월은 나직하게 교리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유운검봉이라는 초식 자체는 완벽했으나 검법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것일 수도 있고, 유운검봉이 극에 달해 있으니 진산월의 어떤 무공도 그보다는 못할 거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유운검봉이 완벽한 만큼 진산월의 검법 또한 완벽에 가깝다는 말일지도 몰랐다.
교리는 생각에 잠겨 있는 진산월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소. 내 말은 말 그대로의 의미이니까. 그보다 악산대전 당시 상대했던 고진의 검법은 어떠했는지 말해줄 수 있소?”
진산월은 잠시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고진은 두 개의 검법을 사용했소. 처음의 검법은 무척 빠르고 살인적인 위력을 지닌 것이었소. 변화는 조금 단순했으나, 형산파의 무공답지 않게 강맹하고 파괴적인 검법이었소.”
“그것은 형산파의 최고 검법인 연혼팔검이었소.”
“나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었소. 그런데 당신이 중원의 무공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구려.”
진산월이 다소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교리는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당시 동행했던 자가 중원무공에 대해 아주 해박해서 그의 덕을 좀 보았소. 연혼팔검이란 것도 그자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요.”
진산월은 다시 한 번 교리가 동행했다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형산파의 연혼팔검은 형산파 최고검법답게 강호무림에 좀처럼 등장한 적이 없었다. 형산파의 오결검객들 자체가 워낙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연혼팔검은 오결검객 중에서도 극소수의 인물들만이 익히고 있을 뿐이어서 무림인들 중 실제로 그런 검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조차 그리 많지 않았다.
진산월도 과거의 기록으로 형산파에 그런 검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실체는 본 적이 없었기에 당시에 직접 상대하면서도 반신반의했을 뿐, 그 검법이 연혼팔검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런데 중원의 인물도 아닌 교리가 연혼팔검을 알아보았으니 교리에게 그 사실을 말해준 그의 동행에 대해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교리와 동행을 할 수 있었으며, 강호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연혼팔검을 단번에 알아보았을까?
진산월은 눈을 빛내고 물었다.
“대단한 동행을 두었구려. 그가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소?”
교리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귀호라는 인물이오.”
“그 또한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의 본명이 무언지도 말해줄 수 있겠소?”
“우리는 서로 동행하긴 했지만 이름을 물어볼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 말이오.”
“그럼 이름도 모르는 자와 동행을 했단 말이오?”
“처음부터 서로 피곤하게 이름 같은 건 물어보지 않기로 약조했소. 덕분에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법 편하게 함께 다닐 수 있었지.”
진산월은 내심 침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리가 그런 일로 거짓을 말할 사람은 아니었으니, 귀호라는 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아낼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교리가 귀호의 이름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귀호의 진실한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귀호 또한 교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강호의 무공에 대해 해박하고 교리와 같은 인물과 동행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귀호는 과연 누구일까?
진산월은 새삼 귀호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으나, 그때 교리의 물음이 들려왔다.
“고진의 두 번째 검법은 어떠했소?”
진산월의 눈썹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졌다.
고진이 마지막에 사용했던 검법을 떠올리자, 당시의 섬뜩했던 기억들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는 비록 유운검봉으로 고진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차이는 그야말로 실낱과도 같아서 승패가 뒤바뀌었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고진의 검은 ‘검해(劍海)’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진산월 또한 처음 그의 검에 노출되었을 때는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듯한 아득함을 느껴야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고진의 그 거대한 검세 속에 보였던 아주 희미한 틈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쩌면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했을지도 몰랐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진이 마지막에 사용했던 검법은 그전의 검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소. 거대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아주 독특한 검법이었소.”
“마치 바다를 대하는 듯한 막막함을 느꼈겠구려.”
교리의 말이 마치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본 듯 예리했기에 진산월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정말 거대한 바다가 꿈틀거리는 듯한……. 하나가 아닌 두 개의 각기 다른 바다가 다가오는 것 같았소.”
“그 각기 다른 바다는 사납고 무서웠지만, 두 개의 바다가 서로 완벽하게 융합하지 못했겠구려. 당신은 그 속에서 두 바다 사이의 허점을 발견했을 테고.”
진산월은 입을 다물고 교리의 얼굴을 응시했다.
대수롭지 않은 듯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교리의 얼굴은 평범해 보였으나, 진산월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고진이 사용한 검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정확히는 모르오. 하지만 그 연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소.”
“그게 무엇이오?”
“대라삼검(大羅三劍)이오.”
“대라삼검?”
진산월은 기억을 되살려 보았으나 처음 듣는 무공이었다.
“대라삼검은 모두 세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대라궁해(大羅穹海)라는 초식이 있소. 고진은 우연히 대라궁해의 절반이 적힌 비급을 얻고 그것을 수련해 왔던 거요.”
진산월로서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진의 마지막 검법이 대라궁해의 절반에 불과하단 말이오?”
“대라삼검은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검법이오. 고진은 비록 수십 년간 고련했으나, 대라궁해의 절반밖에 얻지 못했소. 그는 나머지 절반을 자신이 스스로 보완해서 결국 하나의 무공으로 완성한 거요.”
그제야 진산월은 고진의 검법이 왜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었고, 그 사이에 미묘한 허점이 존재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중 하나의 바다는 대라궁해의 절반이었고, 나머지 바다는 고진이 창안한 검초였던 것이다.
교리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만약 고진이 대라궁해를 완성했다면 그가 펼친 두 개의 바다는 하나가 되었을 테고, 그 사이에 허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을 거요.”
진산월은 교리의 말대로 고진의 대라궁해가 완전한 것이었다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고진이 펼친 검에서 찾아낸 희미한 틈은 그의 검초가 완벽하지 않았기에 발생한 것이었다. 만약 그러한 틈이 없었다면 당시에는 완벽하지 않았던 유운검봉만으로 고진의 검을 꺾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진산월은 교리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소? 그것도 귀호라는 인물이 알려준 거요?”
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나만의 비밀이라고 해둡시다. 내가 당신에게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한 가지 알려줄 게 있기 때문이오.”
“그게 무엇이오?”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담담하기만 했던 교리의 두 눈에 처음으로 기광이 번뜩거렸다.
“고진의 대라궁해는 비록 반쪽자리에 불과했으나, 완성된 대라궁해를 익히고 있는 사람이 있소.”
진산월은 황급히 물었다.
“그가 누구요?”
“당신도 한 번은 만난 적이 있을 거요. 그자는…….”
교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산월은 이름 하나를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조익현.”
교리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요.”